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학생들의 원만한 통학을 위해 학교측에서 스쿨버스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학생들의 장난에 의해 스쿨버스의 바깥쪽 페인트가 벗겨지면서 '**장의사'라는 글씨가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뒤쪽에는 관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공간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학부모들은 학교측에 거세게 항의를 하였고 자녀들의 스쿨버스 통학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얼마 못가서 그 스쿨버스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행복한 장의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미지로 점철되어있는 영화이다. 젊은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한산한 시골의 정경이 그러하고 이제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어진, 만장가득한 장의행렬도 그러하다. 하물며 정겹게 우리곁을 맴돌던, 어디론가 먼저 떠나가버린 이들의 흔적 역시. 유난히도 감독이 느린 템포로 산과 들, 비와 바람, 꽃과 향기 등으로 화면을 가득채웠던 이유도 우리가 미련없이 떠나보낸 것들을 아련하게나마 반추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하려 함이 아니었을까. 삶과 죽음의 아늑한 경계에서.
그 경계 가운데에 '장의사'가 있다. 아침에 장의사 차량을 보면 하루종일 재수가 없게된다는 말처럼 장의사는 우리들의 인식속에서 그다지 유쾌하게 다가오지 못하는 업(業)이다. 구차스런 생을 마치고 구역질 나도록 비비꼬인, 말라비틀린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혀 초상을 치르는 일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은게 사실이다.
죽은 자로 인해 살아가는 장의사에게 그 행복은 모순이다. 장의사는 사람이 많이 죽어야 행복하다. 일반적 통념이 이렇다는 말이다. 때문에 철구로 분한 김창완이 시골학교 운동회날 장의사 홍보전단 뿌리는 행위를 사람들이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도 제목은 <행복한 장의사>이다.
하지만 떠나가야 할 것들은 떠나보내야 한다. 집착하지 않고 떠나보낼 줄 아는, 한가로운 시골의 욕심없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해프닝은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사이에 조금씩 슬픔이 저며온다. 죽은 사람이 떠나고 남은 사람은 다시 이전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모양새가 슬프고 그 구도에 익숙해질 즈음에 장의사라는 직업이, 떠나보내는 일이 행복하다는 제목의 역설이 공감을 자아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장의사란 매개를 가지고 코미디를 끌어낸 기획은 정말 기발하고 산뜻하다. 10년동안 마을에 죽은 사람이 없어 죽음을 기다리고, 이웃의 죽음을 재촉하고, 죽음을 즐거워 하고, 죽음을 먼저 차지하려 다투는 와중에 유발되는 웃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에 대해 멀찌감치 거리를 둔 사람들이 보여주는 뜻밖의 천연덕스러움이 코미디로서 요건을 갖춘 것이다.
중견배우들의 감초같은 희극성은 무겁고 어두운 '죽음'이란 소재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 넘는다. 단순히 감독이 말하는 데로 '웃음을 통해서 본 죽음과 삶의 카타르시스'가 이 영화의 전부일 가능성도 있다. 즉 죽음과 삶의 경계의 긴박감 속에도 가벼운 유머를 덧씌우는 경향은 그 어떤 진지함의 기호에도 매몰되지 않고 순도높은 유머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듯 영화의 출발점은 죽음이지만 감독은 이것을 통해 오히려 삶에 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쾌한 웃음과 가슴 따뜻해지는 눈물로 담아낸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쳤는지 초반에 재치있게 끌고나가던 코미디는 중반 이후 헤매기 시작하다니 느닷없이 어린 소녀 연이의 죽음을 맞는 대목으로 가면서 영화는 맥이 빠져버린다. 혹자의 평처럼 '남 죽기만 기다리는 직업'의 아이러니가 '몸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보내는 직업'의 관조로 바뀌는 과정에 자리잡은 설득력 약한 비약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의사가 죽어라고 하기 싫지만 장례를 몇번 치르며 주인공이 직업의 미덕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대목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자살한 과부는 원귀로 나타나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아버지의 무덤에 가다가 강에 빠져 죽은 절친한 옆집 소녀는 웃으며 다가와 비눗방울을 부는,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마음속에 연정을 품고 있던 대상은 국화 꽃잎이 되어 밤하늘을 가득 뒤덮는다.
영화는 이런 동화적 서정과 시적 판타지를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내며 우리가 그토록 멀리 하고 싶었던 죽음이라는실재가 산 사람과 함께 세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시한부 삶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역설한 것이라면 <행복한 장의사>에서는 죽음과 행복이라는 두 상반된 단어 사이에 '삶'이라는 매개를 끼워넣어 모든 것은 동등한 것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그러나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은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背反性)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
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에서
辛愚
p.s <유령>에서 주방장으로, <행복한 장의사>에서 멍청하고 엉뚱한 구멍가게 아들로 나온 정은표는 장담컨대 분명 뜰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