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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역사소설 ‘한복 입은 남자’, ‘제명공주’를 펴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린 이상훈 작가가 최근 ‘김의나라’를 출간했다. 역사소설 3부 완성작인 ‘김의나라’는 신라가 망하기 시점을 시작으로 우리가 역사시간에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의 미스터리한 역사의 발자취를 파고든다.
▲ 이상훈 작가 .>> 사진 박홍기 기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만일 우리가 해방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남았다면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신라를 강제 합병한 고려는 마의태자를 중심으로 한 신라부흥운동을 역사의 기록에서 완전히 없애버렸다. 고려 입장에서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마의태자의 모습을 나약하게 그리며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풀과 들 꿀을 먹고 살았다’고 적었다.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에 대한 기록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러나 글자는 조작할 수 있어도 역사적 흔적은 조작할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작가의 궁금증이 진실에게 묻다
청나라는 왜 신라를 생각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로 황족의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했을까?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한반도 남쪽의 나라 신라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작가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역사 속의 진실은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어요. 기록된 역사를 한 번 뒤집어 보고 싶었죠. 역사가들은 실존하는 고증자료만으로 글을 쓴다면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 저는 거기에다 상상력을 담아 낼 수 있잖아요.”
이상훈 작가는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늘 짓누르고 있는 그 무엇을 따라 전국을 누비고 해외를 오가며 역사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고증자료를 찾아 발로 뛰고 또 뛰었다. 경남 밀양 출생인 이상훈 작가는 KBS 공채 14기 PD로 입사해 많은 히트 프로그램과 SBS 개국 멤버로 다수의 예능프로그램, 시트콤을 기획하고 연출했다. 또 영화 ‘돈텔파파’, ‘마파도2’, 뮤지컬 ‘문나이트’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아 마이다스 손의 명성을 영화계와 뮤지컬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후 ‘유머로 시작하라’ 등 다수의 책을 통해 작가로의 외도를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역사소설 ‘한복 입은 남자’는 노비의 신분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아 종3품까지 올랐던 장영실의 역사적 공백을 팩션의 형식을 빌려 완성됐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 ‘제명공주’는 백제를 살리기 위해 나라의 온 운명을 걸었던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천황의 자리에 오른 여인, 제명 천왕의 미스터리를, 세 번째 역사소설 ‘김의 나라’는 신라의 서라벌과 화랑을 호령하던 마지막 태자 김일이 고려에 끝까지 맞서며 투쟁했던 모습을 시작으로 대제국을 건설해 나가는 내용이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 그는 누구인가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로 이름은 김일이다. 소설 ‘김의 나라’에서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은 고려에 쉽게 굴복했던 아버지 경순왕과 달리 신라의 부흥을 주도하며 강원도 인제에서 힘을 키워 나간다. 한계산성까지 쌓으면서 세력을 다졌지만 결국 고려의 군사력에 의해 고립되고 만다. 이 책에서 김일 일행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고려 왕건의 맏딸인 낙랑공주의 헌신으로 북방의 땅으로 이주하기에 이르고, 마의태자 김일과 낙랑공주의 아들 함보가 성장한다. 이후 한보는 아버지인 마의태자의 소원대로 복간수(지금의 하얼빈)를 중심으로 여진족과 합심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다. 그것이 훗날 금나라를 이루는 시초가 되며 ‘김의 나라’ 출발점이다.
신라의 붕괴, 그리고 마의태자 선택
제56대 경순왕시기 신라는 힘이 많이 약해져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고려가 생겨나면서 힘이 빠진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왕실의 타락과 부도덕은 쟁점에 달해 백성들의 민심은 분노로 가득했다. 고려의 왕건은 삼국통일을 위해 한쪽은 치고 한쪽은 달래는 전략으로 신라 경순왕의 마음을 얻고 옥좨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썼다. 왕건이 신라의 정통성을 얻으려면 신라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는 거였다.
“왕건은 자신의 사랑하는 맏딸 낙랑공주와 신라의 마의태자를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낙랑공주는 마의태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죠. 그러나 마의태자는 나라를 잃은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며 거절해요. 나라조정은 하루 빨리 고려에 투항하자고 압박지만 신라를 지키겠다는 마의태자의 결심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결국 왕건은 마의태자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경순왕은 전쟁 없이 평화를 이어갈 수 있게 됐는데 내 아들을 죽인다면 민심이 들끓게 될 것이라며 국경 밖으로 태자를 보내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나라를 떠나게 된 마의태자는 강원도 인제에서 힘을 키우며 세력을 다지지만 고려의 군사력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서 작가의 스토리는 이어진다.
“마의태자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길림으로 가게 됩니다. 중국의 길림은 마의태자가 지은 이름으로 원래는 계림(신라)입니다. 계림을 중국말로 읽으면 찌린이 돼요. 이와 같은 사실을 금나라 역사책 금사(金史)에는 신라의 왕족이 발해가 멸망한 20년 후에 발해 유민들이 거기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나라 가문에서도 마의태자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비밀로 유지됐어요. 황실이 신라의 후손이라고 하게 되면 중국이 추진 중인 동북공정을 역행했기 때문이죠.”
▲ 강원도 인제군 마의태자 유적비
영화 ‘마지막 황제’...그리고 애신각라
비운의 황제 푸이의 자전적 영화인 ‘마지막 황제’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재판을 받는다. 판사는 그를 석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신 쥐러 푸이는 10년 형을 마치고 완전히 교화되어 석방한다.” 아이신쥐에러 푸이를 한자로 하면 애신각라 부의이다. 아이신쥐에러는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하는 이름인데 한어로 바꾸면 김이 된다.
“청나라 황제의 성이 애신각라라니? 청나라와 신라는 어떤 관계지? 도저히 연결이 안 됐어요.”
작가는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 중국을 수도 없이 다녔다. 그리고 베이징 왕푸징에서 청나라 건륭황제 7대손을 만났다.
“김씨 성을 가진 분이었죠. 여진족 후예들이 세운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는 60여 년 동안 재위했던 사람입니다. 티베트아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하며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였어요.”
이 책에서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죽기 전 김일을 불러 장롱 속에 깊이 숨겨 뒀던 금궤를 꺼내 건네면서 마의태자에게 말한다. ‘이천년을 이어온 소중한 김씨 가문의 상징인 금인이다. 우리 조상은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제국의 황제였다.’
“마의태자 김일은 더 넓은 북방의 땅으로 건너가 발해를 일구고, 우리 조상과 후예들을 만나고 여진족과 합심해 새로운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발판을 다지게 됩니다. 이게 팩트예요.”
흉노족들은 아틸라 왕이 통치하던 450년경 최대제국을 건설하지만 453년 아틸라가 사망하게 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당시 훈족은 남러시아 평원에서 모습을 보이다 발칸반도와 중부 유럽에서 정착해 각각 국가를 건설한 불가르족과 마자르(헝가리)족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흉노 후손들이 유럽에 만든 국가가 지금의 헝가리입니다. 헝가리는 흉노의 유럽식 표현인 훈족의 나라라는 의미에요. 지금도 헝가리에는 흉노족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도 우랄·알타이어인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고, 생활 풍습에서도 몽골,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아요.”
이 작가는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중국 북방의 실크로드를 이룩한 대제국은 훈제국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세계역사를 바꾼 민족은 중화민족이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조상을 버리고 중화민족을 숭상한 것은 조선시대였다면서, 당시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부르짓고 중국에 종속되기를 바라는 성리학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고 했다.
▲ 한계산성, 마의태자가 조성한 인제군의 설악산 산성
덕주사 마애여래입상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나
이 책에서 작가는 덕주공주가 마의태자를 따라가는 과정도 이끌어 낸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착하고 심성이 곧은 덕주공주는 오빠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힘든 길에 동행한다. 제천 월악산 부근에 다다랐을 때 덕주공주의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마의태자는 산속의 절에 공주의 거처를 마련하고 떠나게 된다. 오빠가 마의태자가 떠나는 모습을 한 없이 지켜보던 공주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상을 발견한 스님은 후에 덕주공주가 서 있던 자리에 불상을 세우고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라 이름 지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덕주사를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누이 덕주공주(德周公主)가 건립한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순왕과 낙랑공주 결혼
경순왕은 아주 유약했다. 그런 왕이 어떻게 아들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을까? 작가는 마의태자와 낙랑공주의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러브라인도 그려낸다.
“경순왕과 낙랑공주가 눈을 속이기 위해서 결혼했다고 봐요. 낙랑공주는 정말로 마의태자를 사랑했어요. 고려 공신들은 서로 낙랑공주와 혼인하려 했습니다. 경순왕은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낙랑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는 겁니다. 나라의 운명으로 너무 힘들어 하던 마의태자는 술에 취해서 낙랑공주의 사랑을 거절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그 아들이 김한보입니다.”
낙랑공주는 마의태자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왕건과 마의태자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왕건이 죽고 난 후 낙랑공주와 마의태자가 만주에서 아들 한보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도 그려낸다.
최초의 김씨 성 ‘투후’ 김일제
한나라 유방은 훈제국과 전쟁에서 패한 후에 엄청난 수모를 겪고 훈제국에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약까지 맺는다. 한나라 무제는 아버지 유방의 치욕을 씻고자 훈제국을 정벌하게 된다. 흉노의 휴저왕이 전사하자 김일제와 동생 김륜은 한나라의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다.
“김일제의 나이가 겨우 열네 살이었어요. 우연히 한무제의 눈에 띈 김일제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암살시도를 막는 공로로 투후(秺後)로 임명되면서 김씨 성까지 하사받게 됩니다. 최초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김일제인 것이죠. 김일제의 후손들은 한무제에게 충성해서 세력을 키우고 흉노를 멸망시킨 한나라에게 복수를 하고 난 후 신나라를 건설합니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김일제의 후손 김망입니다.”
작가는 후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나라가 흉노에게 멸망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김망을 왕망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고 역사왜곡을 지적했다.
신라 최초의 왕...그리고 왜곡된 역사
성한왕 알지의 6대손 미추가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 되나 대를 잊지 못하고 동생 말구의 아들이 17대 내물마립간(신라의 제17대(재위:356~402)왕이 되어 대를 이어 30대 문무왕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이 책의 내용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히 일치함을 강조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도 신라 김씨의 계보와 역사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고,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 선생도 같은 주장을 했어요. 계림의 금 궤짝에서 등장한 신라의 김씨 시조 김알지가 투후 김일제의 후손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재위 661~681)에는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 라는 구절이 있다.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묘명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것을 비문과 기록으로 자랑스럽게 남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손인 김부식과 그 후손들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어 버렸다는 것.
“김부식은 철저한 유학자였어요. 그가 삼국사기를 집필할 무렵, 송나라는 흉노족 후손인 오랑캐 금나라에 쫓겨나서 남송의 시대를 열고 있었는데,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자신의 뿌리가 흉노에서 왔다는 것이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이름(김알지)으로 둔갑시키고 신비롭게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포장하게 되죠.”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경순왕 무덤
금(金)씨를 김씨로...
신라가 망하고 80년 후에 금나라가 생긴다. 금나라를 세운 완인 아골타는 김한보의 6대손이자 김핵리발의 둘째 아들로 1068년에 아시아 기슭에서 태어났다. 여진 이름인 아골다와 부족 이름인 완안을 성으로 해서 여진어로는 완인아골타라고 불렀다. 신라로부터 내려오는 이름은 김민이다. 투후 김일제에서 김망(왕망)를 거쳐 문무왕. 경순왕(김부). 김일(마의태자), 김한보로 이어진 마의태자의 가계도는 청나라 마지막황제 애신각라 부의로 이어진다. 김씨 성은 원래 금씨로 신라 고려시대까지 썼다. 그러다 조선에 와서 금씨로 성이 바뀐다. 음양오해설에 의해 쇠금(金)을 김으로 발음하게 했던 것인데, 이씨 나라인 조선에서 이(李)씨의 나무목을 금이 누른다는 이유로 금(金)을 김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세권의 역사소설...그리고 닮은 점
세권의 역사소설은 구성이 비슷하다. 현재의 시각에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작가는 고증자료를 통해서 깊숙이 파헤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신라가 멸망하고 210년이 지난 1145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그리고 훨씬 뒤인 1281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왜곡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는 책 속에서 역사적인 사실과 책을 읽는 독자들의 흥미를 더하기 위한 상상력을 불어 넣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어 내기 위해 어떤 부분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작가는 “어떤 게 사실이고 어떤 게 팩트인지 헷갈리게 써 놨다”며 웃었다. 우리가 배운 역사가 사실인지 궁금하다는 독자들의 궁금증은 자료를 찾아 제시하며 사실적으로 풀어냈다. 작가는 이 책이 사실을 근거로 써졌음을 증명하기 위해 문장마다 주석을 달았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보다는 해온 일들 중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후배들의 조언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요즘 방송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요즘 방송을 보면 ‘사람 사는 냄새가 담긴 따뜻한 프로그램’을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만들어 볼까 해요.”
시청률의 황제로 한국 방송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항상 새로운 기획과 아이디어로 대중의 시선을 끌어 잡은 그가 이번에는 어떤 작품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지 기대된다.
MeCONOMY magazine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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