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樂行品(안락행품) 第十四
2. 수행방법(修行方法)을 해석하다
(5) 마음의 안락행
오늘도 법화경 하권 “마음의 안락행” 이라고 하는 대목을 할 차례인데,
안락한 삶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안락행이라고 하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흘러가는 것이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어떤 물체가 아니잖아요.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이 생활이고 그것이 곧 인생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락한 행이란 안락한 삶이다. 안락한 인생!
여기에 보면 마음의 안락행이라 해서 “마음 쓰는 법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 법화경 경전의 내용으로서는 법화경과 관계 지어서 법화행자로서
또 법화경을 펴는 사람으로서 법화경을 전파하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이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 이것은 법화경과 관계없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가 마음가짐을 가질 때 참으로 안락한 인생이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불교공부를 한다' '성인의 그 가르침을 공부한다' 하는 것도
결국은 성인의 마음 씀씀이를 좀 배워서
우리도 성인과 똑 같이는 못되더라도 거의 비슷하게라도 마음을 쓸 때
행복할 수가 있고 바를 수가 있고 또 그것이 안락할 수가 있고 하는 이것을
사실 궁극적으로 바라고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고
성인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는 성불이니 견성이니 무슨 기도 성취니
온갖 그런 표현들을 하지만,
사실은 성인의 삶을 배워서 내 삶이 되도록 노력하므로 해서
우리의 삶도 성인의 편안함처럼 성인이 누리는 그런 안락한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지요.
① 마음 안락행의 행법
“또 문수사리여,보살마하살이 오는 말법시대에 법이 없어지려 할 적에
대개 말법시대가 오면 말세라고 이렇게 합니다마는
“불법이 없어진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려 하는 사람은
상법시대나 정법시대에야 법을 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대다수 사람들이 성인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법시대가 오면 사람들이 전부 영악해지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내서 큰일을 저지르고,
또 어떤 선한 일을 생각하는 시간도 적고
이익과 자기 손해 이런 것만 계산하는 시간은 많아지고 해서
업이 그 쪽 방향으로 자꾸 가게 되지요.
그래서 세월이 갈수록 성인의 가르침을 많이 알게 되고
그런 정보를 많이 알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얇아지고 생각이 어려워지고
더 영악해지고 더 정직하지 못하고요.
내가 그 전에도 어떤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지만
‘모든 공양을 다 멈추더라도 지금까지 쌓아놓은 이런 경제적인 부를
정직하게만 쓰고 산다면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직하지 못하게 위에서부터 그렇게 하니
그것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삶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 문수사리여,보살마하살이 오는 말법시대에 법이 없어지려 할 적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려 하는 사람은
질투하고 속이려는 마음을 품지 마라.
또 불도를 배우는 이를 업신여기고 꾸짖어서
그의 잘 잘못을 찾아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그렇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법화행자로서의 마음 쓰는 법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할 그럴 일이지요.
만일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로서
성문(聲聞)을 구하는 사람,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
보살(菩薩)의 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의심하고 뉘우치게 하려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도(道)에 나아가기가 매우 멀어서 마침내 갖가지 지혜를 얻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대들은 방일(放逸)한 사람으로서
도에 대하여 게으른 때문이라.'고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러면 공부 좀 못한다고 아예 싹수없다 이런 식으로
남의 희망을 그렇게 꺾어 놓는 이런 식인데,
법화경과 관계없이도 한창 공부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어떤 장례의 희망을 그렇게 없애는 이야기는 금물이지요.
정말 그런 이야기는 어떤 희망을 꺾는 것이니까 일종의 살생 이예요.
뭔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데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성공했다고 한들 사실 그까짓 성공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 예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 예요.
사실은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과정이지 절대 결과가 아닙니다.
어느 만치 성공을 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열심히 희망과 꿈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이 뭐 있습니까?
깨달음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이지 설사 깨달았다 하더라도
삶은 계속 되고 끝난 것이 아니 예요.
참선도 참선 생활이 중요한 것이지
참선을 해서 어떻게 하자고 하는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참선할 뿐이고 기도할 뿐이 예요.
기도해서 어떻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되려고 생각을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大悟至心(대오지심)이 在前道妨(재전도방)” 이라는 문자를 쓰는데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딱 앞에 놓여있어 가지고
올바른 참선 생활이 안 된다 이런 표현인데,
그래요 사실은 그저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의 취향대로 자기 아는 만큼 자기 분야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삶이 중요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표현한대로 꿈을 향해서 열심히 살도록 만들어 줘야지
남의 꿈을 꺾어 놓는 그런 말은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점잖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또 마땅히 모든 법을 희롱거리로 말하여
쟁론하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성인의 가르침을 장난삼아 희롱거리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또 그것을 가지고 다툰다든지 쟁론 하는 그런 일도 안 됩니다.
어느 경전의 이야기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 다툴 것은 없어요.
쟁론 할 것이 없습니다.
다투고 쟁론 하다 보면 결국은 의가 상하게 돼요.
옳다 그르다 하는 것 때문에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 사는 데는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화목이지
이 경전의 말이 옳다 저 경전의 말이 옳다,
어떤 스님의 말씀이 옳다 이것은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토론이 지나쳐서 쟁론이 되고 다툼이 되고 큰 소리가 오고 가고 해서
화목에 조금이라도 험 집이 생기거나 한다면
이것은 크게 앞뒤가 전도되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쟁론하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모든 중생에게 어여삐 여기는 생각을 내고,
여래에게는 인자한 아버지라는 생각을 내고,
모든 보살들에게는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스승이라고 생각 하는 이것은 불교에서는 선지식 이렇게 표현하는데
선지식 하면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지요.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서
수많은 세월과 멀고 먼 그런 길을 행각을 하고
그러면서 53명의 별의별 선지식을 친견하므로 해서
자신이 정말 인간으로서 이르러갈 수 있는데 까지 성숙해 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화엄경에 있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53명의 선지식은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불교인도 있고 비 불교인도 있고 외도도 있고 술 파는 잡부도 있고요.
또 사냥꾼도 있고 무슨 불을 섬기는 외도도 있고
그래서 어떤 불을 섬기는 사람을 만났는데
불 속에 뛰어 들라고 해서 선재동자가 의심을 하게 되지요.
“저 사람을 내가 선지식으로 찾아왔는데 선지식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나를 저렇게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하는가?”
이런 의심까지 일으키게 되는 그런 이야기도 등장하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을 선지식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고
내가 배울 것이 있다라고 무조건 이렇게 일단 접고
사람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는 것.
그리고 자연현상을 또 그런 마음 자세로 대한다고 하는 이것이 참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소나무를 보고는 항상 늘 변함없는 푸르름을 배운다든지
또 대나무를 보고는 곧음을 배운다든지
바위를 보고는 견고함을 배운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옛날 선지식들께서 다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다 선지식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또 선지식이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자연 현상까지도 또 선지식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배울 것이 참 많지요.
매일 매일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고 듣는 사건들도
잘 소화 하면 전부 선지식입니다.
어디 사람만 선지식이겠습니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 선지식이다 하는 그런 자세!
우리 불자들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재동자의 53선지식의 친견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보살들에게는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스승이고 모든 사건이 스승이고
모든 자연 현상이 다 스승이다.”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방의 모든 대보살들에게는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예배하라.
모든 중생에게는 평등하게 법을 말하되
법에 순응하여 많이 말하지도 말고 적게 말하지도 말라.
나는 말을 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대로 소신이 있습니다.
건강도 그렇고 살아보니까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전혀 예측이 없는 것이라서
할 수 있는데 까지 다 퍼 버리고, 돌아오는 그 시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힘닿는데 까지 한다는 그런 소신으로 하고 있지요.
뭐 어쨌거나 그래도 말이 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법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너무 많이 말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것을 적당히 말해야 사실은 좋은 것이고 옳습니다.
자세하게 친절하게 그렇게 한다고 꼭 덕 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안 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지요.
옛날에 말하지 않아서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례들도 조금이지만 있습니다.
법을 일러 주라고 했는데 도대체 일러주지를 않았지요.
나중에 크게 깨닫고는 와서 감사히 인사드리는 것이
“나는 스님에게 다른 것 때문에 이렇게 감사히 인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예들도 과거 선지식들에게는 간혹 있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많이 일러준다고 꼭 덕 되는 것도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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