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 [수]
2005 - 에어프랑스 여객기, 토론토 공항 활주로 이탈 화재
2일 오후 3시50분께(현지시간)(한국시간 3일 오전) 캐나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에어 프랑스 소속 A340 제트 여객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공항 담벼락을 들이받아 화염에 휩싸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CBC 방송 등 캐나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사고기에 타고 있던 309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모두 무사하며 14명이 경상을 입었다.
사고 이후 피어슨 공항에 내릴 예정이던 항공기는 오타와 공항으로 우회하고 있다.
이 항공기에 타고 있던 로엘 브라마르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번개가 치고 문제가 생겼다"며 "나쁜 기상여건이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공항 주변에는 폭우가 쏟아져 시계가 아주 나빴으며 강한 천둥과 번개가 치는 상황이었다.
또 일부 외신은 사고기가 벼락을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에어 프랑스 358편은 이날 오후 파리 드골 공항을 떠나 3시35분 피어슨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고기는 활주로에서 200m 정도 벗어나 공항 서쪽끝 담벼락을 충돌한뒤 동체가 기울어 꼬리부분이 공중으로 들린 상태로 작은 계곡에 처박혔다. /연합-한겨레
1996 -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총리 드브레(Michel Debre, 1912~1996) 세상 떠남
파리 출생. 일찍부터 제4공화정 공격의 논진(論陣)으로 알려졌고, 1958년 드골 복권을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제5공화정 초대 총리를 지냈으며, 1968년 1∼5월 재무장관, 1968년 5월∼1969년 6월 외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969년 6월 개방정책을 들고 등장한 대통령 G.J.R.퐁피두 밑에서, 강경파 드골주의의 견제적 존재로서 국방장관에 취임하였고, 1972년 7월 P.메스메르 내각에서도 유임하였다.
1984 - 김원기,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1984년 오늘 미국 L.A.에서 열린 제23회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대회! 이 종목 62kg급으로 출전한 김원기 선수가 우리 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줬다. 김원기의 금메달은 이 대회의 첫 번째 쾌거로서 우리 선수단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한국은 LA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메달순위 10위라는 역대 올림픽 참가 사상 최고성적을 거뒀다. /YTN
1969 - 닉슨 미 대통령, 루마니아 방문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오늘 루마니아를 방문한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이 수도 부쿠레슈티의 공항에 도착한 닉슨 대통령을 맞이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산국가를 방문한 닉슨 대통령! 수많은 루마니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는다. 닉슨 대통령과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통해, 두 나라 간의 통상확대 방안 등을 논의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후 중국과 소련에 대한 역사적인 순방외교를 펼친다. /YTN
1945 - 이탈리아의 작곡가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 세상 떠남
토스카나주(州) 리보르노 출생. 리보르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1881년 오페라 《제사장(製絲場)에서》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그만 두고,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일하다가 뒤에 음악교사가 되어 체리뇰라에 정착하였다. 1889년 음악출판사의 현상모집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1등으로 당선, 이듬해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함께 베리스모(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그 후에도 일본을 무대로 한 《이리스》(1898) 등 10여 편의 오페라를 썼다.
1934 - 소련의 우주비행사 비코프스키(Valery F. Bykovsky, 1934~ ) 태어남
1963년 6월 14~19일 보스토크(Vostok) 5호 우주선을 타고 지구 주위를 81번 돌았다. 16세부터 비행교육을 받았고, 1952년에 입대하여 1959년에는 제트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60년대초 주코프스키공병학교에서 우주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그가 궤도상에 있은 지 이틀 뒤인 1963년 6월 16일 최초로 우주비행을 한 여성인 발렌치나 테레시코바가 탄 보스토크 6호가 발사되었다. 두 우주선은 나란히 궤도를 돌면서 5㎞ 거리까지 접근하기는 했지만, 랑데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3시간 차이를 두고 지구로 돌아왔다.
궤도상에 머물러 있던 6월 18일에 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돌아온 뒤에는 소련의 영웅이라는 최고 예우를 받았다. 또한 소련 최고의 전투 공로상인 붉은별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데, 국경분쟁 때 공중전에서 세운 공로로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975년 7월에 있었던 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에 따라 우주비행사들의 훈련을 맡았으며, 소유즈 22호의 사령관으로서 1976년 9월 15일부터 190시간 동안 비행했다.
1934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세상 떠남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힌덴부르크! 1934년 오늘 여든일곱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8군 사령관을 지내며 큰 공을 세워 군신(軍神)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힌덴부르크! 1925년 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로 바이마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1933년 대자본가들에게 설득당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독일 '제3제국' 출현의 길을 열어 줬다. /YTN
1923 - 미국 제29대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 1865~1923) 세상떠남
1865년 오하이오주(州) 코르시카에서 출생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언론계에 진출하여 오하이오주의 《메리언 데일리 스타》지(紙)의 사주(社主)가 되었다. 1900∼1904년 주(州) 상원의원, 1904∼1906년 주 부지사, 1915∼1921년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192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정상으로의 복귀'를 제창하고 당선되었다. 공화당정책에 충실하여 대기업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산업장려정책을 시행하였다. 재임 중 관리들의 독직(瀆職)사건에 그의 정부각료들 일부가 관련되어 정치부패가 폭로되었다. 그가 올린 유일한 성과는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세력을 확대·유지하는 데 성공한 점이다. 알래스카주 유세(遊說)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사하였다.
1922 - '전화의 아버지'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 세상 떠남
'전화의 아버지' 그레이엄 벨이 1922년 8월 2일 사망했다. 75세였다. 그가 사망하자 미국의 전화시스템은 1분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로 새로운 통신문화의 역사를 만들어 낸 그의 일생에 미국인들이 전화시스템을 잠시 정지시키면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벨의 전화 발명에 대한 열정은 농아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 농아자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기기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184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870년이었다. 26세에 보스턴 대학 발성생리학과 발성학 교수가 된 그는 농아자에게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얇은 막을 이용,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기기개발에 전념했다.
마침내 1876년 3월10일 인류최초로 전화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2월 22일 전화기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이후 2백km 이상 떨어진 곳과의 장거리통화에 성공한 벨은 1877년 벨전화회사를 설립, 일반인에게 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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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의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1808~89)라는 사실을 미국 하원이 표결을 통해 마침내 인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7일 '전화기와 관련된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며 이같이 보도하고, 이번 표결 결과에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하원은 16일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됐고 당시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텔레트로포노(Teletrofono)'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에 특허를 받아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우치 사후 113년 만에 인정했다. 그동안 벨의 자서전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메우치의 사연을 아는 여러 세대의 이탈리아인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메우치는 전기충격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소리가 구리선을 통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위해 1850년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특히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보다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을 맺어 큰 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됐다. 메우치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 재판은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중단됐다. /부산일보 2002
1921 - 이탈리아 테너가수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 세상 떠남
전설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가 1921년 8월 2일 그의 고향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48세였다. 화려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카루소는 1873년 나폴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인 카루소가 그나마 노래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곳은 나폴리 성당의 소년 성가대였다. 여기서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굴리엘모 베르기네였다. 그의 도움으로 카루소는 1894년 11월 모렐리의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할 수 있었고 1900년 마침내 스칼라 무대를 밟았다.
그는 무대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명성은 유럽전역을 열광시켰다. 결국 카루소 붐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전해져 메트는 카루소와 1902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해서 계약을 경신했다. 이 기간동안 무려 607차례의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카루소 신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20년 12월 24일. 늑막염이 심해 더이상 노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카루소는 1902년 3월 세계최초로 음반을 녹음, 본격적인 오디오 시대를 열었다. /조선
1884 -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낸 소설가 가예고스(Romulo Gallegos, 1884~1969) 태어남
194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내기도 한 그는, 베네수엘라 야노스(평원)의 압도적인 자연현상, 지방민속, 악어 사냥과 같은 사교행사 등을 묘사한 힘찬 소설로 유명하다.
〈 도냐 바르바라 Dona Barbara〉(1929)를 발표하여 남아메리카의 대표적 소설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범죄자나 악당, 순박한 시골사람을 등쳐먹는 인간들보다도 더 잔인한 농장 여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밖에도 야노스의 음유시인을 다룬 〈수탉 Cantaclaro〉(1934)과 열대림을 배경으로 한 소설 〈카나이마 Canaima〉(1935) 역시 뛰어난 작품이다. 〈카나이마〉는 밀림에 두루 퍼져 있는 악령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이밖에도 〈비참한 흑인 Pobre negro〉(1937)·〈이방인 El forastero〉(1942)·〈같은 대지에서 Sobre la misma tierra〉(1943)·〈반역 외(外) La rebelion y otros cuentos〉(1947)·〈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La brizna de paja en el viento〉(1952) 등의 주요한 작품을 썼으며 시나리오도 여러 편 썼다.
가예고스는 1936년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8년 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48년 11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추방당했으나 1958년에 다시 돌아와 종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The Wake of the Ferry'
1871 - 미국의 화가 슬론(John French Sloan, 1871~1951) 태어남
20세기초 뉴욕 시의 일상생활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필라델피아에서 상업적인 신문 삽화가로 일하면서 로버트 헨리와 함께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헨리를 따라 뉴욕으로 가서 1908년에 헨리와 다른 6명의 화가들과 함께 '8인전'을 열었다.
슬론이 그린 사실주의적인 도시풍속화는 ' 애시캔파(派)'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틈틈이 교육활동을 했으며,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자들의 정기간행물인 〈대중들 The Masses〉의 삽화를 그렸다. 1939년에 그는 〈예술의 요지 The Gist of Art〉를 출판했다.
전성기였던 1900~20년에 그린 〈일요일, 머리를 말리는 여인들 Sunday, Women Drying Their Hair〉(1912)·〈맥설리의 술집 McSorley's Bar〉(1912)·〈그리니치빌리지의 뒷골목 Backyards, Greenwich Village〉(1914) 등의 작품들은 뉴욕 생활의 따뜻하면서도 신랄한 인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주로 일하는 남녀들을 정감있게 묘사했다.
〈나룻배가 지나간 물결 Wake of the Ferry〉(1907)같이 낭만적인 우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슬론은 오히려 〈5번가의 비평가들 Fifth Avenue Critics〉처럼 날카로운 풍자적 표현을 수시로 작품에 담았다. 말년에는 그의 초기 작품의 특징이었던 아르 누보풍 위주로 되돌아갔다.
1868 -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 1868~1923) 태어남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립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본질적으로 친독일적인 태도를 취해 서방연합국과 그를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 1917년 그를 폐위시켰다. 그는 1920년 왕위를 되찾았으나 그리스에 큰 재난을 가져온 아나톨리아 정책에 힘을 쏟아 1922년 다시 왕위를 잃었다.
그리스 왕인 게오르기오스 1세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독일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하고, 총사령관(1900~)을 맡고 있을 때인 1909년 크레타 섬을 그리스 영토로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912~13년 발칸 전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13년 3월 6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의 왕이 되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매제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립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
1866 - 남극대륙 탐험을 지휘한 벨기에의 해군장교 제를라슈(Adrien de Gerlache, 1866~1934) 태어남
1897~99년 과학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한 첫번째 남극대륙 탐험을 지휘했다. 벨지카호(號)를 이용한 이 탐험에서 로알 아문센은 그의 항해사로 있었는데, 아문센은 그뒤 최초의 남극 탐험대를 이끌었다.
제를라슈는 그레이엄(파머)랜드의 북부를 발견한 뒤 벨지카호를 총빙(叢氷) 속으로 잘못 인도하여 13개월 동안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벨지카호는 남극대륙에서 겨울을 난 첫번째 배가 되었다.
1901년 동물학적인 표본을 채집하기 위해 페르시아 만을 항해했고, 1905년 그린란드 동부 연안에서 해양학적인 조사도 수행했다. 190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북부와 바렌츠 해, 카라 해에 있는 러시아 지역을 조사했고, 1909년에는 바렌츠 해와 그린란드 해에 대한 해양학적인 조사를 했다. 1909년 제를라슈는 북위 77°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린란드를 횡단했다. ...
1824 - 그리스의 시인, 정치가 발라오리티스(Aristotelis Valaoritis, 1824~1879) 태어남
시작(詩作)과 정치활동을 통해 열렬한 애국심을 보여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레우카스·제네바·파리·피사(1842~48)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국과 독일의 여러 지방을 여행했다.
1850년 레우카스로 다시 돌아와 1863년 이오니아 군도(群島)를 그리스에 귀속시키는 데 맹활약했다. 그뒤 그리스 정계에 뛰어들었으나 크레타 협정이 실패로 돌아간 후 1869년 은퇴했다.
초기 시집 <시작집 Stichourgemata>은 1847년에 나왔으며, 1857년에 출판된 <회고록 Mnemosyna>은 나중에 크게 증보되었다. 장편시 〈Kyra Phrosini〉(1859)는 〈Athanases Diakos〉(1867)·〈Astrapoyiannos〉(1867)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역사에서 당대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미완성인 〈Photeinos〉는 14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1891년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발라오리티스는 이오니아 학파가 쓰는 구어체로 작품을 썼으며 입담 좋고 재능있는 운문 작가였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에 대한 숭배와 열렬한 애국심을 통해 더욱 고양된 낭만주의적 열정도 그의 화려한 문학 경향에 제재를 가하지는 못했으며, 많은 작품들이 결집력과 자기비판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1799 - 프랑스의 기구 제작자 J. E. 몽골피에(Jacques-Etienne Montgolfier, 1745~1799) 세상 떠남
프랑스의 열기구(熱氣球) 발명자. 형은 Joseph Michel de Montgolfier(1740∼1810), 아우는 Jacques Etienne de Montgolfier(1745∼99)이다. 리옹에서 가까운 아노네에서 제지업을 경영했는데, 연기가 위로 올라가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은 연기가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인류 최초의 항공기인 열기구를 만들었다.
지름 약 10m인 아마로 만든 기구 안에 종이를 바르고, 그 속에 열공기를 채워서 1783년 6월 5일 아노비시 광장에서 떠오르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파리에서 J.F.P. 드 로지에와 다를랑드후작이 탑승함으로써 최초의 유인비행에 성공하였다.
최초의 무인기구는 약 2㎞를 나는 데 지나지 않았으나, 유인기구는 파리 남부를 돌고 동쪽으로 약 8㎞ 날았다. 먼저 닭·집오리·양을 태워 동물비행을 실행하고, 이어서 밧줄로 고정시킨 상승시험으로 인체에 대한 고도에서의 영향을 조사한 뒤에 인간을 탑승시켰다.
- 'Mrs. John Douglas'
- 'Portrait of a Lady in Blue'
1788 - 영국의 화가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 세상 떠남
서퍽주(州) 서드베리에서 태어났다. 런던에서 그림을 배우고 풍경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초상화가로 데뷔하였다. 초상화에서는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아 라이벌이던 레이놀즈의 냉정한 통찰에 입각한 성격묘사와는 대조적으로, 모델의 성격을 정서적으로 파악하여 유연한 광선 밑에 생겨나는 명암조와 우아한 색조로 표현하였다.
평생 풍경화를 계속 그렸으며 만년에 취재차 시골을 방문할 틈이 없을 때에는 탁상에 놓아둔 나뭇가지나 작은 돌을 보며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정열을 쏟았다. 그의 풍경화는 자연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19세기 풍경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767년 레이놀즈와 함께 로열 아카데미 창립에 참여하였으나, 그 후 아카데미와의 관계가 항상 원활하지 못하여 자택을 작품 발표회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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