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생각하자-
‘좋은 죽음’과 ‘추한 죽음’
나을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중환자실에 들어가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고통이다. 따라서 어떻게 투병을 하는 것이 좋은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길은 무엇인지 깊이 살펴야 한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산소호흡기를 쓰고, 수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최소한의 존엄이 살아있는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 존엄사를 택할 권리가 있고,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 주위를 정리해야 하는데, 병원에서 폐인으로 살다가 대책 없이 죽음을 맞는환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손실이 크고 가족의 고통도 늘어난다. 추한 죽음은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세워놓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에 끌려가기 때문에 온다.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명확한데도 연명치료에 얽매이는 것이 ‘효(孝)’나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죽음을 쫓아버린 서양의술
첨단의 의료기술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쫓아내버렸다. 환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공영양을 공급받고, 산소호흡기, 심폐소생술, 신장투석 등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죽음을 연기한다.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고통에 시달리지만, 가족은 마지막까지 ‘치료’를 해드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로 병원의 상업논리가 들어온다. 가족들이 치료에만 매달리면 삶을 다해가는 이에게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기 어렵고, 그에 따른 비용도 눈덩이처럼 커진다. 불가능한 상황을 두고 삶을 연장하는 과정을 거치면 가족은 큰 경제적 부담을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문에 남은 사람들의 삶이 힘겨워진다. 이는 가는 사람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생명은 소중하고, 의료진과 가족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최선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료진과 가족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말기환자에게도 최선일까? 삶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한 하루도 보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공감해가도록 해야 한다.
조상들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죽으면 ‘좋은 곳’으로 ‘돌아간다’고 여겼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랬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상가에서 흥겨운 굿판을 벌이는 풍습도 있다. 상여소리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들이 나누는 공감의 대화였다. 상을 치르는 과정은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아울러 죽음이라는 벽을 허물고 삶과 죽음이 하나 되게 하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자.
“여든 살 넘어 딱 일주일 아프고 고통 없이 죽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편안하게 죽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어낼 것인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기 때문에 잘 모른다. 죽음의 의미를 배우지도 않았고,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살다보니 죽음을 맞으면 본능이나 관습을 따르게 된다. 상황에 끌려가는 ‘추한 죽음’에 이르러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삶은 선물이고 죽음은 선택’이라는 말처럼 ‘잘 살고’ 싶은 것은 기본 욕망이다. 죽음 또한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것이므로 갑자기 맞닥뜨리는 것보다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놓으면 더 나은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잘 살기 위해서도 꼭 생각을 정리해 놓아야 할 문제이다. 언젠가는 부딪힐 죽음을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고 ‘나에게도 오는 일’로 여겨 생각을 갈무리해 놓고, 좋은 죽음이 오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마음에 그려보아야 한다. 삶을 대하듯 죽음도 들여다보며 생각의 씨앗을 키워가야 한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행복한 마무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
안락사(安樂死)는 회복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멈추는 것이고, 존엄사는 ‘회복할 수 없는 환자’를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존엄사는 곧 자연사이다. 회복이 불가능함에도 갖은 처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재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강제로 이끌어 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임종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는다.
‘행복한 마무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세워 놓고 마음의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주변과 가족에 알리고 그렇게 따라줄 것을 약속해 나가야 한다. 건강할 때 죽음을 생각해보고 마음으로 준비해 놓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늘고 암, 심장질환, 치매 등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 변화에 맞춰 ‘자연스런 임종, 편안한 마지막’을 맞도록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한 주변의 노력도 필요하다.
다른 나라들은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존엄사에 대해 토론하고, 불치병에 걸려 판단을 못할 경우를 대비해 건강할 때 ‘생전유언’을 써두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도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이는 여러 노력을 해야 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유언은 한 개인의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관계되며 깊이 생각해 결정해야 할 문제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나는 행여 내가 의식 작용을 못하게 되는 경우에 약물과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은 하지 않도록 주위에 당부해 놓고 있다. 식물인간이 되어서까지 죽는 기한을 늦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항암요법, 방사선 치료를 거부하고 심신수련을 하며 최선을 다해 투병하다가 ‘품위있게’ 삶을 마감했다.
생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고 ‘죽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아울러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와 가족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줄이고, 마지막 생을 편안하게 맞도록 하기 위해 어떤 사회제도를 갖춰야 할 것인가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죽음에도 표정이 있다’고 한다. 염(殮)을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고 한다. 죽음은 삶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면 삶은 더 풍성해진다. 삶의 마지막 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참고 자료>
1) SBS 주말극 ‘폼나게 살거야’ (2012년 3월 방영)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모성애(이효춘)는 자신이 정신을 잃을 경우 존엄사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며, “세상에 안 죽는 사람 없다. 때가 되면 모두 가는 것, 하늘이 부르면 가는 것이니 애써서 잡지 말라”고 한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자식들한테 짐만 되는 거 싫다. 평생 궁상을 떨고 살았지만 죽을 때만이라도 폼 나게 가야지. 억지로 붙잡지 말고 그냥 나 보내달라”고 한다.
“하루가 될지 열흘이 될지 이제 내 인생 정리해야 한다. 질질 끌지 말고 깨끗하게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며 “느닷없이 죽는 것보다는 내가 낫다. 내 인생 마감도 하고 준비할 시간도 있다”며 웃음을 짓는다.
“엄마 가도 울지 말아라. 이만하면 잘 살고 가는 거다. 내 인생 그래도 남는 게 있더라. 너희들도 있고 너희들 낳고 키운 세월도 고맙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도 다 고맙다. 갈 사람은 다 가는 거다. 그게 세상 이치다”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2)곤도 마코토의 사전의료의향서
●연명 치료는 절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오늘까지 자유롭게 살아왔습니다. 64세까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답게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지금 나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거나 불러도 아주 약하게 반응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자력으로는 호흡도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아도 전혀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급차는 절대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이미 병원에 실려 왔다면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지 마십시오. 연결했다면 떼 주십시오.
●자력으로 먹거나 마실 수 없다면,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지 말아 주십시오.
●수액도, 튜브 영양도, 승압제, 수혈, 인공투석 등도 포함해 연명을 위한 치료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미 하고 있다면 전부 멈춰 주십시오.
●만약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면, 모르핀처럼 통증을 완화시키는 처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연장하고자 전력을 다하고 계시는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나의 바람을 들어 주십시오. 나는 이 문장을 냉정하게 생각한 뒤에 작성했으며, 가족의 동의도 받았습니다.
●연명 치료는 일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을 여기에 맹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