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주남산을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편이다.
젊은 시절 박물관 학예실장 하던 가까운 선배와 함께 남산의 불적을 찾아 이 골짝 저 골짝을 다녔었는데 그중에서도 칠불암 불상군이 제일 마음에 들었었다.
국보급임을 느꼈는데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아쉬웠는데 2009년 국보로 승격되어 다행스럽다.
칠불암은 현재 남산 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불상을 갖춘 곳이다. 창건연대 및 중창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들은 조성 기법 및 양식을 봤을 때 석굴암과 비슷한 시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작품들로 보고 있다. 이 작품들이 소재해있는 칠불암이라는 사찰 이름 자체가 이곳에 조각되어 있는 사면불과 삼존불을 합쳐 부른 데서 연유하는데, 먼저 높은 절벽을 등진 뒤쪽 자연암석에 3구의 삼존불이 있고, 그 앞쪽에 솟아 있는 돌기둥의 네 면마다 각각 1구씩, 총 4구의 사면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와는 별개로 칠불 왼쪽에 석등과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들을 모아 세운 신라시대의 탑이 있다.
남아있는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石經)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거대한 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지금은 전부 파손되어 불상 이외의 유구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칠불암 마애불상군 앞쪽에도 불상군이 반듯한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기왓조각들이 산재해 있어서 원래는 불상군이 안에 모셔진 아름다운 목조 전각을 신라인들이 만들어놓았던 것으로 확인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칠불은 조각수법이 빼어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방불의 연구에 귀중한 유물이 된다. 또, 이 절의 위쪽 신선바위(神仙巖)에는 반가상(半跏像)을 한 보살상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작품이다.
이 밖에도 많은 석재유물과 기와조각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암자는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던 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불상군은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2009년 9월 2일에 대한민국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먼저 삼존불은 본존불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협시보살을 두었다. 높이 5미터, 너비 8미터쯤 되는 바위의 동쪽 면에 거의 환조(丸彫)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새겨져 있다. 조각이 깊어서 모습이 똑똑하고 위엄과 자비가 넘치며 대좌의 앙련과 복련의 이중 연화무늬는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마치 만발한 연꽃 위에 앉은 듯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오른손에 보병(寶甁)을 들었고,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연꽃을 어깨까지 들어올리고 있으며, 모두 본존 쪽을 향하여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문수, 보현보살임은 확실하나, 두 상 중 어느 것이 보현이고 문수인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석굴암 문수,보현보살상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의 좌측에 있는 협시보살이다. 지혜가 뛰어나 보살의 으뜸으로 친다. 형상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에 지혜를 상징하는 칼이나 경권(經卷)을 들고,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더불어 석가불이나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이다. 문수와는 사상적으로 같은 맥락을 이루며 지혜의 보살인 문수에 대하여 그 실천적 행원자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보현보살상은 단독으로는 거의 제작되지 않고 대부분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 혹은 비로자나불의 오른쪽 협시보살로 표현된다.
석굴암 본존불에 대하여도 논란이 있다. 석굴암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라고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통일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다.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다.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에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고 주장함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제자상 때문이다. 10대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불상에만 함께 배치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아미타불상 주변에 배치한다면 굉장히 이상하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학계에서는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칠불암 본존불과 두 협시보살상은 석굴암과 기법과 양식이 많이 닮았다. 시기상으로도 칠불암이 조금 이른 시기로 보고 있기에 같은 팀이 조성했다고 주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삼존불은 석가삼존으로 협시보살은 왼쪽이 문수보살,오른쪽이 보현보살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게 나의 견해다.)
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은 바위 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이 불상군의 성격은 사방석주 각 면에 한 불상씩 사방불을 새기고, 그 앞의 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겨 삼존불이 중앙 본존불적인 성격을 띤 오방불(五方佛)로서의 배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상의 이름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는 동쪽의 상을 약사여래(藥師如來)로 보면 그 반대편 서쪽에 있는 상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칠불암불상군은 양식적으로 보아 719년 명문이 있는 경주 감산사 아미타 및 미륵보살상을 비롯하여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석굴암 불상 등으로 이어지는 8세기 전반기의 조각양식 계열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상으로 추정된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는 바위 뒷면 꼭대기 신선암에 남쪽을 향하여 조성되어 있는 8세기 후반의 마애석불상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산 봉우리 절벽의 바위 면을 얕게 파고, 고부조(高浮彫)로 새긴 것이다.
이 마애보살반가사유상의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이 높이 새겨져있으며, 그 위로는 보계(寶髻)가 솟아 있다. 이러한 머리 형태는 신라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양식이다.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있고, 얼굴은 길며 웃음을 담고 있어 남성적인 인상이 뚜렷하다. 오른손은 꽃을 잡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연화대(蓮花臺)를 밟고서 반가좌(半跏坐)를 하고 있는데 손에 든 꽃 등으로 보아 이 반가사유상이 관세음보살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석조 마애불상은 예배할 수 있을 정도의 약간의 공간만을 남겨두고 바로 아래가 낭떠러지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정상에서 구름무늬 위에 조각되어 있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신비감을 준다. 동쪽으로 돌출된 바위면을 다듬어서 배 머리 모양으로 얕게 감실을 파고 이를 광배 삼아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감실의 높이는 2.3m, 폭은 1.3m이다. 또한 이 반가사유상은 유희좌(遊戲坐)의 자세를 짓고 있는데 현존하는 한국의 고대 석불 가운데 유희좌의 관음상은 이것이 유일한 예이다.
경주 남산의 다른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목조 전실을 만들어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지난 가을 이른 아침과 지난 겨울 한낮에 찍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