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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의 소재지는 본래 경북 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 발생지인 서부동, 동부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이 아니다. 이두초등학교가 있는 28번 도로변에 새로운 면소재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면소재지로 들어와 이두초등학교 바로 뒤에 있는 백학서당부터 본다. 백학서당은 1752년 문을 연 이래 이곳 아이들을 교육해 왔던 '작은 사립학교'이다. 물론 지금은 문을 닫았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인 마당 안에는 은행나무와 측백나무만 쓸쓸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학서당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라졌고
이두초등학교 동쪽으로 내려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나무 앞에는 석불사가 보고 싶으면 북쪽으로 가라는 화살표가 세워져 있다. 화살표를 따라 좁은 길을 들어서면 금세 포장도로와 만난다. 개울과 바짝 붙어 나란히 이어지는 이 길을 3km가량 올라가면 네거리에 닿는다. 이곳이 자락리이다. 왼쪽으로 가면 비안향교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만장사 입구가 나타난다. 그대로 바로 가면 마을을 거쳐 석탑사에 닿는다.
길 왼쪽 마을회관 앞에 '만석재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 만석재는 마을 맞은편의 산을 넘어 만장사로 가는 고개이다. 화장산성까지는 2.1km, 다시 만장사까지 0.8km 거리이다. 화장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가등청정을 물리친 곳이다. 가등청정은 화장산성 아래에서 시간만 끌다가 결국 포기하고 물러갔다.
석불사 올라가는 길은 아주 예스런 길이다. 자락리를 지나면 집 한 채 없고, 작은 연못과 사과밭이 잠깐 모습을 내비친 뒤로는 말 그대로 적막이다. 이정표만 없다면 '과연 이 골짜기 안에 절이 있을까' 의심하면서 누구나 발을 돌리고 말 산길이다.
가파르고 급한 산길로 석불사를 찾아가다
산길은 가파르고 좁다. 이런저런 갖가지 나무들이 방향도 없이 마구 늘어뜨린 가지와 잎새들이 차창을 친다. 게다가 길은 왼쪽으로 굽었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굽고, 오른쪽으로 휘었다가 문득 왼쪽으로 휜다. 저절로 속도는 죽고,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 없지만 '천천히 사는 법'을 몸에 익힌다.
가늘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약 3km, 갑자기 차가 뒤로 눕는 듯한 오르막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왼쪽에는 수풀과 잡목에 가려진 옛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옛길도 포장이 되어 있다. 너무 가팔라 새 길을 낸 것이 이 모양이라면, 저 옛길은 도대체 얼마나 험악할 것인가. 옛길을 차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언덕 아래에서 길은 끝나고,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차를 세우고 위를 올려다보니 석가탑 같은 느낌을 주는 탑 하나가 나무 사이로 숨은 듯 살짝 몸을 드러낸다. '다 왔구나!' 하는 포만감으로 가슴속이 가득 시원해진다. 절들은 본당 앞마당 가운데에 잘 생긴 탑 하나를 마련해두거나(통일신라 이전) 멋진 쌍탑을 건립해두는 것이 보통이니, 탑이 있다는 것은 곧 저곳이 사찰 복판이라는 예고렸다.
하지만 그 예상은 실제와 전혀 다른 엉터리였다. 언덕 위로 오르니 탑뿐이었다. 사찰 건물은 그림자도 없었다. 아직도 저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길만 보였다. 길은, 왼쪽으로는 나무와 풀이 우거진 낭떠러지, 오른쪽으로는 회색과 검은색이 마구 뒤섞인 바위 절벽을 거느리고 있었다.
석불사 탑은 본당 앞마당 복판 아닌 사찰 초입에 서 있고
탑을 뒤로 하고, 예쁘게 다듬어 놓은 길을 천천히 걸어 절 경내로 들어간다. 본격적으로 절벽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황토가 진한 오른쪽 비탈과 그 아래를 따라가며 여러 가지 꽃들로 꾸민 꽃길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길 중간쯤 가면 바위 절벽 끝에 계단이 보이고, 희끗희끗한 출입구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저게 무엇일까. 그제서야 '석불사'라는 절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다.
절이나 산에 있는 불상들은 대부분 석불이다. 돌로 만든 부처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절은 이름 자체를 '석불'사라고 했을까. 어마어마하게 큰 부처를 모시면 '대(大)불'사, 누워 있는 부처이면 '와(臥)불'사, 석불이 셋이 있으면 '삼존(三尊)석불'사 또는 '삼불'사, 무지하게 많으면 '천(千)불'사 또는 '만(萬)불'사…… 식으로 이름을 지어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냥 '석불'사라니 짐작이 되지를 않는다.
궁금증은 길을 지나고 계단을 다 밟은 뒤에야 풀려진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출입문이 바위 절벽 아래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다가, 문 위의 네 글자 '石窟法堂(석굴법당)'을 보고, 다시 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은 덕분이다.
비안면 자락동 석조여래 좌상- 유형문화재 56호
이 불상은 높이 150cm로 '도내기 마을(자락동)'의 해망산 동쪽 중턱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안치되어 있으며 대체로 원형(原形)을 간직하고 있다. 형식은 선이 굵은 나선(螺線)형 머리카락의 머리에 정수리에는 살상투(肉髻)가 있다. 얼굴 부의 훼손으로 상호(相好, 대략 '얼굴'의 뜻)는 불분명하나 대체로 윤곽(輪廓)이 장방(長方)형으로 되어 있다. 귀는 길어서 두툼한 귓불이 어깨에 닿았다. 낮은 장방형의 연화(蓮花)대좌(臺座)에 앉은 이 불상은 머리 상체 하체가 모두 반듯반듯한 네모형으로 시대가 내려가는 면이 보이나, 가슴에 비스듬히 표현된 승각기('속옷'을 말함) 등은 통일신라 시대 불상에 따른 고려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귀중한 예가 되고 있다.
아, 석불사의 '석불'은 '돌로 된 굴 안에 들어 있는 돌로 된 부처'라는 뜻이구나. 석굴(石窟) 안에 들어 있는 석불(石佛)이므로, 경주의 '석굴암'이나 경상북도 군위군의 '삼존석굴'처럼 나타내면 '석굴사'가 될 곳이구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佛'자가 없어져 '부처'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窟'만 남는다. 이 절의 이름을 지은 분은 그렇게 생각을 한 듯하다. 그렇다고 '石窟庵'처럼 '庵'을 넣어 불교를 나타내면 경주의 국보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되어버리니 그럴 수도 없고, 이름을 군위의 국보처럼 지어 '일존석굴'로 하는 것도 이상한 일, 결국 (경주 석굴암의 본래 이름인) '석불사'를 선택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듯하다.
경주 석굴암의 본명을 사찰명으로 채택
이 석불사, 정말 대단한 풍경이다. 누가 이렇게 억지로 수십 m나 되는 바위 절벽을 만들었을 리도 없고, 동굴도 사람의 손으로 직접 팠을 리 없을 터인데, 아득한 옛날 거의 산꼭대기인 이곳에 이런 굴이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발견하였을까! 그리고 동굴 안에다 석불을 애써 만들어 넣고는 빌고 또 빌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석굴법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교실 한 칸 크기쯤 되는 커다란 동굴 광장이다. 그 가운데에서 불상이 답사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해설에는 좌상이라 하여 불상이 앉아 있다고 했는데, 굴에서 나온 뒤에 생각해 보아도 그저 입상(立像)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왜 그랬을까? 천정이 높지 않고, 굴 뒤쪽이 어둡고, 그 결과 불상이 커보였던 것일까.
절까지 올라오는 산길의 자연 그대로의 느낌, 석굴법당의 특이함, 절벽 바위, 풍경의 배경을 이루는 해망산 꼭대기, 내려다보이는 화장산성 방면의 첩첩산중……, 하지만 이 대단한 답사지를 아는 이는 별로 없는 듯했다. 석불사로 오르면서 내려오는 이를 만난 적 없고, 머물 동안도 마주친 사람 없었으며, 내려올 때에도 그저 새소리만 들렸으니까. 그래서 더욱 다시 찾고 싶은 석불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거나, 경관이 뛰어난 곳을 소개하는 일은 답사여행기를 쓰는 즐거움의 하나이다. 석불사, 아름다운 경치와 희귀한 동굴속 부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불상 가는 길을 자랑하는 산속의 '작은' 절이다. 그러나 찾아온 답사자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큰' 절이기도 하다. 조용한 사찰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다. |
덧붙이는 글 | 2012년 5월초에 마지막으로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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