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미륵은 인천부사와 강화유수가 주재하는 지역 향반(鄕班)에 참여해야 했다. 적소로 돌아오자 인천부(府)에서 기별이 와 있었고 이쪽을 책임진 당래가 바다에 나가 있는 관계로 미륵이 참여한 거였다.
그곳에는 두타도 와 있었다. 지역의 양반은 한명도 눈에 보이지 않고 지역의 재물을 가진 자들이나 불법에 기대여 살고있는 문제아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강화 유수를 보더라도 이 모임이 얼마나 급하고 중대한지를 알 것이요. 댁내들의 부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외다."
인천부사 윤상호가 장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순검부윤과 나주 목사를 역임한 노회한 관원이었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재물을 갹출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왕비의 전등사 행차의 절목(節目)이 인천 강화 양부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먼저 강화유수께서 그날의 절목을 말해줄거요. 성유사?"
인천부사가 강화 유수를 지목했다. 강화 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사와 유수는 같은 직급이었으나 고참은 윤상호였다.
"황송하게도 이번 돌아오는 초파일에 왕비 전하께서 전등사에 행차하기로 되어있소. 행차시 이조 예조 내시부 내의원 용호대 등에서 수행하는 3백여 명의 인원의 궁에서부터 돌아가는 8일 동안 모든 경비를 차질 없이 인천 강화 양부가 조달하라는 예조의 절목이오."
"... ...?"
참석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3백 명의 궁인들의 8일간의 모든 소비 비용을 양부에 지운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물론 왕실의 내탕금과 왕비 개인이 내놓는 회양금이 있겠으나 그것은 사찰에 내놓는 촌지에 불과할 것이었다.
"끄응!"
참석자들 중 '끄응'이란 신음이라도 내는 사람은 미륵과 두타 정도였다. 참석자들은 제물포의 객주들과 김포의 세곡상 강화의 인삼포주 그리고 염전상 등 관의 눈치를 절대적으로 봐야 하는 약자들이었다. 그들 속에 미륵 두타 전등사 주지가 끼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없소. 총 경비가 은자 5천냥 정도일듯 하오. 하여 오늘 여러분들이 3천냥을 만들어 내시오?"
그 말을 한사람은 인천부사였다. 은자 3천냥이면 인천부의 한해 소용 경비에 이르는 액수였다.
"검계가 무색하외다. 은자 3천냥이 장난외이까?"
미륵이 정면으로 나섰다.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장난이라니... 무슨 말이 그 모양인가?"
부사와 유수의 말석에 앉아 있던 우수영의 수군 만호가 미륵을 제지했다. 참석자들을 겁박하기 위해서 군인까지 불러다 놓고 있었다.
"어허! 지금 뭐하자는 거외까? 수군 만호 따위가 끼어들어 겁을 주다니...?"
"뭐야? 그 말을 삼가하라?"
만호 정덕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리를 쳤다. 우수영에 부임해 온 지 얼마 안되는 인사였으나성정이 괄괄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정만호 앉아. 그리고 미륵두령도 앉게나. 지금 겁박하고 사정을 할 시간도 없어. 날짜는 내일 모레고 들어가야 할 물자는 태산이라 그말이야. 민관이 따로 없어."
인천부사가 두 사람을 동시에 질책했다. 똥줄이 탈만도 했다.
"소승이 천냥을 내지요. 그럼 윤부사와 성유수는 소승이 이끄는 용화종에 뭘 해주시겠소?"
두타가 호기를 부리며 두 관료를 응시했다. 장내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오, 두타 선사께서 천냥을 내 주시겠다고요? 그럼 우리가 무엇을 도와드리리까? 우리의 권한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려야지요. 들으셨지요 . 성유수?"
인천부사가 강화유수의 동조를 구했다. 3천냥 중 1천냥의 확보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듣다마다요? 말씀만 하시요."
"명년 봄에 김포에서 미륵 화현식을 할까 합니다. 지난번 해주 사건 같은 불미한 일이 안 일어나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두타는 부조를 빌미로 합법적인 포교 활동을 용인받고자 했다. 다수의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하는 군왕과 조정에 반하는 요구였으나 두 관원은 지금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협조를 하다마다요."
"안됩니다. 저자는 부처의 제자가 아니지요. 저런 자의 은자를 얻어 전등사의 회양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전등사의 주지가 반대를 하고 나왔다. 두타의 용화교의 사이비성을 알고 있는 터라 전통 승려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무참했다.
"이런... 주변머리 없는 탱초를 봤나? 그럼 니놈이 천냥을 내 놓거라!"
정만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등사 주지의 머리통을 죄어박으며 윽박질렀다. 상식밖의 행동이었으나 그 장면을 두 관원은 외면을 했다.
그랬다.
불교는 조선 관료와 사대부들의 밥이 된 지 오래였다. 대 불교 정책이 태조와 태종때의 잠시의 숭불 외 거의 전 왕조에 걸쳐 억불로 일관한 탓에 승려는 중인을 거쳐 천민이나 노비의 신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왕비가 찾아오겠다는 사찰의 승려를 마구 대할 정도로 불교는 조선 사회의 변방으로 몰려 있는 것이다.
"두타선사 천냥... 좋소 다음 마선주 얼마를 낼거요?"
인천부사가 신명을 내며 추렴에 열중했다. 군왕이 떨궈 놓은 불가의 덕을 회복하고자 한 왕비 신씨의 소박한 생각이 이렇게 갈취 구조를 만들며 관폐로 변질되고 있었다.
9. 전등사
적소로 돌아온 미륵은 초명을 적소로 불렀다. 비호가 초명을 적소로 데려와 사랑으로 안내한 후 밖으로 나갔다. 무엇인가 불만이 많은 가희를 비호가 제지를 했는지 조용했다.
"찾으셨는지요?"
"관에 갔었다면서요?"
미륵이 초명에게 자리를 내 주며 말했다. 가슴이 뛰었다.
"전등사 법회에 참석하는 주변 관원들과 향반들의 유희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거죠. 음식하며 술하며 여흥을 돋구기 위한 가무 준비 등 말이에요."
"왕비 저하가 그런 것들을 용인한단 말이오?"
"한양에서 왕비 저하를 모시고 오는 관원들을 위한 여흥이지요."
초명이 한 손으로 자신의 쪽 머리를 만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종복이 차를 내왔다.
"드시유. 나의 스승이신 일도 스님이 직접 키운 차인데 향이 일품입니다."
미륵이 초명에게 차를 권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 일인가.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경험도 숱하게 해온 미륵이었지만 한 여자 앞에서 가슴이 이렇게 뛴 적이 있었던가.
"지난번 한양일은 고마웠네요.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초명이 찻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붉은 볼과 빨간 입술이 천상 앵두였다.
"무엇을 제대로 한번 도와 주지도 못하고 인사를 받으니 미안하구료."
"찾으신 연유는 ..."
초명이 찻잔을 내려 놓고 미륵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얼굴이었으나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다.
"제물포 생활을 청산하고 서강으로 돌아옴이 어떻겠소?"
"서강으로요?"
"들었는지 모르나 내가 이번에 서강까지 자리를 넓혔소. 그곳에 기방을 열 터이니 그걸 맡아 해봄이 어떻겠소?"
"저는 앞전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초명이 말하는 앞전이란 선수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해결할 것이오. 당신은 수완을 발휘해서 재물을 모으시오. 결국 초명 당신에겐 재물이 힘 아니겠소?"
미륵의 말은 현실이었다. 초명의 현재는 암흑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몰된 가문에서 기생으로 존재하는 지금은 지옥과 무엇이 다르랴.
"서강으로 돌아가기는..."
"당취는 다시 서강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할거요. 그놈은 지금 산 목숨이 아니지요."
"두령...?"
초명이 미륵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대신 무엇인가 먼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말해보시오?"
"저는 겉모양만 여자이지 실은 여자가 아니지요. 외양은 꽃이여도 내양은 꽃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아무러면 어떻소? 나는 여자이자 꽃으로 당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한 인간으로 당신이 필요하오."
"인간이라 하셨는지요?"
"그렇소. 나는 따뜻한 인간이 그립소. 사람 냄새나는 그런... ..."
미륵은 자신도 모른 채 초명에게 속내를 들어내고 있었다. 은애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나 그녀를 보고 겪었다고 은애를 말하고 사랑을 입에 담을까.
"오포장을 죽여 주실 수 있는지요?"
"... ..?"
"그를 죽여주세요. 그리하면 저는 두령의 접신(接身)이 될랍니다."
초명은 몸을 단정히 하며 말했다. 그녀의 언어는 차갑다 못해 얼음칼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그들 사이에 긴 얘기는 필요치 않은 듯 했다. 가까운 시간에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진 운명임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소원이라면 그리해 주리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필요하오.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오."
"고맙군요. 연유도 묻지 않으시고 한 인간의 명을 거둬 주시겠다니."
초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륵에게 큰 절을 했다. 그것은 부모에게 올리는 문안이자 스승에게 올리는 감사였으며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마음을 여는 통과 의례기도 했다.
"이러시면... ..."
"초명의 마음이지요. 저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은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살아서 두가지 원이 있고 죽어서 한 가지 원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오?"
"살아서 오포장의 죽음을 보는 것. 그리고 하나뿐인 혈육을 찾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리고는 뭐요?"
"천년 후 내세를 만나면 오늘의 이 슬픈 얘기를 세상에 들려주는 원이죠. 노래 한 자락 불러드리지요. 제가 드릴 것은 오직 이 뿐이니."
초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두 눈을 감고 청을 뽑았다. 그 노래는 시경(時經)의 남풍에 나오는 노래
였다.
다북쑥
다북쑥
이제야 왔나요.
변방갔던 낭군님께
옷고름을 풀리다.
중원에 한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가 수자리에 나간 한 남자를 학수고대하는 그리움의 노래였다.
백제의 노래 중 하나인 정읍사가 그랬다. 북관의 기생 홍랑이 한양의 선비 최경창을 그리워 하며 부르던 노래 또한 바로 이 남풍을 은유한 곡들이었다.
"술한잔 주실수 없나요?"
초명이 미륵에게 노래값을 청했다. 노래값이라기보다는 합환주를 요구하는 듯 했다.
9. 전등사
초명은 제물포의 적소로 자리를 옯겼다. 서강으로 올라갈 준비와 함께 왕비의 전등사 행차를 지원하는 일을 도왔다. 미륵은 인천 강화 양 부사의 강권에 못이겨 회양식 행차 비용의 먹매를 모두 부담하기로 약조를 했다. 잔치날 쓰일 모든 음식을 덤터기 쓴 것이다.
거부를 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 일에 명운을 건 두 지역의 유력 관원들의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아에서 형방이 왔습니다."
비호가 형방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미륵은 또 어떤 청을 하러온 형방을 귀찮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오?'
"미륵 두령이 일수라고 순장쟁이를 거두고 있지 않나? "
형방이 미륵에게 하대를 했다. 미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지라 자기깐에는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늙은이가 고태골에 가서야 형방짓을 놓겠시다. 일수를 왜 찾수?"
" 이 사람 말이라도 그리 하지 말게. 전등사 행사날 남일수를 대령하라는 왕비 전하의 명일세."
"뭐요? 남일수를 왕비가 왜 찾는거유?"
" 어허, 사람하고... 왕비 전하가 평소 순장을 좋아한 모양일세. 강화에 오셔서 조선의 국수와 남
일수의 대국을 보시겠다는 게지."
"... ...?"
"지난번 조풍수의 집에서 두었다는 두사람의 순장이 장안의 화제가 된 모양일세. 목숨을 걸고 두었다는 그 대국을 왕비 전하도 들으셨던게지... 준비를 하게. 나는 전했네."
형방이 말을 전하고 자리를 떴다. 예전 같으면 온갖 핑계를 대고 늘어 붙어 잔돈푼을 뜯어갔을
판이었으나 미륵의 변화된 위상 앞에 그는 일찍 자리를 떴다.
"비호, 스님에게 다녀와. 말 들었지?"
"네."
"갈 때 쌀 가마라도 들고 가고. 참, 가희가 안보이네?"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이 그간의 기찰 내용을 보고하는 날이랍니다. 내일 중으로 다시 온다고 하더군요."
" 그래. 안내려 오면 좋겠구만. 다녀와."
미륵이 비호를 보내고 선창(船艙)으로 향했다. 오늘이 선창에 한달에 두번 서는 큰 장이었다.
이날은 동래 왜관에서 온 배와 명나라에서 온 배들까지 있어 날씨만 좋으면 대 장이 선다.
초명은 종도 몇명을 데리고 시장을 보고 있었다. 무려 5백여 명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었다.
"등치가 큰 것들은 여기서 구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육의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시장을 보던 초명이 미륵을 보고 말했다. 왕비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미륵이 생각해도 대충대충 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 안남았으니 서둘러야겠소. 내일 아침 떠나시오. 일을 대충 보았으면 바람이나 좀 쏘
입시다."
'... ...!'
미륵이 초명이 보아놓은 물품들을 종도들에게 적소로 옯겨 놓도록 한 후 초명과 선창 포구로 향했다. 포구에는 수십 척의 어선과 그들 속에 끼어있는 왜선과 중국 상선들이 보였다.
"어머, 무슨 배가 저리 큰지요?"
"나무묘법연화라는 커다란 글씨가 써있는 배가 왜선이고 그 옆의 배가 명나라 상선이오."
"왜국은 배에도 불전을 만들어 모시고 다닌다면서요?"
"그렇소. 저놈들은 노략질을 하면서도 나무묘법을 몸에 입에 달고 다니는 놈들이라우."
사실이 그랬다. 백제에서 불교를 전해 받은 일본은 불교의 신봉으로 나라를 경영하다 이 때 전국이 요동치는 전국시대를 맞아 불교에 더욱 매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법 안에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훗날 조선을 침략한 모든 군대의 막사 안에 법당을 설치하고 모든 군기와 병사들의 옷에나무묘법이란 글씨를 쓰고 다닐 정도였다.
왜군이 조선 백성들을 험하게 다루던 이유가 불법을 억누르던 조선 조정의 탓도 있었다는 연구가 있는 것을 보면 정치의 지난함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들은 무엇을 사러 온거죠?"
"왜국은 쌀이나 백면자를 원하고 명의 상선들은 백능자주 호록주 유청주 비단을 가져와 팔고 금이나 은 그리고 인삼을 구해가죠."
"이익이 굉장하겠네요?"
초명이 왜선과 명나라 상선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며 말했다.
"엄청나지요. 옛날 고려의 개성 상인들은 남만은 물론 멀리 천축의 남쪽에 있다는 인도까지 항해를 했다고 하오."
"남만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데 인도는 ......"
"부처님의 고향이 인도라합니다."
"아, 그곳을 배로도 갈 수가 있나 보지요?"
"그렇다우. 이곳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동쪽을 돌아 남만을 거쳐 가노라면 마침내 닿는 곳이 인도라는 거요. 왜 한번 가고싶소?"
"가고 싶다면 데려다 주실려고요? 아, 70일 정도를 배를 타면 인도에 갈 수 있단 말이죠? 부처님이 사시던 그곳에 말이죠?"
초명이 선창밑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을 보며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씻어주어 더욱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모습 뒤로 잡어를 손질하는 여인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아이들의 밥을 지어 먹여야 하는 조선 여인내들의 고단한 근로가 그 곳에 있었다.
9. 전등사
군왕의 지어미이자 조선 만백성의 어머니인 국모가 도성을 떠났다는 파발이 인천 강화 양부에 도착하면서 인천 김포 화성 해주까지 서해 전역이 난리가 났다.
한양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도로가 긴급 보수되고 강화읍에서 전등사에 이르는 길은 왕비의 여(輿)가 자연스럽게 다을 수 있도록 길이 단장이 되었다.
모든 노역은 인근 백성들이 동원된 것은 물론이었다.
미륵은 전등사에 와 있었다. 생각지 않았던 남일수와 조풍수의 순장이 전등사에서 벌어지는 탓도 있었지만 당일의 음식 조달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 일은 초명이 수십명의 아낙들을 대동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륵은 그 두가지 일 때문에 강화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미륵은 막장대와 용호까지 강화로 불러들여 왕비의 행차를 예의 주시하게 했다.
조선시대 왕비는 왕에 버금가는 절목으로 이조 예조 내수사의 예우를 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왕비의 행차는 군왕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따르는 인원과 경비 등 거의 모든 절차가 하나의 체계로 조절 관리되고 있었다.
"용호대 장군 이장곤이 왕비를 수행하고 온답니다."
막장대가 나름대로 귀동냥을 해온 정보를 미륵에게 말했다.
"이장곤이 직접?"
미륵은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반문했다. 이장곤이 누구인가? 그는 박원종과 더불어 조선의 모든 무장들이 두려워하는 무장 중의 무장이었다.
미륵은 박영문으로부터 이장곤의 인간됨과 용맹함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박원종과 이장곤 두 사람을 끌어안던가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는 힘들다는 것이 박영문의 판단이기도 했다.
"성상의 사냥이 취소된 모양입니다. 사냥 대신 그날 대신들을 모아 놓고 시회(詩會)를 연답니다."
"시회라면..."
" 말이 시를 짓고 풍류를 논하는 자리이지 기생들 모아 놓고 질퍽하게 즐기자는 것이죠. 왕비도 궁을 비웠것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하, 군왕이 언제 그런 거 따지던 사람인가? 차라리 잘 된 기회야. 이번 왕비의 행차를 면밀하게 살펴 어떤 기회가 있겠는지 궁리를 해 보라고..."
"궁리라면... 기습을?"
"쉬익!"
미륵이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막장대와 용호의 주위를 살폈다. 도성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밖에 나온 군왕을 기습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했다.
"이번 행차를 따라오는 용호대는 갑사(甲士) 백여명 안팎인 듯합니다."
"백여명...? 사냥에는 훨신 많은 인원이 따라가지 않는가?"
"몰이꾼만해도 수백명이니까요."
"좋아, 일단 면밀하게 살펴보자고. 인원 호위 대형 갑사들의 군장 등 남김 없이 살펴보면 무엇인가 도움이 될거야. 어서들 가서 일들 봐."
미륵이 두 사람을 옆으로 물리고 앞에 다가오는 인천부사를 맞이했다. 인천부사는 아예 강화에 들어와 죽을 치고 있었다.
"궁에서 궁녀들이 나와 수랏간을 챙겨야겠다는 거야."
"궁에서요? 상궁들이 나온답니까?"
"선발대로 이미 출발했다지 뭔가. 음식을 챙기겠다는 게지. 협조를 해 주게?"
"하다마다요. 그런데 영감, 이장군이 온다면서요?"
"그렇다는군. 절충장군으로 승차했으니 위세가 당당하겠어, 암..."
인천부사가 혀끝을 차며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절충장군은 무반 품계로 정 3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이장곤이 절충장군이 된 것은 몇달전이었다.
미륵은 인천부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뭇머뭇 자신 없는 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일수를 발견했다. 마치 그의 모습이 털 빠진 닭 같았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나?"
"이기지 못할 겁니다."
"뭐야? 이기지를 못해?"
"네."
미륵은 남일수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승부 근성이라면 그 누구보다 강하던 남일수였다.
그런 승부의 화신이 스스로 자멸을 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은가.
9. 전등사
전등사 행사를 간소하고 단촐하게 준비하라는 왕비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행렬은 대단했다.
왕비의 여(輿)를 따르는 관원 궁녀 경호군 외에 경기 관찰사와 인천 강화 해주 관아가 총 출동하여 강화 행궁에서 전등사에 이르는 길이 인간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하군. 생각보다 사람이 엄청나 ..!"
미륵이 행렬의 대오가 내려다 보이는 정족산의 한 능선에 올라 왕비의 행렬을 지켜보며 말했다.
옆에는 막장대와 용호까지 와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왕비의 행차가 저 정도인데 군왕의 그것은 엄청날 겁니다."
막장대가 기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이나 관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강화부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인근 인천 김포의 백성들이 거의 다 나온 모양이었다. 강화 읍성에서 전등사에 이르는 20리 길이 사람으로 아예 줄을 이어놓은 듯 했다.
그것은 결코 관의 동원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왕실과 조정을 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승복하고 따르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용호대와 경기 병마사에서 나온 갑사들은 몇명이나 되나?"
미륵이 갑사(甲士)의 수를 물었다. 갑사는 조선군의 핵심으로 일종의 녹봉을 받으며 군역에 종사하는 정예군을 말한다.
"이장곤이 부리는 용호대 1려와 경병사에서 나온 기마대 1초로 별거 아닙니다."
막장대가 사전에 파악한 정보를 말했다. 조선군은 부. 대. 려. 초라는 편제를 갖고 있었다. 초는 40명의 말단 부대였고 려는 120명의 중간급 편제의 부대로 왕비의 행차에는 용호대와 경병사(경기병마사)의 보마(步馬) 160명이 동원된 셈이었다.
기치창검으로 무장한 잘 훈련된 용호군과 격구와 마술로 조련된 기마군의 조합은 막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저 전력이 별게 아니란 말인가?"
미륵이 싱거운 사람 보았다는 빙그래 웃었다. 막장대가 반어법을 쓴 것이다.
"저 병력이 전부라면 우리 황단만으로도 한번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듣고만 있던 용호가 끼어들었다.
"군왕이 행차하면 저 병력의 3배는 증원될거야 . 병력도 문제이지만 백성들이 더 문제겠군?"
"접전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군대와 백성들이 뒤엉키면 엄청난 소동이 벌어질 텐데... 기습을 하는 편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안됩니다."
용호가 무장 출신답게 분석을 했다. 일거에 군왕을 호위하는 군대를 제압하고 군왕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격 거점에 대한 정확한 확증이 선행되어야 했다. 거사 도중에 제2의 변수가 끼어들면 만사가 흉사(凶事)가 되고만다.
"행차 도중보다 도착했을 때를 노리면 어떨까?"
"백성들은 소개가 되겠지만 군왕을 중심으로 원형진을 2중 3중으로 칠 방어막이 문제죠. 전투력이 가장 극대화될 테니까요."
용호가 땅에 막대기를 꺽어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3려 정도의 방어군을 일시에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우리편 군사들이 많아야 하겠군?"
"그렇죠. 통상 공격군은 방어군의 3배여야 하니까 우리편의 수가 1 대 천오 백은 되어야겠죠."
"쉬운 일이 아니군."
미륵이 용호의 말을 듣고 입맛을 다셨다. 왕비의 전등사 행차에서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령, 이런 거창한 행차가 아닌 미행을 노리면 어떨까요?"
막장대가 산을 내려와 전등사로 길을 잡는 미륵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미행이란 군왕이 측근 몇명을 데리고 도성안이나 도성 밖을 암행 시찰하는 것을 말한다.
"미행을...?"
"그것이 더 간단하고 쉬울듯 하지 않을까요?"
"정보가 문제야."
"박참정이나 신부정 등을 통해 알아내야죠. 방법일 듯 합니다."
"맞아. 막영감 말이 일리가 있어. 미행이라.. 미행을 기습한다...?"
미륵이 산길을 내려 오며 중얼거렸다. 막장대의 의견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더구나 지금의 군왕의 미행은 유명했다. 그는 야밤에도 불쑥 궁을 나와 임사홍의 집을 방문하여 죽지육림을 즐기다돌아가곤 했다.
"두령, 저기....?"
"응?"
미륵은 전등사의 경내로 들어오다 용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경내에 가희가 오포장을 데리고 와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왕비 행렬을 앞질러 온 모양이었다.
"두 사람, 빨리 한양으로 들어가. 저 인간이 여기를 왠일이지?"
막장대와 용호가 몸을 낮추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사 모든 일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오포장이었다. 미륵과 막장대 그리고 용호, 다시말해 황단의 3대 인물이 전등사 왕비의 행차에 와 있는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골머리가 빠개지는 것이다.
"아이고 포장 나리? 여기를 어인 행차입니까?"
"호호, 미륵 두령 오랜만이네요? 지난번 애 많이 썼더라니까요. 우리 영감도 좋아 하더라고요."
오포장이 미륵을 보자 반가워 하며 지난 달에 보내준 뇌물에 대한 공치사를 했다. 여전히 뻔뻔하고 유들거렸다. 미륵은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오포장은 전등사까지 무슨 일로 온 것일까.
9. 전등사
회양식은 장중하고도 거창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왕비가 법당 앞에 만들어 놓은 차일 안의 동편에 앉아 있고 그 뒤에는 북악(北岳)이 그려진 병풍이 둘러 쳐져 있었다.
왕비는 자색의 무늬가 수 놓아진 대자리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상을 받아 놓고 그 앞에서는 왕비의 도해(渡海)를 칭송하고 환영하는 무희들의 춤이 시연되고 있었다.
법당 안에서는 인근 대찰에서 불려온 승려들의 염불이 계속되고 있었다.
왕비의 서쪽 자리, 즉 하석(下席)에는 경기 황해의 불교를 대변하는 전방산 성불사의 대덕이 와 왕비를 친견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왕비를 따라온 이조 예조 내수사의 관원과 인천 강화 해주등의 수령들이 도열하듯 앉아 있었다.
차일 앞에서는 조풍수와 남일수의 순장 대국이 진행되고 있었고 관료들이 왕비에게 올린 꽃이 장식된 상위에는 해삼어음탕, 생전전탕, 전복자지(雌旨) 등의 바닷가 음식과 약과 다식 당과자 등이 올려져 있었다.
왕비가 법당에 들인 것은 향촉을 주지에게 내리고 불전에 3번 합장한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말이 사찰의 행사에 참여한 것이지 왕비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조정의 불교에 대한 태도였다.
왕비가 사찰에 행차를 했다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왕비가 주연이 무르익자 순장을 두고 있는 조풍수를 불렀다. 비대한 몸집의 조풍수가 앞으로 나왔고 남일수는 허리를 굽히고 순장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장이 무엇이더냐?"
왕비의 옥음이 차일 안을 울렸다. 조풍수가 긴장은 했으나 여유롭게 답을 했다.
"순장은 혼일강역입니다."
"혼일강역(混日降域)? 오, 천지자연의 재연이라 이런 말이더냐?"
"순장은 판을 놓아 대지가 됩니다. 대지 위에 수많은 우물과 전답을 만들어 인간의 생도지망을 도모하옵고 그 대지 위에 음양의 흑백이 교차하며 시간을 이어갑니다. 대지 위에 시간이 있어 사계절이 생겼고 흑백의 쟁투가 있어 역사를 만들어 오늘이 있고 또 내일이 기약됩니다."
"오라, 비록 니가 역관이지만 과연 조선의 국수로다. 순장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네 삶이라 그 말이렸다. 과연 그곳에 목숨을 걸만 하도다. 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거라. 왜들 음식을 보고만 있는 게냐. 들자, 자 수저들을 들라."
왕비가 수저를 들것을 지시했다. 산더미 같은 음식을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수저를 들고 합창을 했다.
" 황감하여이다!"
복명복창이었다. 조선의 왕비는 곧 군왕의 분신이자 또 다른 한쪽이었다.
"들게."
"그러죠."
미륵은 이장곤과 오포장과 합석을 하고 있었다. 오포장이 주선한 자리였다. 이장곤은 한 부대의 대장답게 자세가 반듯하기 그지없었다.
"장군, 미륵 두령은 사내입니다. 호호, 한입으로 두 말을 할 인사는 아니죠. 그리고 제가 쭉 지켜보
며 느낀 게 있습니다."
오포장이 해물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오포장도 이장곤에게만은 절절 매는 것 같았다. 직급으로 따져도 이장곤은 정3품 절충장군이었다. 문관이라면 포도대장을 맡을 수 있는 직급이었다.
"그래, 박대감댁을 출입해 보니 분위기가 어떻던가?"
"어떤...?"
"호호, 반란의 조짐이 있던가 그 말씀이죠. 기탄 없이 말해보세요?"
"억!"
미륵은 입에 떠 넣은 국물을 뱉어냈다. 오포장의 말이 기겁을 하기에 충분했다. 오포장은 반란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것도 군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근위 대장 앞이었다.
"놀랄 것 없네. 오포장의 말이 맞을거야. 근자에 박대감의 집을 무상으로 출입하는 무장들 하나 같이 문제가 있는 자들이야. 박영문 신윤무 홍영무 거기다 장정까지 합세를 했어. 모두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장곤이 별스럽지 않다는 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미륵의 잔에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 ...!"
담대한 자였다. 군왕의 근위대장으로 국체에 반한 대화를 하면서 저토록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이 미륵은 믿기지 않았다. 과연 명불허전... 이장곤이었다.
" 저도 어울리기는 했지만 반역이라고 하기에는..."
미륵이 짐짓 여유를 부리며 답변을 했다. 다음에 있을 유도 신문을 염두에 두고 머리속을 정리했다. 그러나 오포장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호호, 미륵 두령,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장군과 나는 저들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국체 사건으로 뭉뚱그려 처리할 생각이니까요. 반역을 꾸몄다면 금상첨화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엮을거
니까요."
"... ...?''
"호호, 아직도 감이 안오나요?"
"그건 모함 아니오? 그런 수를 쓴다면...?"
"호호, 지랄하지 마시고... 어떡할 건가요? 저들 편에 서 어육이 될건가요. 아님 발고자가 되어 검계의 패자뿐만 아니라 군문에 들어가 장군이 되어 떵떵거리고 살아 볼 건가요?"
오포장이 미륵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 소리는 악마의 소리였다. 소름이 돋았다. 미륵은 스스로 무너지는 자신을 느꼈다.
10. 푸른 환생
피어나라 꽃
아침 햇쌀에 몽울진 너.
소영이는 갔어도 날은 밝았다. 가여운 한 소녀의 삶이 한 권의 작은 노트에 편린을 남겨놓고 반추하는 인생의 눈물샘을 자극해도 새날의 아침은 어김없이 밝고 또 밝았다.
"또 아침이구나 ."
노경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래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낮에도 커튼을 치고 집안에서만 두문불출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 아브."
다래가 작은 그릇에 보리차를 가득 따라 밥을 말아먹으며 노경위를 바라 보았다.
하루에 한끼 정도 식사를 했을까 .
노경위는 등짝을 치는 듯한 소영이를 의식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래와 같이 보리차에 밥을 한술 말아 입에 떠 넣었다.
보리차가 시원했다. 물속에 엉킨 밥알이 채 씹히지도 않은채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많이 먹어 "
"아브 "
노경위가 다래의 수저 위에 양념을 한 깻잎을 찢어 올려주며 말했다.
다래는 소영이와는 입맛이 조금 달랐다. 소시지나 튀김류를 좋아하는 소영이와의 달리 다래는 깻잎이나 무우말랭이 등 장아치류를 좋아했다.
눈물이 났다. 노경위는 수저를 놓고 창가로 문을 열고 담배를 피어 물었다.
밥을 먹고 있는 다래의 뒤편으로 열려있는 소영이의 방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소영이가 나와 자신이 들고있는 담배를 빼앗을 것만 같았다.
노경위가 식탁의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래가 밥을 다 먹었는지 수저와 밥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텔리비전을 켜고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
려 바둑프로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바라보았다.
ㅡ아버지를 닮은 탓인가.
노경위는 독백을 하며 얼마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남일수를 생각했다.
남일수는 그야 말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문없는 문을 넘어 금 없는 금 앞에 서 있는 꼴이였다.
가) 남일수는 누구인가
나) 그는 왜 홍익동에서 칼을 맞고 죽었을까?
다) 칼에 써있던 미륵이란 이니셜은 무슨뜻일까
라) 다래는 남일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남일수 사건의 대강이 정리는 되었으나 살인 용의자를 노출 시킬 단서는 아직도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서에서 얻은 휴가는 보름이었다. 자신의 연가 8일에 애경사를 당했을때 주어지는 7일을 포함해 경무과에서 처리해 주는 기간이었다.
"때가 온거야. 이제 경찰을 관두자.. 관두는거야 "
노경위는 사직을 생각했다. 달리 미련이 있을 턱도 없었다. 소영의 죽음이 준 여파는 아니었다. 노경위는 이미 사표를 낸 적이 한번 있었다. 그것은 한 사건을 잘못 처리한 과실에 대한 절망 때문 이었다.
한 강도 사건이 있었다. 노경위는 용의자를 잡아 피해자와 대질을 시켰다. 사건 자체를 한사코 부인하는 용의자를 사건 당사자이자 목격자는 맞는 것 같다는 진술을 했고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채증되지 않았다. 노경위는 끝내 구속 송치했다.
그러나 일년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진범이 잡혔다. 그때 노경위는 용의자의 진술에 자신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았던 과실을 깨달았다. 용의자의 진술에 열려 있는 마음이 있을 때 사건은 수사형사에게 개안(開眼_을 준다는 것을 그때 알았었다.
다행히 강도 혐의를 벗은 용의자는 제 3의 범행이 구속 집행 중에 채증되어 노경위의 곤란함은 벗어났으나 그렇다해도 노경위 자신의 과실이 다 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래야 우리 바람을 쐬러 나갈까 ? "
노경위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다래가 텔리비전을 끄고 자신의 겉옷을 들고 나왔다.
"이런, 다래옷을 따뜻한 것으로 사야겠구나..."
"아브 아브."
노경위가 얇은 다래의 가을 옷을 보고 말을 하자 다래가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나가자, 백화점에 들려 옷도 사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노경위는 다래를 데리고 시내로 나와 백화점과 미장원에 들러 아파트로 돌아오다 일성암을 얘기 했다.
"다래야 우리 니가 살던 일성암에 갈까?"
"아브! 아브!"
다래가 자신과 남일수가 살던 일성암을 가자는 소리에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혹시 그곳에 가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가.
"불쌍한 것...."
노경위는 차안에서 다래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다래의 볼이 따뜻했다. 이때에 다래라도 있었기에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차를 몰고 한강으로 돌진할 일 아닌가.
"말이 나왔으니 오늘 당장 내려가자꾸나."
노경위는 아파트로 와 이것저것을 챙겨 언양으로 차를 몰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곳에 도착하면
새벽일 터였다.
달리는 차창에 눈발이 쏟아졌다. 소영이의 영혼이 흩어지던 강화 바다의 그 눈발이었다.
노경위는 차를 몰며 이유 없이 울고 싶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차의 구동이 빙막 위를 스치고 앞차의 미세 전조등이 아득한 현기증을 일으켰다.
아, 과연 일성암은 서울 생활의 가늠이며 또 다른 날의 시작일까.
10. 푸른 환생
다시 날이 밝고 있었다.
태양은 멀리 동해에서 떠올라 백두대간의 등뼈를 타고 올라 운문산 자락에 은둔하듯 숨어 있는 일성암의 동창(東窓)을 비추며 창문을 흔들어 잠을 깨우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군... 다래야!"
노경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옆에 잠들어 있던 다래를 찾았다. 그러나 다래의 이부자리는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다래는 방에 없었다.
"응...?"
노경위는 밖으로 나가 다래를 찾았다. 그러나 다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래야, 아니 얘가 어디를 간거야?"
노경위는 정신이 번쩍났다. 산중 암자였다. 차길이 닿는 곳에서 거의 한 시간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산중에서 열살 먹은 아이가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응?"
노경위는 법당쪽으로 가다 깜짝 놀랐다. 다래가 법당 안을 정신 없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빗자루와 물동이 거기다 걸레까지 갖다놓은 대대적인 청소였다. 법당 안은 오래 비워둔 탓인지 먼지가 자욱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것은 향촉에 향이 피어 있었다. 다래가 향을 피워 놓은 것이었다.
나는 말한바가 없었지.
내가 무엇을 말했던가.
<춘다 품>
남일수가 꺼놓은 향을 다래가 다시 이어놓은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동방을 향해 향촉을 쉬지 말라던 붓다의 능력인가.
노경위는 다래를 놔두고 실내로 들어와 방안을 정리하고 밥을 지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탓에 불편함은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일성암에 들어올 때 각오한 것이었다.
암자안에는 쌀과 조 팥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찬장 안에는 검은 콩 녹두 깨 등 산골에서 나는 것들이 크고 작은 용기에 가득했다. 남일수의 꼼꼼한 성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를 닮아 다래도 어린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나름의 생활력이 있었다.
자신의 집에 온 것이 힘이 된 것일까. 다래는 법당 청소를 다 끝내고 와 노경위가 차려 놓은 밥상을 보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밥냄새가 하얀 김과 함께 피어 올랐고 다래는 입맛을 다셨다. 노경위도 오래간만에 밥을 포식을 했다.
"더 먹을래?"
"아브"
"그래, 그만 먹자. 설겆이 하고 우리 마을에 가 뭣좀 사오자. 부탄 까스 하고 다래 먹을 과자도 좀 사고?"
"으브."
운문산에 눈이 와 있었다. 그러나 땅에 눈이 쌓인 정도는 아니었으나 먼 산의 등선 위에는 하얀 양털을 씌워 놓은 듯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저 눈은 자리를 잡고 버팅기고 있으리라.
노경위는 다래를 따뜻하게 옷을 입히고 손을 잡고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슈퍼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다래를 알아본 주인 여자는 불쌍하다는 표시를 늘어 놓았다.
"아이고 종내기... 저를 어찌하나..."
"다래야 가자. 많이 파세요."
노경위는 주책방정을 떠는 여자를 피해 다래의 한 손을 끌고 산길을 재촉했다. 노경위의 승용차는 동리 한 모퉁이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다래야 이거 하나 먹어."
노경위가 비닐 봉지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다래에게 주었다. 다래가 그것을 반갑게 받았다.
"다래 학교 갈 생각 없니?"
노경위가 산길을 오르며 다래에게 물었다. 다래는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남일수는 그것까지는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 학교 가기 싫어?"
다래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것은 싫다는 표시였다.
"그래... 그건 좀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꾸나. 다래야 옛날 얘기 하나 해주련?"
"아브 아브."
노경위가 화제를 돌렸다. 다래는 그림책이나 바둑 프로를 보는 것이 취미였다. 소영이가 있을 때는 다래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가 밤늦도록 들렸었다.
"아..."
눈물이 났다. 아 다시 또 흘릴 눈물이 있었던가. 노경위는 시큰거리는 콧등을 만지며 초등학교 때선생님께 들었던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를 다래에게 들려 주었다.
"옛날 어느 호수가에 오리 가족이 있었단다. 어느날 어미 오리가 새끼 오리들을 많이 부화를 했었지..."
안데르센 동화의 미운 오리새끼는 다래에게 즉각 반응을 주었다. 다래는 미운 오리새끼였다.
"아브 ! 아브!"
다래는 그것을 직관의 힘으로 알고 있었다. 다래는 직관으로 노경위의 얘기를 해석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의미가 있는 백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누가 가르켜 주어서 되는 것이던가.
인간은 주어진 마음의 공간 안에서 스스로 깨닫고 인식할 뿐이다.
10. 푸른 환생
밤이었다.
산중의 그림자가 암자밑으로 내려와 하루 잠 잘 자리를 마련 할 때면 산새들도 분주하게 일성암의 처마를 찾아 하루를 접고 있었다.
달이 떴다. 첫눈이 오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마른 장작이 암자에 많이 준비된 탓에 산중 생활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노경위는 방에 장작을 지피고 잠이 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콩기름을 먹인 장판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조선 여자가 꿈에 나타났다.
ㅡ당신은...?
ㅡ만월입니다. 월하산보를 아시는지요?
ㅡ월하산보라 하셨나요?
ㅡ그렇지요. 달빛 아래는 고요하다. 호호!
ㅡ ... ...?
노경위는 잠에서 깨어 머리맡에 떠다 놓았던 물 주전자를 들고 벌꺽벌꺽 마셨다.
벽시계가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래는 밖에 나갔는지 없었다. 또 법당을 간 것일까.
"으음!"
노경위는 헛기침을 한번 한 후 밖으로 나왔다.
과연 달빛이 교태로웠다. 달빛을 완상하며 산보를 하고 있는 화투패의 한장이 생각났다.
운문산의 두터운 등짝을 타고 만월이 휘엉청 떠올라 있었다.
쟁반같은 보름달이라더니 일성암 위에 떠있는 보름달이 커다란 쟁반 자체였다.
법당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법당안에서는 작은 염불송(誦)이 들려왔다. 낭낭한 목청이었다.
ㅡ여시아문 마하 바라밀...
그것은 금강경의 독송이었다. 노경위는 법당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 사람은 없었다. 그 소리는 작은 녹음기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녹음기 뒤에 커다란 건전지가 고무줄로 동여 매어 있었다. 남일수의 작품인 듯했다.
다래가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알뜰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놀랍고 한편으로는 대견한 일이었다.
녹음기 안에서 금강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일수가 녹음을 한 것이었다. 다래는 그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서 이별을 한 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것인가.
ㅡ관세음보살이 걸어간 그 길을 따라 5음이 공한 이치를 깨닫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중부감의 반야를 통하여 6근 6경 6식과 4제 12연 6 바라밀의 도리를 깨쳐 모든 보살도의 전도망상을 없애고 마침내 열반을 얻듯이 크고 신비롭고 밝은 반야를 통하여 3보리를 얻도록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도 걸림 없이 굴리고 또 굴리옵나니...
어려운 말이었다. 세상 인연을 만나 시절의 공간에 놓여 고집멸도와 인과응보와 생자필멸과 인생무상과 제행무상을 통해 살고 사랑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생로(生路)의 여정을 아프게 노래하는 불가의 위로였지만 노경위는 그 위로가 너무 크고 벅차기만 했다.
"얘가 어디로 간거야... ?"
노경위는 이제껏 잘 가지 않던 암자 뒷편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바위를 돌아 모퉁이를 돌면 작은 습지가 있었다. 산의 높은 능선이지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모이는 곳은 있기에 암자 뒤의 습지는 연잎과 물풀로 지저분하게 덮혀 있었다.
"응..?"
노경위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다래가 달빛이 내려 쪼이는 습지 옆를 뛰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달빛은 조명처럼 습지를 내려 비추고 연잎 울창한 습지 주변을 뛰어 노는 아이의 모습이 동화책의 한 장면이었다.
"까르르 까르르."
퐁당! 퐁당!
그곳에서 뛰고 있는 것은 다래 혼자가 아니었다. 습지 안에 물살이 일며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뛰어 올랐다가 자맥질을 쳤다. 은빛 비늘이 달빛을 반사했다. 눈이 부셨다.
"아!"
물속을 차고 용솟음치는 역린의 비늘을 번쩍이는 것은 놀랍게도 거대한 가물치였다.
"까르르 까르르."
퐁당! 퐁당!
영물이었다. 저런 영물이 산중 습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노경위는 믿기지 않았다.
다래가 습지에 무엇인가를 던져 주면 그 영물은 그것을 받아 먹느라 비상하는 듯했다. 다래가 던져 주는 것은 저녁에 먹다 남은 찬밥이었다.
말없는 꽃으로 오셨지요.
오늘도 나는 당신의 노래를
듣네요.
노경위는 소영이의 일기장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소영이 죽기 며칠 전에 쓴 시였다. 소영은 다래를 말 못하는 꽃으로 알고 있었다. 말못하는 꽃이지만 소영은 그 꽃에서 소리를 듣는 듯했다.
"까르르 까르르..."
다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다래가 무슨 말을 하기에 저 말 못하는 물속의 영물도 그 소리를 알아듣고 응답을 하는 것일까. 노경위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
언제나 마음의 문이 귀가 열려 그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10. 푸른 환생
다래는 참으로 이상한 아이였다. 말을 못한다는 것 외엔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던 노경위는 일성암에서의 다래의 생활을 보고 한마디로 혀를 내둘렀다.
다래는 일성암에서 만큼은 절대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다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암자 구석구석을 다니며 청소하고 무엇인가를 정리하며 법당 안의 향불을 꺼놓는 경우가 없었다.
예불이나 염불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으나 그 생활 자세는 온전한 보살도 자체였다.
"다래야, 밥먹고 읍내엘 다녀올까? 부탄가스며 밑반찬이며 살게 많네..."
"... ..."
다래가 호응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혼자 암자에 남아 있겠다는 뜻이었다.
"알았다. 얼릉 다녀올께."
" 빠바 !"
암자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는 다래였다. 암자가 다래에게는 편안함을 주는 모양이었다.
다래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이라는 소리일 터였다. '빠바'란 노경위가 다래에게서 들어보는 두 번째 소리였다.
노경위는 다래를 산에 남겨놓고 산길을 내려왔다. 겨울이 분명함에도 아직 추위는 없었다. 길위에는 쌓인 눈도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무과장과 차형사였다.
"아니, 과장님...?"
"이 사람아, 죽은 사람 만난 것보다 더 반갑네. 핸드폰은 받아야 할거 아냐?"
"전기가 안들어 와 밧데리를 충전을 못시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웬일이십니까?"
"위까지 안올라가 다행이네. 어디를 가려고?"
"언양읍에 뭣좀 사려고요. 차형사 오래간만이야."
노경위가 차형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은 방향을 틀어 산밑으로 향했다.
"내려가면서 잠깐 얘기좀 하세. 여길 찾느라 언양서에 전화까지 했었네. 자 이거..."
경무과장이 노경위가 등기로 우송했던 사직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서장님의 전갈을 간단하게 전할께. 사표 수리는 안된다는 말씀일쎄. 대신 두달 동안 휴직 처리를 해 놓을 테니 돌아와서 하던 사건을 매듭지라는 말씀도 하셨네. 맡았던 사건을 미궁에 빠트리고 가는 책임 없는 사람이 되면 쓰겠냐는 것이지."
"과장님!"
" 알아, 말해 무엇하겠나? 서장님도 자네의 처지를 보고 받고 할 말을 잃으시더군. 허나 인재를 아끼는 지휘관을 생각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오게. 성질이 괴팍해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서장님 아닌가."
경무과장이 노경위의 처진 어깨를 다독거렸다. 정년을 1년 남겨 놓고 있는 고참 과장이었다.
노경위는 언양읍에서 두 사람을 대접해 보내고 생필품을 구해 암자로 향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나고 있었다. 짧은 겨울 낮인지라 벌써 길위가 어둑어둑했다.
"이런 ! 시간이 너무 늦었군."
노경위는 다래가 걱정이 되었다. 전기도 없는 산중이었다. 그 산중 암자에 열 살 먹은 다래가 노경위를 기다리며 무서움에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바싹바싹 탔다.
하늘에 구름이 끼얹는지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별빛도 마찬가지였다.
부엉!
부우엉 !
청승한 부엉이 소리가 들렸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았던 새의 울음이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면 산중에도 깊은 겨울이 찾아 오리라.
"다래야 조금만 기다려."
노경위가 숨을 헐떡 거리며 산길을 올랐다.
푸두득.
멀리 암자가 보이는 순간 길가 숲에서 거대한 새가 날아 올랐다. 노경위의 기척에 놀랐는지 산새의 울음이 소름이 돋았다.
"엉?"
암자 안도 칠흑처럼 어두웠다. 다래가 불을 켜지 않고 있었다. 방안에도 다래가 없었다. 법당 안에 있을까.
" 끼악!"
가늘고 긴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다래의 목소리였다.
"이년...이 요물...?''
" ... ...?'
법당 앞에 하얀 소복을 입은 어떤 노파가 서서 다래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고 다래가 그에 맞서 악을 쓰고 있었다.
'이런...!'
노경위가 순식간에 노파에게 달려가 앞을 가로 막았다. 섬찟한 노파였다. 노파의 두 눈에서 푸른 인광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