선생님께서 일제에 찢긴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신 성균관대학에 1981년 첫발을 디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 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학교 행정실에서 합격증과 함께 받은 책 한 권이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표지에 ‘明倫堂’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장식되었고, 그 위에 ‘金昌淑’이라고 커다랗게 인쇄 되어있었지요.
명륜동에서 신림동 집까지 95번 버스를 타고 가면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저는 누런 봉투 안에 있는 바로 ‘그 책’을 아무 생각 없이 꺼내들었습니다. 감수성 예민하던 젊은이에게 표지부터 우중충하고 한자가 범벅이 된 이 책은 첫 장부터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는 선생님의 존함을 그 당시 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기껏 연상되는 인물이라고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탤런트 ‘김창숙’정도였다고나 할까요. 제 나이 때 이미 선생님께서는 유학을 공부하시면서 ‘동학농민전쟁’으로 고양된 민족혼을 교육을 통해 승화시키고자 결심하셨고, 훌륭하신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평등사상’을 주변 식솔들과 늙은 종, 집안 일꾼들에게 몸소 실천하셨던 계몽적‧실천적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생각 없이 몇 페이지를 넘기던 제 손이 어느 부분에서 멈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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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 선생 |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 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중략)......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라”
바로 ‘이승만 독재’를 질타하고, 통일의 염원이 멀어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셨던 선생님의 사자후가 제 잠든 영혼을 세차게 깨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박정희’ 뿐이었고, 역사책 저 뒤편에 손가락으로 꼽아도 될 만큼 얇은 분량으로 채워진 근‧현대사 부분에서조차 ‘이승만’은 말년의 정치적 오점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에 버금가는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이며, 건국의 아버지였으며,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매진하는데 초석을 쌓은 위인이라고 써놓은 대로만 알고 있었던 저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집에 와서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선생님의 책을 정독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 지금까지 제가 배우고 알았던 역사지식의 많은 부분이 엉터리라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왜 역사책에서 선생님의 함자 ‘김창숙’이 지워졌는지 인식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옳았고 이승만이 틀렸으며, 박정희는 민족혼을 말살하는데 앞장선 친일파요 독재자일 뿐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만든 역사서에서 선생님은 역사 뒤편에 꽁꽁 숨겨 놓아야할 ‘불량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수감되셨던 달성 감옥에서,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일본인 간수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나는 일본에 붙어먹은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짖어댄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자가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된 것은 만 번 죽어도 지은 죄가 남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기록을 보고,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한국 최초의 신체시를 지은 민족주의자요, 계몽주의 지식인이었다고 배웠던, 죽은 지식들을 폐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 머나먼 타국에서 풍찬노숙하시면서 독립운동과 옥고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두 아드님조차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셨으며, 교육자로서, 임정의 핵심요원으로서, 또한 무장독립군인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선생님과 단재 신채호님에 필적하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시고도 역사의 버림을 받았던 이유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민족의 단결만이 최상이라는 유연한 철학과, 해방 후 외세의 개입을 선두에 서서 반대하셨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의 등장을 탐탁지 않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놓고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이승만에게 “당신은 민족을 팔아먹었으니, 어찌 다른 날에 국가를 통째로 팔아먹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소”라고 질타하신 선생님의 기개가 대명천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이 땅에서 아직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들이 죽어서 어찌 선생님을 마주 대할 수 있을는지요.
역사책에서 근‧현대사를 건성으로 다루면서,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들을 홀대(忽待)하는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찌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이들이여,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라. 젊은이들이여, 행동하고 실천하기를 아끼지 말라”고 하셨던 선생님의 가르침을 저희들이 그대로 지키고 따랐던들, 어찌 감히 저 파렴치한 인간들과 그 후손들이 언필칭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셨던 ‘반외세‧반독재‧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한 자주민족 문화국가의 길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에 눈물이 나옵니다. “도대체 네 놈들이 어떻게 했기에 친일파 반민족주의자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외세의 문화와 자본이 들어와 민족혼을 말살하고 국부(國富)를 마음대로 유린하고 침탈하느냐?”고 꾸짖는 선생님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귓전을 쟁쟁하게 때립니다.
이제 이승만은 10여 년 남짓을 친일 수구언론의 비호 아래 숨어 있다가 다시금 ‘건국의 아버지’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으며, 김구 선생님은 ‘테러리스트’ 정도로 격하되고 있습니다. 또한 외세의 자본은 이 나라를 해일처럼 휩쓸고 있으며, 그들과 한통속이 된 매판 자본가들에 의해 서민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꿈꾸시던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단결된 모습을 구현하고 인류의 공영발전에 이바지하는 동량(棟樑)을 길러내실 목적으로 설립하신 대학은 기능적 지식만 충만한 영혼 없는 인재들을 기계처럼 뽑아내는 기술자 양성소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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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 |
그래서 중앙 도서관 옆 나무숲에 가려져 녹물 찌꺼기를 뒤집어 쓴 채 외롭게 서계신 선생님이 더 슬프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병든 몸 구차하게 살려고 안했는데, 달성 감옥에서 몇 해를 묶여있구나. 어머니 가시고 아이는 죽었으니 집은 망했고, 아내는 흐느끼며 며느리 통곡하니 작은 숨결에도 놀라는구나.”
선생님의 동상에 새겨진 이 비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젊은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들을 탓하기 전에 제대로 살지 못한 저 같은 못난 기성세대의 잘못이 천만 배는 더 크겠지요.
선생님이시여, 부끄럽지만 저희들을 다시 채찍질 해주십시오. 다시 일어나셔서 불쌍한 우리 대한민국을 보살피고 인도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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