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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 유적지 답심자료 스크랩 유교문화박물관을 찾아
이장희 추천 0 조회 160 14.04.01 18: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교문화박물관을 찾아

 

12월 25일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성탄절날 유교문화 박물관을 찾았다.

그전에 도산서원이나 퇴계종택을 다녀오면서 몇 번 지나치다가 틈나면 오겠노라 다짐했던 일을 오늘같이

서구문화의 성탄절에 동양문화의 유교흔적을 찾아나섬이 어울리기는 한 것인가?

 

유교문화 박물관은 국학진흥원 안에 있다. 국학진흥원에 대한 설명은 홈페이지 내용을 참고로 실었다.

 

한국국학진흥원(Korean Studies Advancement Center, 이하 ‘국학진흥원’으로 약칭함)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이다. 한국학 자료 가운데 특히 민간에 흩어져 있는 멸실 위기에 직면한 유교관련 기록문화재들을 기탁받아 안전하고 과학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문화재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국학진흥원 건립운동은 1996년 1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법인 설립허가를 받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후 5년여의 공사 끝에 2002년 4월 본관인 ‘홍익의 집’을 완공하였고, 같은 해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의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안동시에서 열린 세계유교문화축제에 맞추어 공식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여㎞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퇴계가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국학진흥원은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문화권으로 손꼽히는 영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권은 퇴계학의 본산으로서, 율곡 이이(1536-1584)를 정점으로 하는 기호학파와 함께 조선유학을 양분하였던 영남학파의 근거지라는 문화사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지역이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교문화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 지역의 서원은 한국(남한) 전체 서원 수의 약 32%에 달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종법제도의 상징인 종가나 재사 등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그야말로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고 서원 하나 안고 흐르지 않는 내가 없을 정도이다.

국학진흥원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002년 이후 현재까지 약 5년 동안 모두 20만여 점에 이르는 한국학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지정학적인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국학진흥원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학 자료의 수집과 보존이라는 설립취지를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에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국학진흥원은 모두 6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그 중심기능에 따라 크게 다음의 4개의 건물군으로 다시 나뉜다.


본관 건물로서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동은 지하 1층에 지상3층 규모이고 뒷동은 지하 1층에 지상 4층의 규모이며, 연면적은 12,812㎡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살려 지붕을 한옥지붕으로 마감하고 동기와를 올렸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둘렀다.
주로 연구실과 행정실로 쓰이며, 자료정리실과 도서관 그리고 500여명 수용 규모의 대회의실과 각종 세미나실 등 연구에 필요한 관련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유교문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영남학파의 본산이라는 국학진흥원의 지정학적 특징을 고려하여 한국의 유교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건립되었다. 
 면적 4,414㎡의 4층 건물로서, 2층에서 4층은 전시실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시로 크게 나뉜다. 아울러 1층은  국학진흥원이 수집하는 각종 기록문화재를 정리·분류·보존할 수 있는 수장고도 갖추고 있다. 이 수장고는 기록문화재의 특성을 감안하여 종이로 된 자료의 변질과 훼손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각종 보존 장비를 갖춘 최첨단의 시설로 설계되어 있다.


국학진흥원이 역점을 두고 수집하고 있는 목판(책판)을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시설이다. 연면적 1,402㎡로서, 지상 2층 건물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습도에 따라 자동으로 개폐되는 전동식 창을 비롯하여 목판 보관에 필수적인 각종 보존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다. 국학진흥원이 추진하고 있는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에 발맞추어 총 10만장의 목판을 수장할 수 있는 규모이다.


국학진흥원을 방문하는 방문자들의 숙소용 건물이다. 연구목적으로 국학진흥원 체류를 희망하는 외부 연구자들과 국학진흥원 교육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교육생 그리고 전통문화의 현장을 체험하려는 이들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2인실과 5인실, 10인실 등 다양한 규격의 객실이 구비되어 있으며, 총 수용규모는 300명이다. 연면적 7,160㎡의 지상 4층 건물로서, 현재 전문연수기관에 위탁하여 운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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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랑 너머로 안동댐의 담수가 보이는 멋진 곳에 자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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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문화박물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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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하고 상냥한 안내직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전시장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면하는 추사의 세한도 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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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시작점에 설치된 퇴계 이황의 흉상. 안동은 물론 유학이란 학문에서 퇴계를 빼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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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이 익"의 성호사설(星湖僿設) 활자본이다.

성호사설은 요즈음의 백과사전인데 그 앞에서 한 참을 머물렀다. 말로만 듣던 것을 눈으로 보게 된 감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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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감동을 준 "황사영의 백서"다. 물론 복사본이긴 하지만,

근대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실제 접하게 되니

그 감동은 대단했다. 비단에 쓰여졌다하여 "백서"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13,000여자를 붓으로 빼곡하게

적은 것을 보니 그 당시에 천주교 박해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고자한 그의 절절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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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 천주교신자 황사영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내용과 대응방안을 적어 중국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한 밀서(密書).

황사영은 정약현(丁若鉉 : 丁若鏞의 맏형)의 사위로서 정약종(丁若鍾)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서울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박해를 피해 

찾아온 황심(黃沁)과 함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편지로 적어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으나 사전에 체포되는 바람에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황사영백서는 길이 62㎝, 넓이 38㎝의 흰 비단에 1만 3,311자를 먹으로 쓴 편지이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황사영의 대책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조선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압수되어 의금부에 보관되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가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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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안향安珦과 백이정白?正 등이 원나라에서 주희의

책을 얻어온 것이 계기가 되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시에 이념의 기틀을 제공했던 성리학은 퇴계, 율곡 등의 대학자를 통해

조선성리학으로서의 학술적 면모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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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은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이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

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조선을 달구었던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은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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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말 그대로 관혼상제의 사례를 알기쉽게 풀이한 조선 숙종때 이재가 편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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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고 놀라 본 것중 하나인 "임신서기명석"이다.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임신서석기"로 배운 것 같은데 여하튼,귀한 자료를 보게

된 기쁨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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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의 점판암제(粘板巖製)로,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라 호칭하고 있다.
한자·한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금석문 유물로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젊은이들의 신서(信誓) 관념의 표상물(表象物)이고,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서예사적(書藝史的) 측면에서도 자형과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金石文)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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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朱熹의 『소학小學』을 알기 쉽게 토를 달아 우리말로 풀이한 책이다. 조선시대 사림파 학자들이 특히 

중시했던 이 책은 선조宣祖가 도산서원에 하사했던 내사본이다.                                                                                      

소학』은 성리학의 가치규범들을 일상생활속에서 실천하면서 체득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은 수양의

기본 지침서이다. 우리말로 번역, 간행됨에 따라 정치 이념으로 수용되었던 성리학이 일정 정도 백성들의 생활속에

자연스럽게 정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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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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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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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책과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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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인형으로 꾸며놓은 선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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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유교의 수양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황에 알맞게 드러내는 일을 중시한다.

유교에서는 마음속의 감정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중中"이라고 부른다.

감정이 아직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마음속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되,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마주한 상황에 딱 어울리도록 표현된 상태를 "화和"라고 부른다.

유교에서 도덕적 인격의 수양과 관련하여 중시하는 "中和"는 이처럼 마주하는 상황에 적절하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까닭에 유교에서는 "시중時中",즉 "상황에 항상 맞아 들어가는 중中"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

 

中和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남과 맹목적으로 어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도덕적인 원칙을 지키며

화합해간다. 이점을 가리켜 공자는" 군자는 자신의 도덕적 원칙을 지키면서 주변과 조화되기를 추구하지만,

소인은 자신의 원칙을 내팽개치고 남과 같아 지는데만 급급해한다"고 말하였다.

요컨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을 지키면서 다른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사람이 참다운 유학자 즉,"선비"인

것이다. 이는 마치 갖가지 양념들이 각각의 고유한 맛을 잃지 않고 서로 조화됨으로써 맛있는 국맛을 이루는

이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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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李滉(1501~1570)이 심신心身의 건강을 위하여 『구선활인심법?僊活人心法』이라는 중국 수련서의 내용

을 내용을 요약, 정리한 책이다. 이황의 친필 글씨와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체로 필사된 시기를 추정하면 
대략 30대에서 40대 전후로 확인되고 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던 이황은 46세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벼슬을 하였다.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성인聖人은 병이 생기기 전에 다스리고, 의사는 이미 병이 생긴 후에 다스

린다. 성인의 다스림을 치심治心, 수양修養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고 말하고 있다. 마음 다스리는 것을 중시한 이황은 그 방법으로 칠정七情이 중화中和의 상태를 이루게 하는

중화탕中和湯, 참을 ‘인忍’자를 실천하는 화기환和氣丸, 일상생활에서의 양생법, 도인기공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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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지란 우리 선조들이 수효를 셈하는데 쓰던 젓가락만한 대를 말한다. 2~5명이

선을 정한 뒤, 선이 산가지 20~30개를 한움큼 쥐어 바닥에 세웠다가 자연스럽게 놓으면

 산가지가 흩어지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흩어진 산가지를 다른 가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씩 집어가는데 가장 많이 집어간 사람이 이긴다. 

다른 가지가 흔들리면 산가지를 가져갈 수 없으며 집어간 가지를 이용해 다른 가지를 ·

살짝 들어내도 무방하다. 산가지에 검정,빨강·노랑·초록 등의 색을 칠해 색깔별로 점수를

 매겨 점수제로 승부를 내기도 한다. 놀이방법이 간단하지만 세심한 관찰력과 극도의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정신집중과 함께 예민한 감각이 요구돼 교육적 효과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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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악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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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길 "대장부론"

진정한 대장부가 되기란 이리 어렵다.

그런데 요즈음 소인배면서 대장부인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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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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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 마을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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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주민등록증 "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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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패(祿牌)
 나라에서 녹을 받는 이에게 증거로 주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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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집(家禮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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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에 있는 물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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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에 있는 물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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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급제한 답안지.

군데군데의 먹점은 채점관의 확인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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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으로 만든 서당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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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자치규약을 정한 "향약"

위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중국의"여씨향약", 아래는 국내의 "예안향약"

이역시 학창시절에 공부했던 것이라 보는 것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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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기구인 "혼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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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화.

생각보다 굉장히 크서 저것을 머리에 꽂는다는 것이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어떤 방법이 있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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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에 필요한 小品 , 크기가 작아 앙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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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제를 알리는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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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제한 답안지라는데 글씨가 복잡해보인다. 그러나 일정한 종이 면적에 아는 것을 조금

이라도 더 많이 적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옛날의 한지는 두께가 굉장히 두껍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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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천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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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의 유교문화박물관 현판.목조로 만들어진 내부는 정갈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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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움에 오래 쳐다본 미수 허목선생의 글씨.

지금까지 보아온 미수체와는 사뭇달라 밑의 설명을 읽지 않았다면 허목선생의 글씨라 믿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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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을 만드는 과정중, 목판을 만드는 모습을 단계별로 진열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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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의 무늬를 찍는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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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權?(1672~1749)가 편찬한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中國古今歷代沿革之圖?의 목판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삼황(三皇),오제(五帝)로 부터 명(明)나라,청(淸)나라 까지,한국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으로부터 숙종까지의 왕조

 계통도와 주변 여러 국가의 국호와 사적을 시기에 따라 황색, 청색, 흑색으로 구분하여 그려가면서, 관련되는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권구의 외손자 유일춘의 발문(跋文)이 맨 끝 부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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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의 크기도 크기려니와 섬세하게 조각된 솜씨가 경탄을 자아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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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판으로 찍어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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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둘러보는데 약 2시간이 걸렸다. 어찌보면 짧은시간이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인데 아는것이 부족하니 보이는 것이 적어 관람시간도 짧아졌을 것이다.

넓은 국학진흥원에 관람하는 사람은 5명정도 밖에 되지않아 허전한 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서울말씨를 하는 세명의 가족을 보았는데 휴일을 틈타 어떻게 이곳 안동까지 오게된

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내 허전함을 메워주었다.

초등학생인 듯한 자녀를 데리고 이곳을 찾은 부모의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싶다.

 

하회탈의 넉넉한 웃음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족한 지식에 의기소침해진 마음이 조금은

풀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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