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인과 묵객은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며 지은 유산록(遊山錄)을
통해 절경을 노래하기도 하고 구절구절 이야기를 펼쳐 놓기도 했다.
『주왕산유산록』 또한 조선의 이름있는 유자(遊者)들이 주왕산 구석
구석을 누비며 그 아름다운 절경을 묘사하고 그에 따른 감흥을 읊조렸다.
특히, 『주왕산유산록』에는 주왕산에 산재한 사찰, 암자, 봉우리, 누대,
굴, 폭포 등을 중심으로 유산 과정을 펼쳐 놓았기에 가보지 않고도
주왕산이 펼친 절경을 상상할 수 있다. 『주왕산유산록』에 펼쳐 놓은
이야기를 통해 옛 선비들의 주왕산 나들이의 묘미를 되짚어본다.
주왕산의 유래 및 명칭
주왕산은 청송군 부동면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산명(山名)은 석병산
(石屛山), 대둔산(大遯山), 주방산(周房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암석이 병풍처럼 둘렀다 하여 석병(石屛)이라
불렀고, 신라 선덕여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金周元)이 이 산에 와서
은거하였다고 해서 주방산 또는 대둔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에
당나라 사람 주도(周鍍)가 난을 일으킨 후 이 산에 피세하였다가 신라
장수 마일성에게 잡히는데, 그 후 나옹(懶翁)[1320~1376]이 이곳
에서 수도할 때 이 산을 주왕산(周王山)이라 불러 지금까지 주왕산이라
칭한다. 또한 조선팔경(朝鮮八景) 제육위(第六位)에 있으므로
소금강산(小金剛山)이란 명칭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 주왕산을 유람하다
옛 선비들은 세속의 찌든 때를 씻고 호연한 기상을 채우기 위해 팔도의
명산을 주유하기를 하나의 바람[望]으로 삼았다. 청송 치소(治所)의
동남쪽 30리[약 12㎞]쯤에 우뚝하게 높고 큰 산이 있어 ‘주왕산’이라
한다. 큰 바위 봉우리의 오묘하고 신비한 경치가 기이함을 자아내 근처
의 명산이라 일컬어져 선비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장현광(張顯光)을 필두로 하여 많은 시인, 묵객들이 주왕산을 찾아
노닐며 그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으니 이른바 유산록(遊山錄), 유산기
(遊山記)이다. 지금까지 국역된 주왕산 관련 유산록은 모두 35명 36편
이 있다. 이 가운데 주왕산을 명기한 유산록은 28명 29편이며, 『동유록
(東遊錄)』, 『옥계록(玉溪錄)』, 『남유록(南遊錄)』 등과 같이 주왕산이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주왕산을 중심으로 지은 유산록이 7명 7편이 있다.
주왕산 유산록을 지은 저자들은 16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줄곧
이어졌는데, 19세기에 지어진 유산록이 전체 비중의 절반을 차지한다.
특히, 박인조(朴麟祚)[1883~1952]는 『주왕산수록(周王山水錄)』
에서 주왕산을 누비며 감탄하게 되는 절경을 시로 노래하였는데, 그
시수가 63수나 되어 따로 시집을 만들 정도의 분량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짧은 거리를 유람한 인물은 이반(李槃)[1686~1718]
으로 『유주왕산기(遊周王山記)』를 남겼다. 이반의 유산(遊山) 과정을 보면,
눈 쌓인 주왕산의 동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옛 성에 이른다. 다시 성문을
따라 ‘주왕암(周王庵)’을 돌아보고 ‘학소암(鶴巢庵)’ 주변의 절경을 노래한
후 폭포 아래 ‘용추(龍湫)’를 묘사하는 것으로 유산 과정을 맺고 있다.
한편, 가장 긴 유산 과정을 기록한 인물은 신집(申楫)[1580~1639]으로,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에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을 기록해 놓았다. 그의
유산 일정을 보면, ‘삼자현(三者峴) → 마평(馬坪) → 삼위촌(三圍村)
→ 수기암(竪旗巖) → 장군암(將軍巖) → 와룡암(臥龍巖) → 금오택(金鰲澤)
→ 자하성(紫霞城) → 폭포동(瀑布洞) → 비류봉(飛流峯) → 나왕굴
(羅王窟) → 주방사(周房寺) → 옥제루(玉帝樓) → 옥순봉(玉笋峯)
→ 나왕전(羅王殿) → 망학대(望鶴臺) → 지장봉(智藏峯) → 격수암
(激水巖) → 청학동(靑鶴洞) → 청학암(靑鶴庵) → 금탑봉(金塔峯) →
취선대(醉仙臺) → 학소(鶴巢) → 반암(攀巖) →용담(龍潭) → 광혈(廣穴)
→ 사이촌(四耳村)’까지 주왕산 곳곳을 빠지지 않고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