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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李䎘)
[생졸년]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 향년 62세
[문과] 효종(孝宗) 6년(1655) 을미(乙未)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3위(05/07)
[진사]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19위(49/100)
조선후기 대사간,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이지신(李之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할(李劼)이다. 아버지는 참의 이유겸(李有謙)이며, 어머니는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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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우의정 부군 묘표(祖考右議政府君墓表)
이씨(李氏)는 고려조에서는 시중 삼주백(三州伯) 공정(公靖)이 무략(武略)으로 현달하였다. 삼주는 우봉(牛峰)의 옛 이름이다. 삼주백의 후손은 500년 동안 대체로 학문과 행실로 가업을 이었다. 본조에서는 관찰사 길배(吉培), 판서 승건(承健), 사의 심(諶), 부제학 지신(之信)이 현달하였다.
부제학공의 손자 참의 휘 유겸(有謙)은 학문을 쌓고 덕을 베풀어 깊이 뿌리내리고 무성하게 열매가 맺혀 다섯 아들이 모두 이름난 사람이 되었다. 맏아들 핵(翮)과 둘째 아들 흡(翖)은 효로, 셋째 아들 상(翔)은 유술(儒術)로, 막내아들 익(翊)은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넷째 아들은 우리 조부 의정 부군이다.
부군은 우리 숙종(肅宗)을 보필하여 충정과 큰 절개가 있었으니 이에 우리 이씨가 성대하게 충효의 집안이 되었다. 부군의 휘는 숙(䎘)이고 자는 중우(仲羽)이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처사 홍유(弘裕)의 딸이다. 부군은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 3월 3일 임진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에 참의공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이마를 다친 적이 있는데 의원이 찌르고 갈라 피가 철철 흘러도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았다. 정축년(丁丑年,1637, 인조 15)에 온 집안이 강화도에서 난리를 만나 부군은 오랑캐 땅으로 끌려갔는데, 오랑캐 주인 노파가 귀인이라고 하면서 잘 대우하였다.
오랑캐 아이가 부군의 이름을 묻자, 부군이 “나는 대야(大爺)이다.”라고 하였다. 따르던 오랑캐 아이가 항상 “대야, 대야”라고 불렀다. 묵묵히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산천을 살피면서 오랑캐의 말을 빼앗아 돌아오려 생각했는데, 마침 우리나라 사신이 이르자 스스로 주선하여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이전에 참의공이 헤어지며 말하기를,
“어찌 오랑캐 땅에서 늙어 죽을 아이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돌아왔을 때 중형(仲兄)은 효를 다하여 죽었고, 백형(伯兄)은 거의 죽다가 살아났고, 참의공과 윤 부인은 무탈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648, 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655, 효종 6), 문과에 급제하였다. 시강원 설서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 대교, 봉교가 되었고,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 낭관이 되었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는데, 궁노(宮奴) 가운데 게 어장을 불법 점유하여 백성의 이익을 침탈한 자가 있어 부군이 형틀에 채우고 곤장을 쳤다. 이에 성상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는데, 삼사(三司)에서 교대로 간쟁하여 곧바로 명이 거두어졌다. 동춘(同春 송준길) 선생이 아뢰기를,
“아무개는 명망이 중하니 훗날 큰 쓰임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군이 끝내 인피하여 떠나니 백성이 비석을 세워 그리워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상소를 올려 검약을 숭상하고 정사에 힘쓰며 현자를 초빙하고 학문을 강구하는 등의 여러 일을 진술하였다. 당시 법령이 해이해진 터라 부군이 옛 제도를 거듭 엄격히 시행하고, 또 계당(雞堂)과 국사당(國師堂) 등 여러 음사(淫祠)를 불태우니 도성 안이 숙연해졌다. 얼마 뒤에 체차되자, 사간원에서 차자를 올려 부군이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임인년(壬寅年,1662, 현종 3), 호남 감진 어사(湖南監賑御史)가 되었다. 옥당이조록(玉堂吏曹錄)에 선발되어 여러 차례 수찬과 교리가 되었다. 간혹 아우 판서공과 서로 대직(對直)하는 일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계묘년(癸卯年,1663),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옛 관직으로 돌아왔다.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고 응교로 전직되었다. 중간에 성균관 사예와 사성, 사복시 정,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었다.
정미년(丁未年,1667),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청나라에서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 있어 정승 허적(許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성상에게 허물을 돌려 벌금을 물게 되었다. 부군이 분연히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으로 맞서야 한다.”
하며, 양사(兩司)를 선도하여 사신의 죄를 논하고, 또 조사할 때 책임지려 하지 않은 대신의 잘못을 나열하여 세 정승의 파직을 청하였다.
이에 성상이 진노하여 모두 극변(極邊)으로 유배하여 부군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니, 세상에서 이들을 칠간(七諫)이라 일컫는다. 얼마 뒤에 풀려나 돌아왔다. 한 해가 지나 서용되어 문신선전관, 부교리, 보덕에 제수되었다.
기유년(己酉年,1669),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발탁되었다가 곧바로 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 당시 토지를 구획하는 정사가 있었는데 부군이 잘 끝맺었으며, 부역을 줄이고 백성을 후대하는 정책에 힘썼다. 성상이 온천에 행차했을 때 부군이 인대(引對)하여 백성의 사정을 진달하였으며, 원통한 옥사를 다스리고 뛰어난 행실을 지닌 이를 정려(旌閭)하였다. 이듬해에 작은 잘못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어 승정원 승지,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신해년(辛亥年,1671),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큰 기근이 든 해라서 부군은 정성을 다해 구휼하여 침식도 잊었으며 간혹 필마로 다니며 위로하고 안정시키니, 한 도의 백성이 모두 이에 힘입어 살아났다. 체차되어 돌아올 때에는 늙은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길을 메우고 전송하여 떠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영남 사람들은 거의 집집마다 밥 먹을 때면 그 은혜에 감축한다고 한다.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부군이 한두 관리의 간사한 행위를 규탄하자, 성상께서 다른 당을 공격한다고 꾸짖고 또 조정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른다고 의심하므로 부군이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이후 성상께서 다른 일로 부군에게 노여움을 옮겨 원찬(遠竄)을 명했다가 얼마 뒤에 삭출시키라고 다시 명하였다. 당시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이 총애 받았는데, 부군이 일찍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일을 역사에 정직하게 기록한 일 때문에 간사한 말이 성상에게 들어갔다고 한다.
부군은 물러나 전리(田里)에서 지내면서 농사짓고 오이 심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정자 이름을 일휴정(逸休亭)이라고 지었으니 이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형제의 고사에서 취한 것이다. 영남 감영의 환곡(還穀) 문제로 법망에 얽혀 양근(楊根)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풀려났다.
무오년(戊午年,1678, 숙종 4),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원정(李元禎)이 이조 판서로 휴가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인동부를 지났는데 부군이 홀로 예우하지 않았다. 이에 이원정이 화를 내며 돌아가 즉시 성상께 부군을 헐뜯었다. 부군이 체포되어 이원정의 교만 방자한 행동과 법을 어긴 정상을 나열하자, 이원정은 파직되고 부군도 끝내 죄에 걸려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이듬해 중형(仲兄) 대헌공(大憲公, 이상(李翔)과 아우 판서공(判書公, 이익(李翊)과 함께 우암(尤菴 송시열) 선생의 당적(黨籍)에 올라 부군은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0월에 크게 우레가 치자 성상께서 놀라 사면하니, 흉당들이 일제히 저지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경신년(庚申年,1680), 이남(李柟) 등이 모반을 일으켜 죽음을 당하자 조정이 맑아졌다. 부군은 길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발탁되었다. 몇 개월 지나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다시 강화 유수에 잉임되었다.
겨울에 형조 판서에 발탁되었다. 이후 여러 부서를 두루 역임하여 이조 판서를 네 번 맡았고, 병조 판서를 두 번 맡았고,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한 번씩 맡았다. 중간에 의정부 참찬,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는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냈으며 대사헌에 오른 것이 아홉 번이었다.
계해년(癸亥年,1683), 시약(侍藥)한 공로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부군은 관직을 맡아 분명하게 법을 지켰기에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 이조와 병조에 있을 때에는 공도(公道)를 넓히고 적체된 이들을 진작시켰으며, 역적 종실 이항(李杭)이 중비(中批)로 관직에 제수되자 부군이 명을 반려하고 간쟁하였다.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늘 일에 따라 바로잡았다. 한번은 경연에서 종실의 영재를 선발하고 종학(宗學)을 세워 가르치기를 청하였다. 당시 성상에게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기에 부군은 종사(宗社)를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정묘년(丁卯年,1687), 7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가장 먼저 언로를 열고 관방(官方)을 신중히 하기를 아뢰었으며, 성상께서 영릉(寧陵)에 행차할 때에는 흉년으로 인해 차자를 올려 아뢰었다. 몇 달 지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부군은 권세를 다투는 풍조를 힘써 억제하였고 변경하는 것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으며 충심으로 군덕(君德)과 사론(士論)을 중시하였다.
비록 미처 크게 시행하지는 못했지만, 논하는 자들이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고 평하였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성상께서 보낸 내의(內醫)가 길에 이어졌다. 입으로 불러 유표(遺表)를 지어 궁금(宮禁)을 엄하게 단속하고 사정(私情)이 통하는 길을 막으며 보고 듣는 것을 공평히 하고 원로를 등용하기를 청하였다.
무진년(戊辰年,1688), 5월 2일에 도성 서쪽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7월 3일에 용인현(龍仁縣) 동쪽의 한천(寒泉) 축좌(丑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정경부인 나주 박씨(羅州朴氏)를 합장하였다. 부인의 부친은 첨중추부사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된 호(濠)이고, 조부는 관찰사 동열(東說)이다. 엄숙하고 정숙하며 올바르고 차분하여 친척들이 그 덕을 칭송하였다. 부군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8세였다.
장남 만창(晩昌)은 진사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나의 선친이다. 차남 만성(晩成)은 판서를 지냈고, 삼남 만견(晩堅)은 대사간을 지냈고, 딸은 판서 홍수헌(洪受瀗)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 경주 박씨(慶州朴氏)는 세영(世英)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인 오이주(吳履周)에게 출가하였다.
판서의 아들 구(絿)는 정랑을 지냈는데 효성으로 정려되고 증직되었다. 대사간의 아들은 수(綬)와 유(維)이고, 사위 홍 판서의 아들은 목사 우제(禹濟), 사평 우해(禹諧), 좌랑 우집(禹集)이다. 나의 아들은 제원(濟遠)이다. 부군은 깊은 사랑으로 부모를 섬겨 평생토록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참의공이 일찍이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있었는데, 부군이 이때 이웃 고을에 우거하며 늘 물고기와 오이를 올리니, 참의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관향(官享)을 어찌 이와 바꿀 수 있겠는가.”
하였다.
끝까지 봉록으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항상 통한으로 여겨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뺨에 눈물이 흘렀다. 부군은 형제들과 우애로웠고 종당(宗黨)들과 돈독하였다. 가난한 종가(宗家)의 제사를 도와 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규문 안은 화기가 넘쳐흘렀다.
늘 자제들을 경계하기를,
“충후근신(忠厚謹愼)이 우리 집안의 가법이다.”
하였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겸손하였고 봉록이 많아도 사치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으면 반드시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 털끝만큼도 남에게 구함이 없었으나 또한 청렴하다는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과 교유할 적에는 진실하고 속임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지친과 사이가 좋지 못하자 부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깨워주었으니 감화된 자가 여러 명이었다.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기에 죽어야 마땅한 자라도 반드시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전후로 원통함을 풀어주고 기근에 진휼하여 목숨을 살린 자들이 매우 많았고, 아래로 곤충이나 초목 같은 미물도 차마 해치지 못했다. 그러나 음양과 선악의 구분에는 매우 엄격히 처신하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도 빼앗을 수 없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잊지 않았으며 항상 말씀하기를, “국은을 어찌 보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말을 배울 때부터 이 말을 배워서 외웠다. 병석에 누운 몇 달 동안 사적인 일은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부군이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군의 반쯤 쓴 유고(遺稿)의 충정이 시초점과 거북점처럼 징험되었다고 하였다.
간사한 사람들이 또 종학(宗學)의 일로 화를 엮고자 했으나 성상의 총명한 덕에 힘입어 다행히 그 계책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부군의 무릎에 앉아있던 어린아이로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니, 지금 상상해보건대, 단지 그 덕스러운 모습이 봄볕처럼 충만했던 것만 생각날 뿐이다.
지금 부군의 뜻과 사업을 추술(追述)하고 싶어도 그 만분의 일도 드러낼 길이 없기에 단지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빛나는 부군의 순수한 충정과 질박한 품행을 기록하여 묘도(墓道)에 세우니, 훗날 군자들이 혹여 참고할 데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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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조고 …… 묘표 :
이 글은 이숙(李䎘, 1626~1688)의 묘표이다. 이숙의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이다.
[주02] 옥당이조록(玉堂吏曹錄) :
이조록(吏曹錄), 이조홍문록(吏曹弘文錄)이라고 하는데,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할 때의 두 번째 단계이다. 처음 홍문관 부제학 등
이 새로 선발할 홍문관 교리, 수찬 등을 의논하여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하여 이조에 넘기면 본관록에 선발된 후보를 이조에서 다시
검증하는 것이 이조록이다.
[주03] 청나라에서 …… 되었다 :
1665년(현종 5)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안추원(安秋元)이란 자가 탈출하여 돌아왔는데 비국에서 이를 청나
라에 보고하지 않고 감춘 일이 있었고, 1666년에는 최선일(崔善一)이란 자가 염초를 몰래 매입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사신이 들어왔는데 안추원의 일을 특별히 더 문제 삼아 조선의 대신들을 사율(死律)로 다스릴 것을
요구했으나 현종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감형을 요청하였다. 허적이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진주사로 파견되었는데 청나라에
서는 감죄의 대가로 벌금을 요구하였다.《承政院日記 顯宗 8年 1月 29日》《顯宗實錄 8年 1月 30日》
[주04] 칠간(七諫) :
본서 제47권〈조고 우의정 부군 가장(祖考右議政府君家狀)〉에는 ‘팔간(八諫)’으로 되어 있다.
[주05] 당시 …… 일 :
본서 제47권〈조고 우의정 부군 가장(祖考右議政府君家狀)〉에 따르면,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여러 차례 연경에 사신가면서 서
쪽 지방 백성에게 원망을 샀는데, 당시 이숙(李䎘)이 사국(史局)에서 직필(直筆)로 “그 사행이 한번 거쳐 가면 두 명의 칙사가 온 것
같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세초(洗草)할 때에 이 말이 새어나가자 이정과 이남이 크게 원한을 품어 해를 끼쳤다고 한다.
[주06] 김안국(金安國) 형제의 고사 :
김안국의 정자 이름이 은일정(恩逸亭)이고, 아우 김정국(金正國)의 정자 이름이 은휴정(恩休亭)이다.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주07] 중비(中批) :
정식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고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주08]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맹분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역사(力士)이고, 하육은 주(周)나라의 역사이다.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다고 하고, 하육은
1000균(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하여 힘이 센 장사를 비유할 때 흔히 쓰인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