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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붓다의 가르침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하게 변질된 이론 중 하나가
'오온(色受想行識- 몸과 마음작용)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오온은 무상하고, 오온은 괴로움이며, 오온은 자아가 아님을 참답게 알라"는 붓다 핵심 가르침(이를 현재 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삼법인이라 한다)을 자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無我論입니다.
이 무아론으로 인해 불교를 이론적으로만 배우는 일부 사람들은 '자아가 없는데 무슨 윤회가 있으며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 진아나 윤회, 환생 같은 것은 모두 힌두교에서 들어온 변질된 불교 교리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실 공산당이 선전하는 무신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주장은 영혼도 없고 환생도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주장하는 공산당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끌며 邪見業을 짓고 있습니다.
특히 오온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은
사람들이 자아로 착각하고 있는 영원하지 않고 수시로 변하는 후천적인 몸과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인데, 혹자는 오온과 선천적인 불성을 분간하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변치 않는 진여불성 같은 것은 없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과연 그러한지 이에 대해 불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열반경에서는 "본래 자비는 중생들의 佛性이나, 佛性이 번뇌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어서 佛性이 곧 자비이자, 如來임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불성이 번뇌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보적경 가섭품에서는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청정무구하다.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으로서 항상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불교의 최고경전이라 칭하는 반야심경에서는 본성을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 표현하며 후천적으로 변치 않음을 설명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道를 얻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고 하셨는데, 아난에게 이르시길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지켜보는 자이다.' 라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희노애락의 감정들을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주시자(주의식)가 진정한 자아임을 일깨워줬습니다.
참나, 불성, 신성, 본성, 자성, 순수의식, 주의식 등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키는 말로, 후천적으로 변하는 것은 몸과 마음(생각과 감정)이지 선천적인 본성이 아닙니다.
만약 본성인 주의식이 생각과 감정, 업에 의해 오염된다면 사람이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본성을 오염시켰기에 그 생각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한번 분노하게 되면 분노의 상태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상은 그렇지가 않고 생각과 감정들은 인연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며 무상하기 때문에 본성은 그것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은 고차원의 극히 미시적인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고, 생각이나 감정은 낮은 차원의 거친 물질이기 때문에, 거친 물질인 분자가 극미립자인 중성미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듯이 생각이나 감정이 본성에 섞여들어갈 수 없고 단지 본성을 뒤덮어 본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텅빈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청정한 하늘을 가리고 있어도 먹구름이 하늘을 오염시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안으로 보이는 이 몸뚱이를 자아로 착각하며 전도몽상 상태로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見性이란 곧 자신의 본성을 보고 진정한 자아를 깨달으란 것입니다.
본성과 관념에 대해 법륜대법 李洪志 대사께서 과학적 이치로 잘 설명해놓으셨으니 邪見들에 현혹되지 마시고 진리에 눈을 뜨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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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佛性)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 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이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사상 중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로 자신의 대뇌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은 당신의 일생을 저애하고 지배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흔히 이기적이고 또 좋지 않기에 사상업력을 생기게 할 수도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또 업력의 통제를 받게 한다.
사람은 主元神(주의식)에 의해 주재(主宰)되어야 하는데, 主元神이 마비되어 관념으로 대체된다면, 그럼 당신은 무조건적으로 투항한 것이 되어, 생명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좌우지된다.
당신 자신은 선천적인 자기 자신으로서 불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물을 인식할 때 흔히 일종 관념이 형성되기 쉬운데, 이런 관념은 자기가 아니다.
그 어떤 관념도 없이 문제를 보면, 모두 자신의 선량한 본성에서 나온 견해가 있고, 진정한 자신의 견해가 있게 되어, 자비롭고 선한(慈善) 마음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당신 자신이 자신을 더욱 드러내 노출할 때일수록 당신의 사상은 더욱 높고, 더욱 진(眞)에 가까우며, 당신의 선천적인 선량한 본성의 경지(境界)를 갖게 된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극미시하에서, 극미시하의 미립자 중에서 사람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다. 사상의 틀을 배제하고 보면 사람의 선량한 성격(脾氣), 천성, 특성,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해 내기가 쉬운데 그것이 진정한 자기이다.
主元神(주의식)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개변될 수 없다. 主元神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主元神의 본질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의 각종 관념, 각종 업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고, 덮이며, 완전히 둘러싸여 본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主元神 자체는 개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업력은 그렇게 미세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업력은 속인 중에서 빚어낸 것으로 속인 중의 물질이다. 이것은 그렇게 미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만들 때의 그것은 극히 미시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섞여 들어갈 수가 없고, 단지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었을 뿐이다.
본성은 사물에 대하여 자체의 견해가 있다. 만약 정말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의 본성적인 견해를 되돌려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온 그곳이다.
초기에 형성된 당신의 관념이 바로 초기에 당신을 만들어낸 곳의 관념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의식관념을 타파하기란 아주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다.
법(法)은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부동하게 체현한다. 이 층차에는 이 층차의 체현이 있다. 당신이 이 한 층차에서 산생된 생명이라면 당신은 이 한 층차 법(法)의 관념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 되돌아 나온다면 당신의 인식표준은 곧 거기에 있게 되는데 그 표준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업력에는 眞 · 善 · 忍의 표준이 없는바, 그것은 그것이 이 관념을 형성할 때의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하며, 사람을 속인들이 말하는 아주 교활하거나 혹은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되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수련할 때 부동(不同)한 사상업력이 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수련을 저애한다.
사람이 만약 업력의 저애가 없다면 수련은 아주 쉬운 것이다. 이 업력은 여러 해 전에 어떤 상태 하에서, 어떤 도덕표준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곧 이런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한다. 만약 이것이 많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의 일생은 모두 그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곧 이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며 곧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은 없다.
그 자신은 완전히 그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선량하지 않은 후천적 관념에 포위되고 가려진다. 그는 진정하게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자신의 표준이 없게 된다.
관념은 대뇌의 사상(思想)속에서 형성되는데, 관념이 만든 사상업은 사람의 머리에서 하나의 업력덩어리를 형성한다. 선념(善念)이라고? 불교에서는 생각만 해도 곧 業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른바 선념이란 더욱 높은 표준에 서서 가늠해 보거나 眞·善·忍이란 더욱 높은 표준으로 보면 역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속인이라면 모두 자신을 찾을 수 없는데, 이 관념은 사람의 일생만 좌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려가며 계속 좌우지한다. 언젠가 변화가 일어나면 그 때서야 제거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줄곧 내려가며 좌우지한다. 이 관념이 더욱더 강대해지면 정말 그 자신은 없어지게 된다.
지금 업이 구르고 구른다고 말하는데, 모두 이러한 정도에까지 굴러왔다. 당신이 그러한 속인을 보라. 온종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부동(不同)한 사람, 부동한 근기, 부동한 오성(悟性)이라고 함은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누가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의 불성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그는 희망이 있다. 누가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후천적인 의식관념에 너무나도 깊이 매몰된 것으로, 희망이 없다.
(출처 ㅡ http://kr.falundafa.org/book/HTML/zfl2.html)
(참고) 진아와 관념의 분리체험기
현장법사와의 만남
2014년 3월 24일
작자: 전목(田木)
【정견망】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시간이 오래되어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마도 내가 大法 수련에 들어와 처음 만난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워낙 신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모든 과정이 역력하다.
어느 날 새벽의 일이다. 나는 일어난 후 또 계속 침대로 돌아가 잠을 자려고 했다. 눕자마자 갑자기 자신(主元神)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누워서 쉬려고 했는데 어째 또 일어났을까, 잠자리로 돌아가야지 하며 몸을 돌리자마자 내가(육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활연히 깨달았다. 이는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주원신이 육신을 나온 상태가 아닌가!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 멀리서 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들어왔다. 찾아온 사람은 좀 야위었는데 오기 전에 웃음소리부터 들렸다.
“허허 천 년만일세. 옛 친구가 운 좋게 대법수련에 들어왔으니 정말 축하할 일이군. 그래서 특별히 찾아온 거요 허허…..”
누구지? 마치 친한 것처럼 보였지만 잠시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성이 진(陳)이고 진현장(陳玄奘 서유기의 모델인 당나라 현장법사)이라 합니다.”
내 머리는 여전히 텅 비었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손님이 왔으니 마음은 매우 유쾌했으며 우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 손님은 앉은 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의 수련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찍이 장안(長安 당나라의 수도)을 나가 서쪽을 향했으며 신강(新疆)을 거치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의 나란타 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삼년간 인도어(천축어)를 배웠고 또 천축 각지를 돌아 다녔다. 수련이 제법 되었다고 느껴 천축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은둔하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당태종의 뜻을 받들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찾아 온 사람은 얼굴이 매우 부드럽고 상화(祥和)했으며 말솜씨가 좋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봄바람을 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마치 아주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눈을 크게 뜨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사상은 그와 함께 기분 좋게 거닐었다.
한참 후 그가 작별하려 했다. 나는 아직 미련이 남아 그더러 좀 더 있으라고 했다. 그는 나의 기대를 보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함께 모인 것은 천년의 연분으로서 정말 기쁘오. 대법 수련은 중생들이 모두 부러워하지만 기회를 얻기 힘드니, 친구는 마땅히 다그쳐 하루 빨리 원만하시오.”
그리고 작별하더니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석별의 정을 거두고 입구에 기대어 작별했다. 한참 후 침대로 돌아와 주의식(주원신)과 육신이 합쳐졌다.
그때 갑자기 육신의 사상, 지식과 예의 규범 등 각종 관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이런 것이 나(주원신)를 잠기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와 동시에 신체가 깨어났다.
신체가 깨어남과 동시에 육신이 쌓아놓은 지식이 반영되어 나왔다. 진현장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현장법사가 아닌가? 속성이 진이고 법호는 현장이다.
신체가 깨어나자 사람의 사상도 나왔다. 그러자 발을 구르며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람은 내가 줄곧 숭배해오던 우상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이런 관건 시각에 잊어버렸는가, 진작 알았으면 서명이라도 받아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경험은 자못 다채로웠기 때문에 나는 오랜 기간 이를 음미했다. 나중에 도반들과 이야기 할 때도 상세히 했으며 그들도 듣고 매우 재미있어 했는데 좀 더 많이 이야기 했으면 했다.
여러 해 후 내가 수련과정을 총결하며 이 경력을 되돌아보자 비로소 오성이 충분치 못함을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지혜가 밝지 못했고 이야기 자체의 다채로움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일을 통해 내가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을 홀시했다.
예를 들어 말해보자. 내 주원신이 육체에서 나간 후 그런 선천적인 진아(眞我)의 상태는 매우 순정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는데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약간의 방비도 없이 매우 즐겁게 환영했다.
이는 마치 고대에 초원에서 열정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유목민처럼 생소한 사람이 자기의 장막으로 오는 것을 보고 열렬히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나누는 것과 같다.
의식상 그것은 일종의 무아의 순정함이었다. 이런 순정한 정도의 표준 상태를 알고 난 후 이후 수련 중에 나는 의식적으로 이런 상태의 표준에 도달하려고 했다.
또 한가지 관건적인 것은 그 과정 중에 온 사람이 스스로 말을 했음에도 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어려서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유명한 진현장이 서역으로 가서 경을 취한 경력은 더욱 귀에 닳도록 익숙한데도 그런 상태 중에서는 뇌리에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층차가 도달하지 못하여 지혜가 아직 열리지 않았고 주원신은 사람의 지식이 쌓인 특출한 상태가 없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나의 주원신이 육신으로 돌아와서 직접 내 눈으로 육신상의 각종 사상과 관념이 조수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매 한 사상이 마치 한가닥 선과 같았다.
무수한 사상 관념이 무수한 선을 형성하였으며 이런 선은 함께 열을 지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는데 마치 조수처럼 세차게 나의 의식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매우 똑똑하게 그중 한갈래 구체적인 선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사상관념의 구체적인 내용이며 바로 《서유기》 에서 현장법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상관념이 널리 퍼져 들어올 때 나의 육신 대뇌는 살아난 것처럼 즉시 진현장의 일체 지식을 반영되어 나왔다.
아, 그것은 지식으로 모든 관념이 사라진 후 일체를 똑똑히 알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순정함이 아니었다. 매 한갈래 사상관념은 형태가 있는 영체의 존재였다. 다만 나의 이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 선의 상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선천의 순진한 진아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매 한갈래의 관념은 모두 “무게(重量)”가 있었다 (더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함께 모여 극히 방대한 무거움을 짐을 형성했으며 생명도 매우 무겁게 변했다.
그것은 ‘무엇이 공능인가’에서 말한 생명이 물질에 대해 짐을 짊어진 그런 상태였다.
이 경험이 내게 매우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선천 진아의 순정한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상관념이 어떠한 지, 내지 수련 중에서 명확한 방향이 있어야 하며 명백하게 가아를 분별하여 수련해야 함을 의식했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많이 수월해졌다.
발표시간: 2013년 12월 7일
법륜대법(파룬궁)은 중국 길림성 출신인 李洪志 대사께서 1992년부터 중국에서 전하기 시작한 심신수련법으로, 몸과 마음의 정화효과가 탁월하여 현재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業이 많아 대부분 몸에 질병이 많기에 몸은 등한시하고 마음만 닦는 방법으론 병든 사람들을 해탈시킬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홍지 사부님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성명쌍수의 大法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전법륜은 법륜대법의 수련서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꼭 알고 싶었던 진리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법륜 책에는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왜 인간으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지, 우주 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특성(우주의식, 우주 정신)은 무엇인지, 영혼의 구성, 업력을 소멸하고 공덕을 쌓는 법, 수련과정 중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과 예방책, 제3의눈(천목), 숙명통, 빙의현상과 방언, 주화입마, 공중부양현상, 몽유병, 자심생마의 실체, 살생과 육식문제, 질병의 원인, 영감, 근기, 청정심 등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겨 있어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수행을 하든 모두 지도적 작용이 있는 책입니다.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후천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여 인식한 정보를 대뇌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고 살면 거짓말에 속아 나중에 낭패를 보는 것처럼 평소 우리가 무엇을 자주 보고 자주 듣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야동을 보면 음욕이 일어나 음욕을 만족시키려 하듯이 나쁜 사람, 부정적인 기운과 좋지 않은 음식을 늘 가까이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물이 들어 몸과 마음이 탁해집니다. 삼겹살 식당에 가면 누린내가 자연히 옷에 스며드는 것처럼 깨닫지 못한 거짓 선지자와 거짓말을 진리로 포장한 글, 좋지 않은 기운이 발산되는 책이나 부정적인 글, 탐욕과 분노와 악행을 일삼는 사람, 술, 담배, 마약, 해로운 가공식품같이 몸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을 가까이 하면 보약 속에 든 비소처럼 자신을 서서히 해롭게 만들 것입니다. 컵 안에 든 흙탕물을 맑게 정화시키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계속 부어서 맑은 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옷이 더러우면 맑은 물에 들어가 씻어야 하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도 청정하게 하려면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탁하고 어두운 에너지를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큰 지혜와 법력과 자비심을 고루 갖춘 대각자의 고차원 에너지가 발산되는 진실한 가르침이나 경전을 자주 보고,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선정과 가급적 유해물질이 없는 순수한 식품을 적당히 먹고, 아울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정화시키는 길입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대각자와 正法을 인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가짐(욕심과 불신여부)과 업력의 크기에 따라 효과 또한 다르므로, 단시간에 효과가 크지 않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꾸준히 보고 정진하는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전법륜 무료보기 => https://www.dafamedia.or.kr/book/HTML/zf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