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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읽고
한국 불교학자가 본 일본불교, 일본불교의 렌즈에 비친 한국불교
마성 스님/ 동국대학교 강사
이 서평은 <불교평론> 제30호 (서울 : 불교평론사, 2007 봄호), pp.255-265에 실렸다.
책의 성격과 특징
얼핏 보면 이 책은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즉 일본불교의 장점과 단점[明暗]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일본불교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불교와 불교학계를 거울로 삼아 우리의 불교와 불교학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겨 ‘개인의 것’이 아닌 ‘공적(公的)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 책을 발행하게 되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서는 하찮아 보이는 기록일지라도 후일에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을 담는 그릇도 중요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이 책은 내용도 좋지만 책의 표지와 편집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태어났다. 이런 일은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해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는 물론 불교신자, 더 나아가 일반 독자들도 마음 편하게 읽고 음미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학문세계
우선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은 물론 티벳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학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고 있다. 어느 특정한 분야만 연구해 온 학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김 교수의 학문세계는 폭이 넓고 깊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수는 후일 ‘자기철학’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저자는 <이즈쓰 도시히코를 아십니까?>라는 글에서 자신은 ‘불교인문학’을 꿈꾸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이상적인 학자의 모델로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를 상정하고, 그가 걸었던 학자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 역시 나름대로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으로 불교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을 제시할 수 있는 학인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보편적인 철학 속에 불교가 살아 있게 되겠지요. 불교는 결코 불교도들만의 것이 아닌 것으로써 말입니다. 그때 불교는 세계 모든 인류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세계는 진정으로 한 떨기 꽃이 될 수 있으리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106쪽)라고 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의 교수라면 분명히 전공이 있다. 그러나 그 전공은 대학에서 학문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기 전공 분야 이외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학문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큰 의사, 대의왕(大醫王)이라면 인간의 모든 질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큰 학자는 전공 분야는 물론 불교학이라는 울타리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간혹 평자(이하 필자로 함)에게 종파가 무엇이며 무엇을 전공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처해진다. 필자는 그저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학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카테고리 속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승려학자라면 당연히 불교학 전반에 대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는 것은 일반학자가 아닌 승려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떤 신도가 찾아와서 대승불교에 대해 묻는다면, 내 전공은 초기불교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크게 실망하겠는가?
한편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들은 대부분 필자도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이 책의 내용과 똑같은 주장을 필자도 다른 지면을 통해 피력한 것도 있다. 전혀 다른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내용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혹 견해가 약간 다른 부분도 있다. 이것은 접근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불교와 불교학 발전을 염려하는 마음은 똑같다. 여기서 저자가 제기한 많은 주제에 대해서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골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불교는 ‘종파불교(宗派佛敎)’이지만 한국불교는 ‘회통불교(會通佛敎)’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가 아니라는 점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불교는 장례불교’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선 저자의 주장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필자의 소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종파불교와 회통불교
저자는 일본불교의 특징 혹은 문제점으로 ‘종파불교’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일본불교는 종파불교이기 때문에 한국의 회통불교가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일본의 종파불교보다는 회통불교를 지향하는 한국불교가 더 우수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범음교와 일음교>라는 글에서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쿠라 신불교(新佛敎)’ 이후 형성된 것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최상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선택’과 ‘전수(專修)’가 종파불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교판론 대신 회통론을, 선택 대신 융합을, 전수 대신 겸수(兼修)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회통불교의 입장은 ‘이치는 하나이고, 수행은 겸비하자[理同事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회통불교는 ‘일음교(一音敎)’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는 에카라사바다(ekarāsavāda, 一味論)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도 예전에는 회통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히에이잔(比叡山)의 사이쵸(最澄, 767-822)는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중심으로 일불승(一佛乘)의 회통을 시도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오늘날에는 <일본불교종파사전>까지 나오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불교가 갖는 회통성은 일본불교에는 큰 약방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예전의 한국불교는 분명 회통적(會通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라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불교도들은 한국에 몇 개의 종파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일사일종(一寺一宗)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1962년 제정되어 1988년 폐지된 불교재산관리법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것이 바로 종파들이다. 이미 100여 개의 종파로 난립된 우리 불교가 일본의 종파불교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 <일본불교종파사전>이 있듯이, 우리도 앞으로 <한국불교종파사전>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만 저자는 ‘교단적 선택과 전수냐 회통론적 융합과 겸수냐’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인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코피(copy)’론 비판(1․2)이다. 이 글은 유일하게 같은 제목으로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가 아니라고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저자는 “제가 다른 나라에 갔더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52쪽)라고 말했다. 이것은 저자가 일본에 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다른 나라에 갔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외국학자들로부터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 혹은 아류(亞流)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처에 한국과 한국불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흘러 다닌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는 것은 현재 한국의 불교학자들의 몫이다. 사실 안에 있을 때에는 한국불교의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 나가 보면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불교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는 글을 많이 써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국불교가 세계에서 최고라고 외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안목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한국의 사찰을 외국에 건립하고 한국의 승려를 외국에 파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정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영문 서적들이 많이 발행되어야만 한다. 이제 전문적인 학술 논문들은 영어로 씌어져야 할 것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일본학계에서도 영어를 하는 분들이, 이제는 일본 학계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175쪽)라고 했다. 일본의 아라마키 노리토시(荒牧典俊) 선생은 가능한 일어로 논문을 안 쓰려고 애를 쓰고, 일본 국내에서 나오는 논문집에도 영어로 논문을 쓰고 있다는 대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 불교학계에서도 이런 추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계 속에 한국불교와 한국불교학을 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본불교와 일본승려
다음으로 눈여겨 볼 대목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이다. 일본불교의 어두운 단면 가운데 하나가 ‘장례불교’라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이제 그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실패한 장례불교를 우리가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저자가 이미 <불교평론> 제18호(2004년 봄)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필자도 불교장례문화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논문(「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본 오늘의 불교장례문화」, <참여불교>, 2004년 0506호)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매우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았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일본 사원의 기능이 장례의식과 죽은 자를 위한 뒤처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불교가 죽은 사람 뒤치다꺼리나 해서 되겠느냐’고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스님의 역할이 바라문교의 바라문처럼, 사제자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본의에서 벗어난 것임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장례불교 소산인 납골묘원을 본받아 한국에서도 앞 다투어 납골당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유골을 자연 속으로 되돌리는 ‘자연장(自然葬)’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평소 필자가 주장해 왔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일본불교가 장례불교’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교가 바라문화, 장례불교화 되어 가고 있는 점을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승려들은 ‘학문의 길과 신행의 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본 학승들의 삶은 진정한 의미의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즉 ‘행자(行者)’의 모습이 아니다. 학문과 신행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질 확률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인도철학의 한 특징은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다.' 즉 종교와 철학은 둘로 구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확실한 이론을 바탕으로 실천에 옮기는 수행론, 수증론(修證論)이 뒤따라야만 힘을 얻게 된다. 여기에 다시 의례, 의궤(儀軌)가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종교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론과 수행이 별개인 일본의 학승들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보면 그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김 교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을 “연대하지 않는 각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즉 “그러니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을 하되, 그 각성된 개인이 연대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79쪽)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일부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무언가 한 가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가 말한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라는 말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각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기의 몫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교단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파승(破僧)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주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불교 승단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살이’다. 점차 대중처소에는 스님이 줄고, 토굴이라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 혼자 산다. 이제 승려가 한 자리에 모여 의례를 집행할 경우에도 전혀 호흡이 맞지 않는다. 앞으로는 ‘일인일사(一人一寺)’로 변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만일 승가공동체가 유지되지 않으면 불교라는 종교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의 많은 부파가 오늘날 현존하지 않는 것은 그 부파의 전통을 계승한 출가집단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부파의 사상과 실천수행법은 책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서구 불교의 특징이 바로 ‘무소의 뿔처럼 각자 자기 나름대로 불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구인들은 승가제도로서의 불교보다는 불교가 주장하는 가르침, 엄밀히 말하면 철학적인 면이나 개인적인 실천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 현재 서구에는 출가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로서의 불교교단은 존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불교를 탐구하는 사람들만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출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 승단의 전통을 계승해 가야할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미래에까지 불교 승가가 존속할 것인가를 늘 걱정하고 있다. 필자가 학문하는 것도 불교 승가의 발전과 법이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필자의 최대 관심사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승가가 미래에까지 존속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만일 승가의 맥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번 끊어진 승가의 맥은 다시 복구하기 어렵다. 현재 상좌부 불교 국가에 비구니 승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도 승단 내부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현전승가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일본불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마츠오 겐지 지음/ |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제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들 것입니다. 지금 개정판을 만드는 중입니다. 전체를 크게 4부로 나누고 해서, 읽기 쉽게 하였습니다. 아직 초교 밖에 안 보았지만 봅에는 나오지 싶습니다. 마성스님 서평은 불교평론에 실렸던 것인데, 우리 공부방 5집에 재수록했습니다. 그런데 진광님께서는 이 책을 다 읽으셨는지요? 나무아미타불
시중에서 구할 수 없군요? 그러나 다행히 개정판을 준비중에 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온대다가 그 넝쿨에 수박, 고구마, 감자, 오이, 참외, 딸기, 상추, 배추, 치즈와 쌈장과 셀러드까지 딸려 온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손에서 책을 뗄 수 없고, 눈에서 글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까울 정도로 재밌고 흥미롭고,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참 복이 많구나~~ 감탄하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다니~~ 완전 행운입니다~~!! 꾸벅~~ 감사드립니다.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쉽게 공감하고 감탄하고 감동할 수 있음에 대하여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호성교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 같아서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씀하시는 속도로 읽어나갔습니다. 글을 읽는 속도는 기억능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공부방에서 - 삭제된 - 읽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느꼈습니다.그리고 일본불교사 공부한 것도 큰 도움이었고요. 앞으로 인연 닿는대로 교수님께서 발행하신 모든 책을 읽어나가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책에서 언급된 모든 책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살님. 왜 제가 "그런데 진광님께서는 이 책을 다 읽으셨는지요?"이라고 여쭈었느냐 하면, 사실 저는 마성스님을 비롯한 다른 분의 서평을 이렇게 옮겨주시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진광보살님께서 읽으시고 난 뒤의 서평 내지 독후감을 올려주시는 것이 더 감사하다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지금 댓글 두 칸을 통해서 독후감이 토로되었지만, 역시 시인답게 감탄과 환호의 언어를 토해주셨습니다. 그런 정서적인 것을 조금 냉철하게 죽이면서, 이 책을 아직 안 읽은 분에게는 책을 소개하면서도, 그러한 독서를 통해서 배우고 느끼고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을 제대로 한번 써주시면 ㅈ
교수님,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호성을 지를 지경인데~~ 그 환호성이 안 들리지요? ㅋㅋㅋ 이미 너무 시끄럽게 들리셨나요?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을뿐만 아니라, 일본불교에 대하여도 전무(全無)한 제가 이렇게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교수님의 친절한 안내 덕분입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알고 있다면 되짚어 보는 기회로, 모르고 있다면 새롭게 아는 기회를 제공해 주셔서 그야말로 "친절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독자를 배려하고 편안하게 하면서 스스로 자기주도 학습을 하게끔 하는 책이라고 봅니다. 공부하는 방법도 체득하게 하는 '친절한 금자씨' 보다 더 친절
좋겠습니다. 좀더 차분하게요. 시인이 쓰는 시가 아니라, 시인이 쓰는 산문을 기대해 본 것입니다. 요는 "남의 이야기 말고 자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지요. 한번 시도해 보세요. 그 글이 올라오기를 기대할께요. 시인은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인간은 좌뇌와 우뇌가 있으니 감성 더하기 이성을 해야겠지요. 그런 글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가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일본불교사 공부방"(독서회)의 권진(勸進, 조직자 겸 진행자) 역할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교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드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끝없이 말씀하시는 '자기철학, 자기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완전 새 형광펜 두 개를 썼습니다. 한 개를 다 써서 안 나오기에 하나 더 꺼내 밑줄을 좍좍 그으며 읽었습니다. 이 책은 불교인 보다 기독교인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교회에서는 저를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습니다만~~ ) 불교에 얼마나 무지한가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해서도 무지하긴 마찬가집니다. 교회에 몇 십년을 다닌 사람이나 처음인 사람이 거의 같은 내용을 수십년 반복해 들으니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잖아도 차분하게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하는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불교인들은 알아서 잘 읽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소수가 말이지요.). 올해는 이슬람교에 관한 책도 읽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이 책에 이슬람교에 대하여도공부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편협되지 않아서 일반인이나 종교인에게도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헌학 ---> 철학 -->해석학에 관한 부분도 아주 좋았습니다. 외람되게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 취향에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차분한 독후감도 써보겠습니다. 깊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잘 모르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것은 전승되어져 오는 교리해석에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자기해석을 전개함으로써 성립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에 비하면 가톨릭은 교리해석의 권한 교황청에서만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철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신앙하지 않고서, 주는 밤만 받아먹는 어린이처럼 시키는대로 하지요. 그런 현실을 타파하려면, 폭넓게 공부해야 합니다. 불교도 좀 제대로 읽어보고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요. 안 그러니 문제인 것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종교 교리에 대한 충성만을 강요하다 보면, 어느새 "연평도 사건이 일어난 것은 우리나라에 절이 많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것이지요. 좋은 독후감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불교사 공부방"에도 "일본불교사 기독교 공부방" 이런 것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책의 180쪽에서 언급하신 [일본체류기]가 아닌 [일본경유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일본을 통해서 보여주신 이 기록들처럼 미국이나 티벳이나 인도에서 몇 년간 체류하시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지요? 교수님을 한국에서 뵙는 것은 행운이지만, 다른 나라 체류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실 것이라 전제하고~~, 다른 나라에 나가셨다 오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원효스님과 의상 그리고 선묘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이미지님들입니다. 이제 니치렌과 도겐, 묘에와 무쥬, 신란과 잇벤, 호넨 그 이름들로 삶이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앞으로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니 날마다 이웃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입니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저도 풍요로와졌기에, '일본불교 전도사(=권진)'으로 나선 것입니다. 저절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끄러운 일지만, 일본체류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별로 뻗쳐나가지 못했거든요. 내년 2학기부터 또 연구년을 갈 예정입니다만, 10년 전과는 다르네요. 이런 저런 이유로 후순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잠깐이라도 갔다 오고요. 그렇게 노력해 봐야지요. 행운을 또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살님 제9차 일본불교사 강좌기행 큐슈는 못 가시는지요? 같이 갔으면 합니다만 --- 지금 보면 또 다를 터인데요.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