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에 한 권의 책이 있는 사람은 백화가 만발한 정원을 갖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일상에 쫓겨 책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휴가는 좋은 책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서점에 가면 어떤 책을 집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지기 일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그저 그런 책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100여권이 넘는 신간이 쏟아지지만 혹자는 읽을 책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또 누군가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평소 누구보다 많은 책 속에서 살아가는 국내 대표 출판사 7곳의 편집장들이 휴가철 읽을 만한 책을 추천했다. 자사에서 출판한 책은 제외한 만큼 객관적인 시각으로 선정이 이뤄졌다.
뜨거운 여름, 이 한 권의 책과 함께 ‘북캉스’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어느 기억상실자의 고독한 여정
과거의 순간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테다. 기억상실로 지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됐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온전한 ‘나’일 수 있을까?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년 작)’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기 롤랑’은 10년 전에 기억을 모두 상실해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한다. 깡그리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다시 찾고 싶어지게 마련일 것이다. 기 롤랑 역시 지극히 파편적이고 막연한 단서에 의존해가며 과거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한다.
같은 소설을 두 번 읽은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다소 몽환적인 느낌이 도는 문장들, 낯선 지명과 거리, 주인공인 기 롤랑 말고는 잠깐씩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다수의 등장인물들 탓인지 처음 읽을 당시에는 앞서 읽고 지나간 줄거리조차 세세히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소설의 여러 장면들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억은 때로 현재 일인 듯 생생하게, 혹은 그저 어렴풋하고 불확실하게 우리의 뇌리에 축적돼 간다. 인간의 뇌는 사는 동안 경험한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 롤랑이 과거 시간 속으로 떠난 여정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따라서 지극히 파편화된 잔상들을 조합해 하나의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지난하기 그지없다. 기 롤랑처럼 기억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억의 편린들을 이어 붙이고 다듬어 하나의 완성된 기록 필름처럼 만들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무튼 기 롤랑은 지난 시절 자신과 연관됐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파편화되고 불확실한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조합한 결과 한때 자신이 도미니카공화국 파리 영사관에서 일했던 페드로 맥케부아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드니즈라는 매력적인 애인이 있었으며, 스위스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게 됐음을 알게 된다. 다만 기 롤랑은 과거의 인물 페드로 맥케부아가 진정 자신이었는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할 뿐더러, 어렵사리 찾아낸 과거가 기대만큼 환희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깨닫는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지만,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란 사실을 넌지시 일깨운다.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 보고 살아야
과거란 어떤 의미일까? 과거의 순간순간이 모여 현재의 내가 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이 소설은 기 롤랑이 어렵사리 찾아낸 과거를 통해 애잔하고 서글픈 그 시간들을 명징하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까지다. 파리의 어느 후미진 골목을 걸어가던 발자국 소리들, 어두운 창문을 통해 바깥을 응시하던 불안한 시선,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던 시대의 불확실성이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오는 소설이기도 하다.
지난해 파트릭 모디아노는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 점령기의 생활 세계를 드러냈다’라는 평가와 함께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동주 밝은세상 편집장]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기승전 요리’ 시대에 맛있는 이야기
바야흐로 요리의 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지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썰고 지지고 볶으며, 그것도 아니면 맛집 품평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말 오전 음식점 탐방 프로그램만으로 행복해하던 사람들이 직접 손과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스물일곱 개 요리에 담긴 식사의 품격
올여름 휴가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기승전 요리’ 시대에 어울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창 읽고 있던 책 한 권이 단박에 떠올랐다. 바로 몇 주 전 주간지 연재를 마치고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딸에게 주는 레시피’다.
작가는 모두 스물일곱 가지의 아주 간단한 요리를 선보이는데, 요리의 실사 이미지 없이 작가의 속삭임을 따라 읽기만 해도 멋스러운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깨끗이 씻은 시금치를 쭉쭉 찢어 올리브유와 치즈를 뿌려 내는 초간단 요리부터, 이거 하나만큼은 언젠가 손님까지 초대해서 꼭 한번 해 봐야지 마음먹게 하는 쉽고 빠른 안심스테이크, 알코올을 위장 한가득 들이붓고 난 다음 날 몽롱한 정신이어도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오징어 국(혹는 찌개)까지.
‘작가 공지영’이 쓴 요리 에세이에는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딸이 아니어도 마음 든든해지게 만드는 인생의 조언들이 요리를 소개하는 계기와 함께 펼쳐진다. “육체는 우리 영혼의 집”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아무리 요리가 대세라 해도 작가가 대체 왜 흔하디 흔한 요리를 소재로 한 걸까’라는 의문이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금세 사르르 녹아버린다.
산골에서 세끼 밥을 해 먹거나, 타인의 냉장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식재료를 깨워 화려한 요리로 만들거나, 네티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속칭 ‘야매 요리’를 선보이는 프로그램들의 화려한 등장을 단지 ‘먹고살기 좋아져서’라고 매도하기 쉬운 요즘 상황에서 요리의 춘추전국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세워주는 ‘요리 철학’을 담은 책이라고 하면 어떨까.
작가는 20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본 배낭여행 청년들의 길거리 식사를 통해 ‘식사의 품격’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잘못하면 그저 배를 채우는 먹거리를, 그 가난하고 빈한한 식사를, 그들은 그 하얀 천 하나로 갑자기 문화로 만들어버린” 모습처럼, 작가의 집 식탁에도 천을 깔고 함께 식사 문화를 만들어간 경험을 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비록 짜장면이나 피자 같은 배달음식을 먹을지라도 식사 시간 잠깐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시간으로 만들어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정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잘 먹이고 잘 쉬게 하고 그러고 나서 잘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혼을 담을 그릇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 안에 담긴 영혼조차도 헛것이 돼버릴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나서 휴가 마지막 날 저녁에는 스물일곱 개 요리 중 하나를 골라 ‘내일 출근하는 나를 위해’ 요리한다면 금상첨화, 화룡점정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작가가 딸에게 하는 말을 되뇌며 천천히 요리를 음미해보면 더 좋고.
“네가 설사 너무 바빠 며칠을 라면만 먹고 산다 해도, 네가 너무 가난해져서 엄마도 떠난 먼 훗날에 신선한 요리를 하나도 해 먹을 수 없다 해도, 너는 소중하다고. 너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일을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돼.”
[이진숙 해냄출판사 편집장]
벚꽃, 다시 벚꽃 미야베 미유키 지음
삶 다독여주는 ‘미야베 월드’ 대표작
‘미야베 월드’ ‘온다 월드’ ‘톨킨 월드’…. 이름 뒤에 ‘월드’가 붙는 작가들이 있다. 그 작품 세계가 워낙 놀랍고 방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뜻으로 독자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지만, 내 스스로가 미야베 월드와 온다 월드 주민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혹은 인정)하고 있다. 종종 신간 소식을 놓쳤을까 봐 괜히 한 번씩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작가의 이름을 쳐볼 정도다.
올 상반기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이다. 미야베 월드는 마치 일산이 동구와 서구로 갈리듯, 현대물과 에도시대물로 나뉘는 듯하다. ‘화차’ ‘이유’ ‘모방범’ ‘솔로몬의 위증’ ‘형사의 아이’ 등이 현대물이라면, ‘맏물 이야기’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흑백’ ‘안주’ 등은 시대물이다. ‘미미 여사’의 책을 잡으면, 일단 책을 펼치기도 전에 ‘무엇을 썼든 재미없을 리가 없지’ 하는 든든함이 차오른다.
책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치 트렌디하게 각색한 퓨전사극처럼) 캐릭터나 정서가 꽤 현대적인 느낌이다. 주인공 쇼노스케는 유약하고 소심한 데다 숙맥에 숫기도 없는 하급 무사, 즉 초식남 스타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뇌물을 받았다는 (위조된) 수취증서가 발견돼 할복으로 끝내 목숨을 끊는다.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쇼노스케는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나 에도의 쪽방촌으로 들어와서 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자’지만, 마치 요즘 미드(미국드라마)처럼 그 안에 몇 편의 에피소드들이 있다. 자작극 납치 소동, 행방불명된 아내, 몸의 절반이 붉게 멍든 묘령의 단발머리, 암호로 적어놓은 기나긴 짝사랑, 오물 같은 속세의 독을 이야기책으로 토해내는 사람 등등….
쇼노스케는 대서소에서 필사 일을 받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인쇄기가 없던 시대에 사람 손으로 베껴 책을 만드는 작업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호화로운 입체그림을 베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 이름은 빨강’의 세밀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쇼노스케가 일종의 구황록(救荒錄)인 ‘도비안일전’을 베껴 쓰며 ‘이런 책은 삯을 덜 받더라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약간은 교조적으로) 투지를 불태울 때, 왠지 모를 동료애(?)가 느껴져 혼자 감격했다.
다양한 에피소드 속 가족의 진정한 의미 탐구
책 뒷면에 실린 저자 인터뷰 한 토막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짚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가족 문제를 의식하게 된 것은 동일본 대지진 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를 돌아보자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였다.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만능의 묘약은 아니다.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피를 나눴다는 속박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소중한 걸 잃은 건 아니라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초식남이랑 단발머리가 사귀었는지, 아버지의 결백은 밝혔는지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가족이 만능의 묘약도 아니고 세상의 전부도 아니’라는 걸 알면, 가족에게 사랑은커녕 상처와 고통만 받았더라도 스스로 힘을 낼 수 있다. 가족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 따위, 혹은 가족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해졌다는 푸념 따위는 가볍게 털어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세현 쌤앤파커스 편집장]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경륜 돋보이는 원로 불문학자의 산문집
업무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 때문에 직장 동료와 함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앉아 고민한 적이 있다. 이미 밤이 늦었는데 더 붙들고 있어 봐야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해 우리는 내일 고민하자며 퇴근하기로 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이든 외부의 상황이든 조금 달라져 있겠지 생각하면서.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동료는 그런 경우에 쓰면 좋은 프랑스어 표현을 하나 알려줬다. ‘라 뉘 포르 콩세이(La nuit porte conseil)’. 직역하면 ‘밤이 조언을 갖고 있다’라는, 우리말로는 좀 이상한 말이 되지만.
원로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제목 ‘밤이 선생이다’를 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 프랑스어 표현이었다. 실제로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라 뉘 포르 콩세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표현의 우리말 번역으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이 산문집은 선생이 여러 해 동안 매체에 기고한 칼럼 등을 모은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오래전에 쓴 것부터 치면 30년가량의 글이 일상 단상에서부터 시사 칼럼, 영화나 시나 사진에 대한 소평론으로 볼 만한 글, 예술과 문학과 학문을 소재로 한 수필까지 넓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다양한 글이지만, 모든 사태 앞에서 조금 더 느리고 깊은 숙고를 권하는 선생의 성정이 일관되게 어리비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제목 아래 한 덩어리로 잘 안겨 있는 느낌이 든다.
책이 큰 공감과 경탄을 자아내는 데는 무엇보다 선생의 말하는 방식 혹은 선생의 생각과 글이 갖고 있는 결의 역할이 크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아주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 직접 살아 보지 않은 타인의 인생까지 깊이 이해하는 통찰과 경륜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선생의 글은 전혀 단호하지 않지만 매우 날카롭다. 어떤 경우에도 일도양단하지 않고 온유하고 섬세한 언어로, 정말 분리해서 들여다볼 지점까지 찬찬히 헤쳐 들어가며 우리를 이끈다. 어떤 칼이 그렇게 부드러운 동시에 예리할 수 있을까. 또 선생의 글은 어디에도 명령하듯 말하는 부분이 없는데도 반성하게 만든다. 다만 어떤 사태를 잘 그려내고, 그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각도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잘 갖지 못했던 시선이다.
간단히 한 편만 읽어 보면 이런 식이다.
통찰 녹아 있는 30여년간의 글 모음집
‘장옥이 각시의 노래’는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편이 종적을 감춰 과부 아닌 과부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사는 장옥이 각시가 날마다 언덕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사가 돈 있고 잘난 놈이 자기를 좀 데려가줬으면 하는 민망한 내용이다. 동네 사람들이 이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한다. 결국 이장이 나서서 마을 원로한테 묻자 그 원로가 말한다. “내가 요즘 귀를 좀 먹어서 그러는데 장옥이 각시가 노래는 잘 부르는가?” “노래야 일품이지요.” “그렇다면 됐네, 마을 사람들한테 나처럼 귀먹기 전에 그 좋은 노래를 많이들 들어 두라고 하게.” 예술이 왜 자유를 누려야 하는가. 비록 촌로라 할지라도 인생을 아는 사람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얼마나 열려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황현산 선생이 강연을 할 때 청중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데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느냐.” 선생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독서의 양은 시간이다.” 한 문장을 읽더라도 오래 머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다면 ‘밤이 선생이다’를 권한다. 독립적이고 비교적 짧은 글들의 모음이니 어디라도 펼쳐서 짬짬이 읽고 삭혀 보면 좋을 듯하다.
[강무성 열린책들 편집주간]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 아널드 새뮤얼슨 지음
헤밍웨이가 들려주는 인생 조언
“절대 샘이 마를 때까지 자기를 펌프질해서는 안 돼. 내일을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하네. 멈춰야 하는 시점을 아는 게 핵심이야.”
스물두 살의 철없는 작가 지망생, 혈기 왕성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젊은이가 찾아왔을 때, 대작가 헤밍웨이의 첫 충고가 이것이었다. 모두 다 쏟아붓지 말고 언제나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인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한 게 작가의 길 아닌가. 그런데 정작 헤밍웨이는 멈출 때를 알고 멈춰야 한다는 것부터 알려준다. 헤밍웨이의 이 말이 작가 지망생들에게만 울림을 줄까. 아니다. 각자의 길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모든 이들에게 시원한 바닷바람 같은 깨달음을 주지 않는가.
얼마 전 출간된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멋진 여름휴가 같은 책이다. 훌륭한 보트를 빌려 드넓은 푸른 바다로 나갈 때의 두근거림, 마냥 한가로울 것 같았지만 파도와 싸우는 일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느끼게 되는 뿌듯함, 커다란 청새치와의 사투라는 모험, 이 속에 대작가가 풀어놓은 창작에 대한 노련한 가르침까지. 책에는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읽어보지 않은 이들이라 해도 기대되고 가슴 뛰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책의 원제는 ‘헤밍웨이와 함께 : 키웨스트와 쿠바에서의 일 년(With Hemingway)’이다. 저자 아널드 새뮤얼슨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22살 차이. 평생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미네소타대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지만 학위증 수수료 5달러를 내고 싶지 않아 공식적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를 하던 새뮤얼슨은 잡지에 실린 헤밍웨이의 단편 ‘횡단여행’을 읽고 그의 추종자가 된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를 찾아 플로리다 남쪽, 미국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 키웨스트로 찾아간다.
“내 배를 돌볼 사람을 하나 구하려고 해. 일은 많지 않을 거야. 자네가 그 일을 원한다면 아침마다 보트를 청소한다 해도 글 쓸 시간은 있을 거야. 당장 계획하는 일이라도 있나?”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의 비밀은 제대로 된 휴식
이렇게 시작된 둘의 만남은 1년 동안 함께 배를 타고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 위로 이어진다. 책은 새뮤얼슨이 헤밍웨이와 함께 낚시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배운 내용을 담고 있다. 단 1년의 경험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새뮤얼슨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어 그가 재능 있는 소설가였는지 아닌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독자의 눈앞에 헤밍웨이가 실제로 서 있는 것처럼 그 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헤밍웨이가 어떤 작가인가. 서문에도 나와 있듯, 그가 죽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거의 혈혈단신으로 문학과 이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놨습니다.” 20세기 인류 영혼의 한 부분을 만든 그가 젊은 작가에게 남긴 수많은 말들 속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비단 작가에게만 열정과 창작의 샘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주 단순한 일을 하는 이들이라 해도 어떤 이들은 그 일에서 남다른 재미를 찾고, 더 노련해지며, 다른 방법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제대로 된 휴식’이다.
제대로 된 휴식이란 뭘까. 이 책 구석구석에서 헤밍웨이의 말을 빌려 온다면 이렇다.
‘자기를 끝까지 소진시키지 않는 것, 꾸준히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그는 강조한다. 무엇보다 마음을 쉬게 하는 데는 낚시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고.’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편집장]
마음의 힘 강상중 지음
인생에 모라토리엄을 허(許)하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휴가는 꼭 필요한 리추얼(ritual·의식)이다. 그 신성한 시간에 동반할 단 한 권의 책을 택한다면 주저 없이 강상중 교수의 책을 집어 들 것이다. 그는 ‘믿고 볼 수 있는’ 작가다. 게다가 그의 책은 가볍다. 200쪽 내외의 문고판이지만, 지면에 그려지는 정밀한 생각의 궤적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우리를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이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마음의 힘’이다.
마음의 주인은 분명 나이거늘, 어쩐지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보다 막강한 무언가가 쥐락펴락하는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중심을 잃고 오락가락 휘청대기 일쑤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이 마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책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필요한 ‘마음의 힘’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풀어낸 인생론이다.
생산성·합리성에서 벗어나 보는 체험의 중요성
재일 동포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강상중 교수는 진지한 사유와 따뜻한 시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로 인생의 근원적인 의미들을 탐구해왔다. 그의 언어가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그 자신이 녹록지 않은 서사를 지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그의 아들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들의 죽음과 부재의 시간 속에서 그는 “슬프다는 것보다는 마음속이 텅 빈 듯한 무중력 상태”를 겪었다고, 서문에서 고백한다. 때때로 덮쳐 오는 격한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음의 힘’은 그 고통의 시간들을 건너는 동안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깨달은 인생의 수수께끼에 관한 이야기다.
전작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도쿄 산책자’에서 그랬듯 ‘마음의 힘’에서도 그는 인생을 둘러싼 시대와 마음의 관계를 밀도 높게 파고든다. 저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원한 내면세계인 ‘마음’ 안에 시대의 질병과 고민이 함축돼 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나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병들어 있으면서 개인더러 건강하게 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단일한 기준과 가치관만 존재하는 사회, 대안을 사고할 여유가 없는 삶, 끊임없이 불안을 유발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마음의 병을 치유할 의지도 기회도 갖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든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다 보니 출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자기소외와 극단적 단절을 택한다는 점이다.
강상중 교수는 병들어가는 사회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마음의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모라토리엄’을 권한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생산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 풍덩 뛰어들어 보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마음의 풍요로움, 건강함은 궁극적으로 ‘복수의 선택지를 상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생활의 기반에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설령 쓸모없을지라도 무언가를 충분히 해 보는 데서 얻은 만족감은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주며,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
이 책에는 100년 전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등장한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갔을지 저자가 상상해 그려낸 후일담 소설과 에세이가 독특하게 결합돼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낯설거나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100년 전 사람들이 앓던 마음의 병은 겉모습만 바뀐 채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사람에게나 지금 사람에게나 인생은 호락호락한 법이 없다. 그러니 미리 겁낼 필요도, 지레 포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마음이 중력을 되찾고 묘하게 의연해진다.
[신주영 21세기북스 출판개발실장]
해커와 화가 폴 그레이엄 지음
“오직 탁월함만이 자신을 증명하는 길”
‘해커와 화가’. 이상한 제목이다.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비로소 궁금증이 풀린다.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은 프로그래머이자 화가다. 1995년 세계 최초의 웹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인 비아웹을 만든 뒤 야후에 팔아 갑부가 됐고, 2005년에는 와이콤비네이터라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를 시작해 800개가 넘는 회사를 키워냈다. 드롭박스, 에어비앤비, 스트라이프 등이 여기를 거쳐 갔다. 프로그래밍 서적을 제외하면, ‘해커와 화가’는 이 독특한 사내가 출간한 유일한 책이다.
따로 발표된 글을 모은 걸 감안하더라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공부벌레(nerd)는 왜 인기가 없을까’ ‘해커와 화가’ ‘부자가 되는 법’ ‘창조자의 심미적 취향’ 같은 장 제목을 훑어봐도 마찬가지다.
로버트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리처드 세넷의 ‘장인(匠人)’, 윤석철 교수의 경영학책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IT와 사업을 한다는 것,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한 자기만의 견해를 직구로 던진다. 동시에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실질’을 깊이 파고든다. 색다른 통찰들이 넘실댄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와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에 가깝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에세이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해커(정통한 프로그래머)로서의 자부심을 어이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필요하기만 하다면 프랑스 문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딸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 중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 분쟁을 일으킬 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언들이 비일비재하다. 성공한 백인 남성답게 미국 자유주의 찬양은 애교고(“건국의 아버지들이야말로 해커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때문에 갖게 된 사회관은 위험할 정도다. 미적 상대주의도 풋내기의 헛소리로 치부한다(“디자인에는 좋고 나쁨이 있다. 해보면 안다”).
불편하지만 날카로운 업에 관한 통찰
대신 낯선 일에 용기 있게 뛰어들어 살아남은 자의 무용담을 만나게 된다.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시행착오를 거쳐 거대한 성공에 이르는 길을 실제로 걸어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확신과 통찰이 담겨 있다. IT와 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싶은 경구도 많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의 세계관이다. 사람들이 ‘실질’을 다루는 능력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이는 미적감각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아름다움은 훌륭한 구조의 반영이다”). 이 능력에 맞는 보상을 줄 수 있는 사회는 전체의 부(富)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 경쟁자나 사업모델 따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혹은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에 집중해 새로운 것을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일의 본질이라는 것 등. 즉 우주는 수준이 다른 존재들로 이뤄져 있으며 여기에 평등 같은 건 없다는 것. 오직 탁월함만이 세상에 자기를 증명하는 길이라는 것. 가차 없는 업(業)의 도(道)를 말한다.
일에서 탁월함을 얻고자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익사 중인 사람에게 추천한다. 글이 맵기 때문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 동동거리는 이에게도 추천한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눈을 준다.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하고, 대체로 행복하며, 남들에게 사람 좋다는 소릴 듣는 이야말로 꼭 봐야 할 책이다. 잘못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해 민음사 편집부장]
[정리 : 노승욱·류지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15호 (2015.07.08~07.14일자) 기사입니다]
일상에 쫓겨 책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휴가는 좋은 책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서점에 가면 어떤 책을 집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지기 일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그저 그런 책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100여권이 넘는 신간이 쏟아지지만 혹자는 읽을 책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또 누군가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평소 누구보다 많은 책 속에서 살아가는 국내 대표 출판사 7곳의 편집장들이 휴가철 읽을 만한 책을 추천했다. 자사에서 출판한 책은 제외한 만큼 객관적인 시각으로 선정이 이뤄졌다.
뜨거운 여름, 이 한 권의 책과 함께 ‘북캉스’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어느 기억상실자의 고독한 여정
과거의 순간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테다. 기억상실로 지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됐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온전한 ‘나’일 수 있을까?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년 작)’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기 롤랑’은 10년 전에 기억을 모두 상실해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한다. 깡그리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다시 찾고 싶어지게 마련일 것이다. 기 롤랑 역시 지극히 파편적이고 막연한 단서에 의존해가며 과거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한다.
같은 소설을 두 번 읽은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다소 몽환적인 느낌이 도는 문장들, 낯선 지명과 거리, 주인공인 기 롤랑 말고는 잠깐씩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다수의 등장인물들 탓인지 처음 읽을 당시에는 앞서 읽고 지나간 줄거리조차 세세히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소설의 여러 장면들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억은 때로 현재 일인 듯 생생하게, 혹은 그저 어렴풋하고 불확실하게 우리의 뇌리에 축적돼 간다. 인간의 뇌는 사는 동안 경험한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 롤랑이 과거 시간 속으로 떠난 여정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따라서 지극히 파편화된 잔상들을 조합해 하나의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지난하기 그지없다. 기 롤랑처럼 기억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억의 편린들을 이어 붙이고 다듬어 하나의 완성된 기록 필름처럼 만들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무튼 기 롤랑은 지난 시절 자신과 연관됐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파편화되고 불확실한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조합한 결과 한때 자신이 도미니카공화국 파리 영사관에서 일했던 페드로 맥케부아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드니즈라는 매력적인 애인이 있었으며, 스위스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게 됐음을 알게 된다. 다만 기 롤랑은 과거의 인물 페드로 맥케부아가 진정 자신이었는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할 뿐더러, 어렵사리 찾아낸 과거가 기대만큼 환희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깨닫는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지만,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란 사실을 넌지시 일깨운다.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 보고 살아야
과거란 어떤 의미일까? 과거의 순간순간이 모여 현재의 내가 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이 소설은 기 롤랑이 어렵사리 찾아낸 과거를 통해 애잔하고 서글픈 그 시간들을 명징하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까지다. 파리의 어느 후미진 골목을 걸어가던 발자국 소리들, 어두운 창문을 통해 바깥을 응시하던 불안한 시선,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던 시대의 불확실성이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오는 소설이기도 하다.
지난해 파트릭 모디아노는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 점령기의 생활 세계를 드러냈다’라는 평가와 함께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동주 밝은세상 편집장]
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기승전 요리’ 시대에 맛있는 이야기
바야흐로 요리의 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지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썰고 지지고 볶으며, 그것도 아니면 맛집 품평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말 오전 음식점 탐방 프로그램만으로 행복해하던 사람들이 직접 손과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스물일곱 개 요리에 담긴 식사의 품격
올여름 휴가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기승전 요리’ 시대에 어울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창 읽고 있던 책 한 권이 단박에 떠올랐다. 바로 몇 주 전 주간지 연재를 마치고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딸에게 주는 레시피’다.
작가는 모두 스물일곱 가지의 아주 간단한 요리를 선보이는데, 요리의 실사 이미지 없이 작가의 속삭임을 따라 읽기만 해도 멋스러운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깨끗이 씻은 시금치를 쭉쭉 찢어 올리브유와 치즈를 뿌려 내는 초간단 요리부터, 이거 하나만큼은 언젠가 손님까지 초대해서 꼭 한번 해 봐야지 마음먹게 하는 쉽고 빠른 안심스테이크, 알코올을 위장 한가득 들이붓고 난 다음 날 몽롱한 정신이어도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오징어 국(혹는 찌개)까지.
‘작가 공지영’이 쓴 요리 에세이에는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딸이 아니어도 마음 든든해지게 만드는 인생의 조언들이 요리를 소개하는 계기와 함께 펼쳐진다. “육체는 우리 영혼의 집”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아무리 요리가 대세라 해도 작가가 대체 왜 흔하디 흔한 요리를 소재로 한 걸까’라는 의문이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금세 사르르 녹아버린다.
산골에서 세끼 밥을 해 먹거나, 타인의 냉장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식재료를 깨워 화려한 요리로 만들거나, 네티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속칭 ‘야매 요리’를 선보이는 프로그램들의 화려한 등장을 단지 ‘먹고살기 좋아져서’라고 매도하기 쉬운 요즘 상황에서 요리의 춘추전국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세워주는 ‘요리 철학’을 담은 책이라고 하면 어떨까.
작가는 20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본 배낭여행 청년들의 길거리 식사를 통해 ‘식사의 품격’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잘못하면 그저 배를 채우는 먹거리를, 그 가난하고 빈한한 식사를, 그들은 그 하얀 천 하나로 갑자기 문화로 만들어버린” 모습처럼, 작가의 집 식탁에도 천을 깔고 함께 식사 문화를 만들어간 경험을 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비록 짜장면이나 피자 같은 배달음식을 먹을지라도 식사 시간 잠깐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시간으로 만들어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정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잘 먹이고 잘 쉬게 하고 그러고 나서 잘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혼을 담을 그릇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 안에 담긴 영혼조차도 헛것이 돼버릴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나서 휴가 마지막 날 저녁에는 스물일곱 개 요리 중 하나를 골라 ‘내일 출근하는 나를 위해’ 요리한다면 금상첨화, 화룡점정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작가가 딸에게 하는 말을 되뇌며 천천히 요리를 음미해보면 더 좋고.
“네가 설사 너무 바빠 며칠을 라면만 먹고 산다 해도, 네가 너무 가난해져서 엄마도 떠난 먼 훗날에 신선한 요리를 하나도 해 먹을 수 없다 해도, 너는 소중하다고. 너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일을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돼.”
[이진숙 해냄출판사 편집장]
벚꽃, 다시 벚꽃 미야베 미유키 지음
삶 다독여주는 ‘미야베 월드’ 대표작
‘미야베 월드’ ‘온다 월드’ ‘톨킨 월드’…. 이름 뒤에 ‘월드’가 붙는 작가들이 있다. 그 작품 세계가 워낙 놀랍고 방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뜻으로 독자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지만, 내 스스로가 미야베 월드와 온다 월드 주민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혹은 인정)하고 있다. 종종 신간 소식을 놓쳤을까 봐 괜히 한 번씩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작가의 이름을 쳐볼 정도다.
올 상반기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이다. 미야베 월드는 마치 일산이 동구와 서구로 갈리듯, 현대물과 에도시대물로 나뉘는 듯하다. ‘화차’ ‘이유’ ‘모방범’ ‘솔로몬의 위증’ ‘형사의 아이’ 등이 현대물이라면, ‘맏물 이야기’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흑백’ ‘안주’ 등은 시대물이다. ‘미미 여사’의 책을 잡으면, 일단 책을 펼치기도 전에 ‘무엇을 썼든 재미없을 리가 없지’ 하는 든든함이 차오른다.
책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치 트렌디하게 각색한 퓨전사극처럼) 캐릭터나 정서가 꽤 현대적인 느낌이다. 주인공 쇼노스케는 유약하고 소심한 데다 숙맥에 숫기도 없는 하급 무사, 즉 초식남 스타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뇌물을 받았다는 (위조된) 수취증서가 발견돼 할복으로 끝내 목숨을 끊는다.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쇼노스케는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나 에도의 쪽방촌으로 들어와서 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자’지만, 마치 요즘 미드(미국드라마)처럼 그 안에 몇 편의 에피소드들이 있다. 자작극 납치 소동, 행방불명된 아내, 몸의 절반이 붉게 멍든 묘령의 단발머리, 암호로 적어놓은 기나긴 짝사랑, 오물 같은 속세의 독을 이야기책으로 토해내는 사람 등등….
쇼노스케는 대서소에서 필사 일을 받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인쇄기가 없던 시대에 사람 손으로 베껴 책을 만드는 작업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호화로운 입체그림을 베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 이름은 빨강’의 세밀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쇼노스케가 일종의 구황록(救荒錄)인 ‘도비안일전’을 베껴 쓰며 ‘이런 책은 삯을 덜 받더라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약간은 교조적으로) 투지를 불태울 때, 왠지 모를 동료애(?)가 느껴져 혼자 감격했다.
다양한 에피소드 속 가족의 진정한 의미 탐구
책 뒷면에 실린 저자 인터뷰 한 토막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짚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가족 문제를 의식하게 된 것은 동일본 대지진 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를 돌아보자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였다.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만능의 묘약은 아니다.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피를 나눴다는 속박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소중한 걸 잃은 건 아니라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초식남이랑 단발머리가 사귀었는지, 아버지의 결백은 밝혔는지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가족이 만능의 묘약도 아니고 세상의 전부도 아니’라는 걸 알면, 가족에게 사랑은커녕 상처와 고통만 받았더라도 스스로 힘을 낼 수 있다. 가족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 따위, 혹은 가족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해졌다는 푸념 따위는 가볍게 털어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세현 쌤앤파커스 편집장]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경륜 돋보이는 원로 불문학자의 산문집
업무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 때문에 직장 동료와 함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앉아 고민한 적이 있다. 이미 밤이 늦었는데 더 붙들고 있어 봐야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해 우리는 내일 고민하자며 퇴근하기로 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이든 외부의 상황이든 조금 달라져 있겠지 생각하면서.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동료는 그런 경우에 쓰면 좋은 프랑스어 표현을 하나 알려줬다. ‘라 뉘 포르 콩세이(La nuit porte conseil)’. 직역하면 ‘밤이 조언을 갖고 있다’라는, 우리말로는 좀 이상한 말이 되지만.
원로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제목 ‘밤이 선생이다’를 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 프랑스어 표현이었다. 실제로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라 뉘 포르 콩세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표현의 우리말 번역으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이 산문집은 선생이 여러 해 동안 매체에 기고한 칼럼 등을 모은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오래전에 쓴 것부터 치면 30년가량의 글이 일상 단상에서부터 시사 칼럼, 영화나 시나 사진에 대한 소평론으로 볼 만한 글, 예술과 문학과 학문을 소재로 한 수필까지 넓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다양한 글이지만, 모든 사태 앞에서 조금 더 느리고 깊은 숙고를 권하는 선생의 성정이 일관되게 어리비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제목 아래 한 덩어리로 잘 안겨 있는 느낌이 든다.
책이 큰 공감과 경탄을 자아내는 데는 무엇보다 선생의 말하는 방식 혹은 선생의 생각과 글이 갖고 있는 결의 역할이 크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아주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 직접 살아 보지 않은 타인의 인생까지 깊이 이해하는 통찰과 경륜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선생의 글은 전혀 단호하지 않지만 매우 날카롭다. 어떤 경우에도 일도양단하지 않고 온유하고 섬세한 언어로, 정말 분리해서 들여다볼 지점까지 찬찬히 헤쳐 들어가며 우리를 이끈다. 어떤 칼이 그렇게 부드러운 동시에 예리할 수 있을까. 또 선생의 글은 어디에도 명령하듯 말하는 부분이 없는데도 반성하게 만든다. 다만 어떤 사태를 잘 그려내고, 그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각도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잘 갖지 못했던 시선이다.
간단히 한 편만 읽어 보면 이런 식이다.
통찰 녹아 있는 30여년간의 글 모음집
‘장옥이 각시의 노래’는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편이 종적을 감춰 과부 아닌 과부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사는 장옥이 각시가 날마다 언덕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사가 돈 있고 잘난 놈이 자기를 좀 데려가줬으면 하는 민망한 내용이다. 동네 사람들이 이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한다. 결국 이장이 나서서 마을 원로한테 묻자 그 원로가 말한다. “내가 요즘 귀를 좀 먹어서 그러는데 장옥이 각시가 노래는 잘 부르는가?” “노래야 일품이지요.” “그렇다면 됐네, 마을 사람들한테 나처럼 귀먹기 전에 그 좋은 노래를 많이들 들어 두라고 하게.” 예술이 왜 자유를 누려야 하는가. 비록 촌로라 할지라도 인생을 아는 사람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얼마나 열려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황현산 선생이 강연을 할 때 청중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데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느냐.” 선생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독서의 양은 시간이다.” 한 문장을 읽더라도 오래 머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다면 ‘밤이 선생이다’를 권한다. 독립적이고 비교적 짧은 글들의 모음이니 어디라도 펼쳐서 짬짬이 읽고 삭혀 보면 좋을 듯하다.
[강무성 열린책들 편집주간]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 아널드 새뮤얼슨 지음
헤밍웨이가 들려주는 인생 조언
“절대 샘이 마를 때까지 자기를 펌프질해서는 안 돼. 내일을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하네. 멈춰야 하는 시점을 아는 게 핵심이야.”
스물두 살의 철없는 작가 지망생, 혈기 왕성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젊은이가 찾아왔을 때, 대작가 헤밍웨이의 첫 충고가 이것이었다. 모두 다 쏟아붓지 말고 언제나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인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한 게 작가의 길 아닌가. 그런데 정작 헤밍웨이는 멈출 때를 알고 멈춰야 한다는 것부터 알려준다. 헤밍웨이의 이 말이 작가 지망생들에게만 울림을 줄까. 아니다. 각자의 길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모든 이들에게 시원한 바닷바람 같은 깨달음을 주지 않는가.
얼마 전 출간된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멋진 여름휴가 같은 책이다. 훌륭한 보트를 빌려 드넓은 푸른 바다로 나갈 때의 두근거림, 마냥 한가로울 것 같았지만 파도와 싸우는 일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느끼게 되는 뿌듯함, 커다란 청새치와의 사투라는 모험, 이 속에 대작가가 풀어놓은 창작에 대한 노련한 가르침까지. 책에는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읽어보지 않은 이들이라 해도 기대되고 가슴 뛰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책의 원제는 ‘헤밍웨이와 함께 : 키웨스트와 쿠바에서의 일 년(With Hemingway)’이다. 저자 아널드 새뮤얼슨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22살 차이. 평생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미네소타대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지만 학위증 수수료 5달러를 내고 싶지 않아 공식적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를 하던 새뮤얼슨은 잡지에 실린 헤밍웨이의 단편 ‘횡단여행’을 읽고 그의 추종자가 된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를 찾아 플로리다 남쪽, 미국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 키웨스트로 찾아간다.
“내 배를 돌볼 사람을 하나 구하려고 해. 일은 많지 않을 거야. 자네가 그 일을 원한다면 아침마다 보트를 청소한다 해도 글 쓸 시간은 있을 거야. 당장 계획하는 일이라도 있나?”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의 비밀은 제대로 된 휴식
이렇게 시작된 둘의 만남은 1년 동안 함께 배를 타고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 위로 이어진다. 책은 새뮤얼슨이 헤밍웨이와 함께 낚시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배운 내용을 담고 있다. 단 1년의 경험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새뮤얼슨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어 그가 재능 있는 소설가였는지 아닌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독자의 눈앞에 헤밍웨이가 실제로 서 있는 것처럼 그 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헤밍웨이가 어떤 작가인가. 서문에도 나와 있듯, 그가 죽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거의 혈혈단신으로 문학과 이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놨습니다.” 20세기 인류 영혼의 한 부분을 만든 그가 젊은 작가에게 남긴 수많은 말들 속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비단 작가에게만 열정과 창작의 샘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주 단순한 일을 하는 이들이라 해도 어떤 이들은 그 일에서 남다른 재미를 찾고, 더 노련해지며, 다른 방법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제대로 된 휴식’이다.
제대로 된 휴식이란 뭘까. 이 책 구석구석에서 헤밍웨이의 말을 빌려 온다면 이렇다.
‘자기를 끝까지 소진시키지 않는 것, 꾸준히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그는 강조한다. 무엇보다 마음을 쉬게 하는 데는 낚시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고.’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편집장]
마음의 힘 강상중 지음
인생에 모라토리엄을 허(許)하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휴가는 꼭 필요한 리추얼(ritual·의식)이다. 그 신성한 시간에 동반할 단 한 권의 책을 택한다면 주저 없이 강상중 교수의 책을 집어 들 것이다. 그는 ‘믿고 볼 수 있는’ 작가다. 게다가 그의 책은 가볍다. 200쪽 내외의 문고판이지만, 지면에 그려지는 정밀한 생각의 궤적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우리를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이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마음의 힘’이다.
마음의 주인은 분명 나이거늘, 어쩐지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보다 막강한 무언가가 쥐락펴락하는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중심을 잃고 오락가락 휘청대기 일쑤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이 마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책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필요한 ‘마음의 힘’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풀어낸 인생론이다.
생산성·합리성에서 벗어나 보는 체험의 중요성
재일 동포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강상중 교수는 진지한 사유와 따뜻한 시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로 인생의 근원적인 의미들을 탐구해왔다. 그의 언어가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그 자신이 녹록지 않은 서사를 지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그의 아들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들의 죽음과 부재의 시간 속에서 그는 “슬프다는 것보다는 마음속이 텅 빈 듯한 무중력 상태”를 겪었다고, 서문에서 고백한다. 때때로 덮쳐 오는 격한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음의 힘’은 그 고통의 시간들을 건너는 동안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깨달은 인생의 수수께끼에 관한 이야기다.
전작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도쿄 산책자’에서 그랬듯 ‘마음의 힘’에서도 그는 인생을 둘러싼 시대와 마음의 관계를 밀도 높게 파고든다. 저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원한 내면세계인 ‘마음’ 안에 시대의 질병과 고민이 함축돼 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나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병들어 있으면서 개인더러 건강하게 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단일한 기준과 가치관만 존재하는 사회, 대안을 사고할 여유가 없는 삶, 끊임없이 불안을 유발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마음의 병을 치유할 의지도 기회도 갖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든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다 보니 출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자기소외와 극단적 단절을 택한다는 점이다.
강상중 교수는 병들어가는 사회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마음의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모라토리엄’을 권한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생산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 풍덩 뛰어들어 보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마음의 풍요로움, 건강함은 궁극적으로 ‘복수의 선택지를 상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생활의 기반에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설령 쓸모없을지라도 무언가를 충분히 해 보는 데서 얻은 만족감은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주며,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
이 책에는 100년 전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등장한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갔을지 저자가 상상해 그려낸 후일담 소설과 에세이가 독특하게 결합돼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낯설거나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100년 전 사람들이 앓던 마음의 병은 겉모습만 바뀐 채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사람에게나 지금 사람에게나 인생은 호락호락한 법이 없다. 그러니 미리 겁낼 필요도, 지레 포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마음이 중력을 되찾고 묘하게 의연해진다.
[신주영 21세기북스 출판개발실장]
해커와 화가 폴 그레이엄 지음
“오직 탁월함만이 자신을 증명하는 길”
‘해커와 화가’. 이상한 제목이다.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비로소 궁금증이 풀린다.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은 프로그래머이자 화가다. 1995년 세계 최초의 웹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인 비아웹을 만든 뒤 야후에 팔아 갑부가 됐고, 2005년에는 와이콤비네이터라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를 시작해 800개가 넘는 회사를 키워냈다. 드롭박스, 에어비앤비, 스트라이프 등이 여기를 거쳐 갔다. 프로그래밍 서적을 제외하면, ‘해커와 화가’는 이 독특한 사내가 출간한 유일한 책이다.
따로 발표된 글을 모은 걸 감안하더라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공부벌레(nerd)는 왜 인기가 없을까’ ‘해커와 화가’ ‘부자가 되는 법’ ‘창조자의 심미적 취향’ 같은 장 제목을 훑어봐도 마찬가지다.
로버트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리처드 세넷의 ‘장인(匠人)’, 윤석철 교수의 경영학책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IT와 사업을 한다는 것,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한 자기만의 견해를 직구로 던진다. 동시에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실질’을 깊이 파고든다. 색다른 통찰들이 넘실댄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와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에 가깝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에세이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해커(정통한 프로그래머)로서의 자부심을 어이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필요하기만 하다면 프랑스 문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딸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 중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 분쟁을 일으킬 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언들이 비일비재하다. 성공한 백인 남성답게 미국 자유주의 찬양은 애교고(“건국의 아버지들이야말로 해커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때문에 갖게 된 사회관은 위험할 정도다. 미적 상대주의도 풋내기의 헛소리로 치부한다(“디자인에는 좋고 나쁨이 있다. 해보면 안다”).
불편하지만 날카로운 업에 관한 통찰
대신 낯선 일에 용기 있게 뛰어들어 살아남은 자의 무용담을 만나게 된다.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시행착오를 거쳐 거대한 성공에 이르는 길을 실제로 걸어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확신과 통찰이 담겨 있다. IT와 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싶은 경구도 많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의 세계관이다. 사람들이 ‘실질’을 다루는 능력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이는 미적감각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아름다움은 훌륭한 구조의 반영이다”). 이 능력에 맞는 보상을 줄 수 있는 사회는 전체의 부(富)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 경쟁자나 사업모델 따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혹은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에 집중해 새로운 것을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일의 본질이라는 것 등. 즉 우주는 수준이 다른 존재들로 이뤄져 있으며 여기에 평등 같은 건 없다는 것. 오직 탁월함만이 세상에 자기를 증명하는 길이라는 것. 가차 없는 업(業)의 도(道)를 말한다.
일에서 탁월함을 얻고자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익사 중인 사람에게 추천한다. 글이 맵기 때문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 동동거리는 이에게도 추천한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눈을 준다.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하고, 대체로 행복하며, 남들에게 사람 좋다는 소릴 듣는 이야말로 꼭 봐야 할 책이다. 잘못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해 민음사 편집부장]
[정리 : 노승욱·류지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15호 (2015.07.08~07.1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