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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이 글은 다큐멘타리 Earthlings의 관한 것으로 거의 스포일러라고 볼수 있는 글입니다. 보고 싶으신 분은 유툽에서 보시고 읽으시기 바라며, Earthlings의 영상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아주 잔인한 다큐이기 때문에 심장이 약하신 분이나 노약자, 임산부는 보지 마십시요.
어제 밤에 그렇게도 유명하다는 다큐멘타리 Earthlings, 즉, 지구생명체라는 것을 유툽에서 드디어 보았다. 이 다큐는 다들 알다싶이한 인간의 잔인성을 다루는 주제로 우리가 먹는 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그리고 입는 옷 (가죽과 모피)가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인간의 손으로 들어오는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이 것을 봤다고 친구들에게 말을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아니 그런걸 다 알고 먹고 알고 입으면 이 세상 전체 사람들이 전부다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고, 가짜 가죽과 모피를 만들기 위해 쓰이는 대량의 화학물질이 지구를 더 더럽힐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히 맞는 말이다. 힘이 센 강자는 어떻게서든 증가하는 대량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생을 해야 몇 억이라는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다. 다큐멘타리에서는 "무자비"라는 단어를 "살생"이라는 단어 뒤에 거듭 반복을 한다. "무자비."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 "자비"라는 것에 대한 큰 뜻을 아직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자비"라는 말은 안다. "자비롭지 않다"가 아니라 "자비가 없다." 무자비한 살생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동안 그 세글자가 모아져서 한 단어를 만들며 이루어내는 큰 힘을 소름끼치도록 느꼈다. 안락사를 할 약이 없는 곳은 전기로 죽이고. 전기가 없는 곳은 가스로 죽이고. 거의 대부분의 현실인 가스가 없는 곳은 칼로 죽이고, 칼이 없는 곳은 때려 죽이고, 더더욱 심한 것은 때려죽이지 않는 곳은 산채로 고기를 짜내고 불로 굽고 가죽을 벗긴다. 그리고 더한 것은 산채로 당하고도 눈을 깜박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밑의 글은 이 다큐멘타리 Earthlings를 보고나서 쓰는 [시청후감]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역사 내용도 조금 소개를 하며 비교를 해보겠다.
1. 소통
친구들은 나에게 그랬다. 그렇게라도 하니 분명히 사람보다 뇌가 작은 생물들이니 느끼는 것도 적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사람 말을 따르지 않으니 도대체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닥 상황에 닥쳐지고 나서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이 예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노예제도. 노예로 가장 유명한 몇백년전의 미국은 대량의 아프리카인들을 잡아와 팔고 샀다. 아프리카인들은 얼굴이 흰 인간들이 찾아와 모르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고 때리고 죽였다.
노예 잡이를 할때 가장 자주 이용되는 방법은 부족의 공주를 먼저 잡고 그 공주를 구하기 위해 따라오는 전사들을 잡았다. 나머지 힘이 없는 노인들은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로 떨어뜨려서 운송을 한다. 이 것은 일본의 후또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돌고래잡이에서도 볼수 있다. 돌고래는 동족 무리 안에서 다친 한마리를 절대 버리고 가는 법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생물이다. 다치거나 사라지면 여러마리가 몇일을 밤을 새며 먹지도 않고 찾아헤매거나 다친몸을 두마리씩 나누어 운송을 한다. 그것을 이용해 돌고래잡이들은 한꺼번에 여러마리를 잡는다.
노예 잡이가 끝나면 운송이 시작된다. 운송의 첫과정은 일단 배에 옮겨야 한다. 노예들은 살이 검은 탓에 전염병이 돈다는 말이 퍼져있어 대부분 때리거나 아니면 창으로 피가 많이 나지 않는 부분을 찔러 끌어서 배에 태운다. 배에 태우면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장소로 데려가 최대한 구겨서 노예들을 태운다. 숨쉴 구멍조차 나있지 않은 그 장소는 배 밑바닥이며 50% 이상은 미국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열에 의해 죽는다. 인도에서는 가죽을 만들기위해 소들을 강제로 트럭에 태운다. 이 소들은 마음이 착한 농사꾼들에게서 사들인 것으로 판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말만 듣고 판다. 인도의 대부분 지역은 소를 죽이는 것이 불법이다. 합법적인 곳을 옮기기 위해 막대기 끝에 쇠고리가 달린 기구로 가죽이 거의 쓰이지 않는 엉덩이 부분을 찍어 트럭에 태운다. 시골에서만 산 이 소들은 트럭이란 것은 보지도 못했고 봤다고 해도 이런식으로 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트럭에 소들이 서서타면 6마리 남짓할 공간에 산채로 눕혀서 35마리를 태워서 간다. 이렇게 운송되는 소들은 대부분이 서로에 열로 인해 80%가 도살장도 도착하기 전에 죽거나 아니면 트럭에 소음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는다.
노예들의 운송될 당시가 더 심각한 현실이다. 임산부들은 단순히 배가 나왔다는 이유로 태울 공간이 부족해 지니 1~2평 남짓되는 창고 같은 공간에 50~80명을 겹겹히 태워서 간다. 그 중에 당연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종종 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몸이 약하기 때문에 같이 운송하면 전염병이 돌기 쉽상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탯줄을 끊고 바다에 버린다. 정신적 충격에 미친 임산부는 그 자리에서 배로 뛰어들어 아기를 구하러 간다. 노예는 돈이다. 한사람도 버리면 안되기에 그 임산부를 붙들어 갑판에 묵고 기절할때까지 때린다. 우리가 흔히 먹는 돼지들은 워낙에 껍질이 단단하고 질기기 때문에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 들은 자신의 종족이 당할경우 정신적 쇼크를 일어 그 자리에서 굳는 다고 한다. 이것을 이용하여 인간들은 우리안에 여러마리를 잡아 놓고 종족이 죽는 것을 제대로 보게하기 위해 머리를 죽는 그 한마리 쪽으로 묶어 놓는다. 죽이기 힘드니 빨리 죽일수도 없는 돼지들은 대부분 흔히 집에서나 볼수 있는 몽키(나사를 빼는 도구)를 손에 들고 죽을 때까지 머리를 친다. 이러면 보고 있던 돼지들은 몸이 굳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맞아 죽는다.
대화 소통이 안되는 돼지, 소, 돌고래 등 많은 동물들은 노예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노예들은 소통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느꼈을 것인데 동물들이라고 다른 것일까. 그들 역시 지구에 사는 똑같은 지구 생물채들이다.
2. Cannibalism (캐니벌리즘)
Cannibalism은 어떤 동물이든 자신의 종족을 먹는 식을 말한다. 대부분이 아는 식인종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닭이나 돼지 같은 잡식성 동물들은 우리 안에서 캐니벌리즘 행위를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즉, 서로의 눈알 때어 먹고 귀, 꼬리를 물어서 먹는다. 몸에 틈새가 나면 여러마리가 그 틈안에 입을 집어넣고 최대한 많이 갉아 먹는다. 이 것을 읽은 당신은 그야말로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러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조금 역겹지만 사실적 역사를 알려준다.
캐니벌리즘은 영국 학자가 아프리카로 가서 어떤 부족을 보고 만든 단어이다. 이 부족은 사람이 죽으면 손가락을 떼어서 먹거나 살을 잘라 어린아이에게도 먹인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캐니벌리즘의 뒷배경은 이렇다. 이 부족이 사는 곳은 땅밑에 지하수도가 크게 흐른다고 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뭍을 수 있는 장소가 없고 뭍는다면 시체썩은 물이 사람들이 마시는 곳으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부족 사람들은 그런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고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죽은 이의 살을 떼어내어 영원히 몸 속에 기억하기위해 먹는다. 의식이 부족 전체 사람을 통해서 끝나면 시체를 가마에 태워 최대한 멀리 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태운다.
하지만 이 의식은 따져보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해도 논리에 맞춰서 삼은 행동들이다. 우리가 보고 느낀 돼지와 새들의 캐니벌리즘은 사실 우리 인간들도 지독하게 겪은 행위이다. 아메리카라는 땅을 찾은 유럽왕족들은 새로운 개척지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지원자 몇명들을 보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힘이 센 남자들을 더 많이 보냈고 남녀 불균형이 일어난다. 끝은 뻔하다. 아무튼 이렇게 간 지원자들은 도대체 조사하나 시작되지 못한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농사를 하고 낚시를 하는지 알턱이 없었다. 불과 몇주만에 유럽왕족들과 소식기 끊겼다. 왕족은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앞에는 사람들이 죽어 썩어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나는 오두막에 가 보니 남자 세명이서 여자의 유방을 생으로 먹고 있었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의 한 교수가 대학생 천명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알프스 산맥 한가운데 추락했다. 살아남은 것은 당신 뿐이고 주위에는 돌천지이며 그나마 유지가 된 시체가 한 구가 있다. 구조는 일주일 후.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그 시체를 먹을 것인가?" 놀랍게도 76%의 답변이 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토록 인간 역시 위급한 상황에 시달리면 자기 종족을 먹는다. 돼지나 새들은 안 그런가?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하루하루가 죽음과 고통에 시달리며 설 자리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발밑은 철장이고 밑으로 떨어진 배설물들은 몇달간 치우지도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기위해 서로를 먹어야한다. 인간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3. 복수
인간은 복수의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을 해주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했다면 화부터 내고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느낌은 절대 지울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복수심은 인간적인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짐승은 다르다. 자연에서 자란 동물들은 우두머리라는 존재가 서있고 그 우두머리는 절대로 반항을 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몇 천년간 지속된 법칙이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이상 깨진적은 없다.
다큐멘터리에 보면 서커스 동물들을 보여주는데 나는 바로 어떤 내용인지 직감 할수 있었다. 어릴때부터 동물 서커스를 싫어했다. 코끼리가 신기하게 두발로 걷고 물개가 얕은 풀장안으로 불길에 휩쌓인 고리를 향해 다이빙 한다. 잘 생각해보면 말이 안된다. 자연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잘도 해낸다는게 말이 되는가? 어느 물개가 자신이 사는 곳에 불길의 고리가 있는가? 어느 코끼리가 사는 곳에 두발로 서서 걸어야 생존할수 있는가?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이 동물들은 어떻게 이런 것을 잘 해낼수 있는 것인가?
서커스 사육사는 항상 이렇게 말을 한다. "이 아이들은 절대 채벌 교육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구요? 머리가 너무 똑똑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배우고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죠!" 하루아침이라...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돈 없는 서커스단이 시장에 가서 일일이 한마리씩 보고 다들 원하는 제일 똑똑한 것들만 사서 사육을 시키는 것일까? 다큐멘터리에서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는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 동물들은 똑똑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맹수의 왕 사자, 밀림의 왕자 호랑이가 똑똑하고 밥을 잘준다고 해서 시키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이 두려워서 하는 것이었다. 몸집이 몇배나 되는 코끼를 쇠고리 달린 막대기로 찍어 내리며 온갖 욕을 하며 시키자 실제로 한다. 밀림의 왕자 호랑이를 으르릉 거린다고 입을 묶어두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몇차례나 얼굴을 후려 갈긴다. 몇시간을 그러니 실제로 어떤 이나 두려워 하는 호랑이가 얌전히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육은 매일매일 쉬지 않고 7시간씩 한다고 한다. 그들이 갑자기 우리안에서 뛰쳐나와 공연도중 인간을 공격하고 집을 부순다. 자연 속의 원칙이라면 우두머리인 인간을 절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의 너무나도 당연한 법칙을 깨고 복수를 한다. 얼마나 길고 큰 고통을 받아야 법칙이 깨지는 행동을 하게끔 만든 것일까? 상상이 안가는 질문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Shaun Monson은 끝에 이런 메세지를 남겼다. 그리고 가슴 속에 사무칠 정도로 힘이 있는 문장이다.
"가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다. 이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가는 것이 크다면 오는 것도 크고 가는 것이 적다면 오는 것도 적다. 이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가는 것이 있다면 돌아오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죽음을 준다. 그 들이 받는 죽음으로 우리에게 식량과 옷이 온다. 하지만 가는 것이 크다면 오는 것도 크고 가는 것이 적다면 오는 것도 적은 이 자연의 섭리에 가는 것이 죽임이라면 오는 것이 식량과 옷인가? 가는 것이 크다면 오는 것도 크다. 가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다."
나는 질문한다. 우리 인간은 이미 가고 있는 죽음에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몇 십만 마리에게 죽음이 간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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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더불어 살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면 그 부작용은 반드시 온 다는 것.......자연과 사람이, 인간과 동물이 , 선진국과 후진국이, 있는자와 없는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지 않으면 결국은 누구도 생존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너무 먼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평소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도 조금이나마 반성할 시간을 갖게 해 줘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전혀 나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상 조차 시작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 이런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문장에 흐르는 힘이 느껴집니다. 나도 젊었을 때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드네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이 글을 읽고 많이 생각했어요 정말 배가 너무 고퍼면 사람을 먹을 수 있을까? 지금 내 체질로는 못할것 같애요. 모르지 극한 상황을 채험하지 않았으니까 노예들을 데리고 오는 과정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라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저도 역사시간에 노예에 대해 배울때 원래 생각했던것과 너무 달라서 충격을 좀 심하게 먹었습니다 ^^;;;
팔십을 살아온 할머니는 통 무슨말인지? 이해도 안되고 하고싶지도않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하시며 땅에 기고,나는 짐승들을 사람으로하여금 다스리라 하셧거늘 어찌 잔인한 살생으로 우주 생명체의 역사가 엮어지고 있는것일까?
상상이 안된다. 막연히 알고있던것을 내손자의 글을 통해 접하게되니 죄성많은 인간으로써 다시 한번
생각하게되고 참회의 기도가 마음을 채우는구나. 배우며, 생각하며, 커가는 내손자 고맙다.
네 할머니 ^^ 하여간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 처럼 "늘 인간이 문제" 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