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차기율 개인展 2007_0912 ▶ 2007_1007●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벨벳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912_수요일_06:00pm 차기율 블로그 blog.daum.net/chakiyoul
갤러리 벨벳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02_736_7023 www.velvet.or.kr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미술판은 설치와 영상이 득세했다. 설치와 영상이 아니면 21세기라는 단어가 가지는 첨단과 현대라는 무늬를 그려내거나 담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다. 이러한 장르만이 동시대성을 담아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회가 첨단하고 모던하니 예술도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도시와 영상〉, 〈미디어시티 서울〉과 같은 대형 기획전에서부터 각종 소규모 기획전과 개인전, 지자체 기획 전시 등에서 설치와 영상작품들은 넘쳤다. 와중에 많은 평면작가들은 소외당했다. 2007년 한국의 미술판은 정 반대다. 그 많던 설치와 영상 작품은 이젠 거의 볼 수 없다. 이제 많은 작가들은 그리거나 찍는다. “하고 나면 허무해요. 팔리지도 않고. 작업실이라도 있으면 보관을 하겠는데. 전시 끝나면 그냥 고물상에 돈 몇 푼 받고 파는 경우도 있어요. 속 많이 상하죠. 내가 낳은 애인데... 이젠 안하려구.” 어느 설치 작가의 말이다. 그 많던 설치와 영상 작가는 지금 뭐 먹고살고 있을까.
설치작가 차기율 ● 차기율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주제도 일관된다. 아마 그에게 설치는 땅, 순환, 죽음, 생, 여행과 같은 개념들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르처럼 보인다. 땅과 순환, 죽음의 이미지를 위해 나무, 동물 뼈, 뿌리, 물, 철 등을 사용한다. 설치는 세상 모든 사물을 작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장르다. 개념과 오브제간의 충돌과 구성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설치는 태생적으로 땅에 대한 원형적 기억과 체험을 가진 작가에게 자연스런 표현 형식일 것이다.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The Journey of circulation-Ark&Kangmok〉는 2004년부터 지속된 연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20여점의 드로잉과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벨벳 갤러리 지하에 설치하게 될 작품은 2005년 송파동 올림픽미술관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선을 보인 주제의 연장이다.
물을 담은 수조에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함께 예수, 부처, 마오쩌둥, 맥아더, 박정희, 이승만, 성모 마리아 등의 하얀 조각상이 수면에 떠있다. 물은 투명하거나 파랗지 않고 검다. 검은 물은 물의 연성이 제거되고 딱딱하고 견고한 고체 덩어리의 질감으로 변한다. 마치 검은 유리 혹은 거울과 같다. 반영과 반사로서 물은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살이의 악다구니를 닮았다. 삶의 상징적 기반인 물은 이데올로기의 추상과 관념성의 기반이면서 이를 포용하는 장이다. 이데올로기는 조각상이라는 시각적 덩어리로 상징되면서 젤리처럼 흐물거리는 검은 물 속에서 견고하게 고착된 듯 하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삶(물)이라는 생생한 기반 위에서만 관념의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그 기반은 또 얼마나 허약한가. 언뜻 보면 견고하지만 만지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는 액체로서 물은 우리네 삶의 일상성을 담았다. 그리고 그 연약하고 흐느적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이데올로기들 역시 불안하다. 우리 삶 구석구석, 몸 어디 즈음에 항상 숙주하면서 관념의 키 구실을 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삶이라는 구체성 없인 허망한 관념 덩어리에 불과하기에 그렇다. 작품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삶의 지평에서 견주어 모두 동일해 보임을 보여준다.
사물의 육질 ● 이번 개인전에서 주목할 작품은 사실 차기율의 드로잉이다. 물론 설치작품 사이사이에 그의 드로잉을 선보인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 전시엔 특히 드로잉에 주목한다. 그의 드로잉은 작품의 밑그림이거나 설치 작품을 위한 블루프린트가 아니다. 설치와는 다른 구도와 내러티브를 갖는다는 점에서 온전히 하나의 평면작품이다. 자신의 조형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설치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60년대 잡지에서 캐 낸 여성 사진, 화장되는 아버지의 사진, 성적 향취가 풍겨 나오는 여성 사진 위에 얼기설기 그려지는 식물성의 드로잉은 생명과 순환의 논리로 읽힌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거대한 똥 연작은 자연 순환의 논리를 떠나 유쾌한 시각적 유희를 보여준다. 똥에 뿌리를 내린 식물, 똥 비를 맞는 남자의 얼굴, 똥에서 흐느적거리며 내려오는 덩굴 더미 등은 똥이 가진 유쾌한 역설의 미를 보여준다. 사실 이미지만 봐선 포동포동하게 살이 꽉 찬 포도송이 같기도 하고 생명체의 살찐 육질 같다. 그래서 이러한 풍만함의 질감은 똥이 가진 순환과 생명의 논리를 한층 끌어올리면서도 작가가 지속해 온 생명과 순환, 여행의 관념성과 길항하기에도 적합해 보인다.
드로잉에서 똥의 육체성은 설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의 관념성과 가로놓이거나 포개진다. 바로 그 점에서 똥은 풍자가 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우리 몸의 상반신을 관장한다면 똥은 하반신을 지배한다. 먹어야 살지만 똥을 싸야 산다. 똥은 죽어 대지의 생명을 살린다. 우주와 순환의 메타포다. 그래서 ‘무릇 거룩한 삼라만상이여 썩을지어다’(고은, 〈어린 시절의 두엄자리〉)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시적 은유가 아니다. 얼굴에 똥이 비처럼 내리고, 몸뚱아리 구멍마다 새로운 덩굴이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온다. 똥이 살다 간 몸뚱아리엔 새로운 싹이 솟아난다.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로서 똥은 그래서 이쁘다. 불임과 불모의 현대인의 똥이 허상의 이데올로기로 전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똥은 다시 한번 역설적이다. 하여튼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똥 드로잉은 똥이라는 단어가 갖는 구체성이 전시 제목의 추상성과 묘한 엇박의 울림을 갖는다는 점만 지적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식물성의 이미지를 보자. 차기율의 모든 드로잉에는 식물, 인체, 죽음의 이미지 위에 식물의 이미지가 뽑혀 나오거나 연결되거나 넘쳐난다. 사물의 모든 구멍, 사물의 사이사이, 사물의 일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덩굴 이미지는 생성과 성장의 한순간을 드러낸다.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인 단면’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처럼 그가 그리는 모든 사물의 이미지는 운동성 속에 있다. 차기율의 드로잉은 이러한 사물이 움직이고 생성하는 중 어느 한 단면이 아니라 전체 혹은 전체가 움직이는 단면으로서 이미지다. 즉 그의 작품은 사물이 원래 가지고 있는 전체의 원형이다. 말의 미묘한 차이지만 변화하는 사물의 단면이 아니라 사물의 원형이 변화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이는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인데, 이를 생태니 생명이니 자연이니 하는 관념의 망으로 포획하기엔 그의 시선은 커 보인다. 그는 자신의 몸뚱아리에 육화된 자연 이미지의 생태를 그린다고 해야 옳지 않나 싶다. 지금 바라보는 사물은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 자체가 시간이요 여행이다. 순환의 여행. 그리고 그게 사물의 육질이다. 그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이렇듯 사물의 윤곽이나 껍질보다 항상 그 내면과 속살에 있다. ■ 정형탁 Vol.20070920a | 차기율 개인展 |
출처: 차기율 작업일지 원문보기 글쓴이: 차기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