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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18 - 중남미 마야문명의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등이 스패인에서 독립하다!
콜럼버스는 700여년간 스페인을 다스리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카스틸랴의 여왕 이사벨
1세의 지원을 얻어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카디스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해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쿠바 북쪽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으며 콜럼버스는 자신이 상륙한
곳이 아시아의 인도로 알았지만 1503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사벨 1세는 레콘키스타 이후 지중해 무역은 오래전 부터 오스만 투르크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인 제노바와 피사 및 베네치아등이 독점해 왔고, 게다가 이웃 포르투갈이
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보고는 신항로 개척이 스페인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쿠바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가 쿠바 총독령으로 통치하였는데 디에고는 1493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에 따라왔고 1503년에는 히스파니올라를 정복하는데 참여했으며,
1511년에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럼버스로 부터 총독에 임명되면서 쿠바를 정복
하라는 임무를 받아 에르난 코르테스와 함께 4척의 배와 300명의 병력으로 쿠바에 상륙합니다.
노예를 사냥하던 페르난데스가 유카탄반도에 금이 많다고 하자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7년
부관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는 유카탄 반도를, 조카인 후안 데 그리힐바에게는 멕시코만
해안을 탐사하게 했으며 1518년에 부관 에르난 코르테스를 원정대 지휘관으로 임명해 멕시코
본토를 정복하게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 코르테스가 독립하려고 한다고 의심해 이를 취소 합니다.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9년에 무단으로 아즈텍 제국(멕시코) 으로 출정한 에르난 코르테스를
2차례나 체포하려고 했는데.... 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마주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소규모의 병력
을 규합해, 스페인군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인 스페인
군대를 설득해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병력보충을 한후 2차로 아즈텍제국으로 쳐들어 갑니다.
아메리카에 상륙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게로니모 데 아귈라르”를 구조했으며,
신대륙을 정복해 금을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는 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에 금을 갈취하면서 유카탄 반도를 헤집고 다닙니다.
그러던 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되니.... 아귈라르 신부는 스페인어
와 마야어를 알았고, 말린체는 마야어와 나우아틀어를 알았기에 이후 코르테스 원정대는
"코르테스 ↔ 아길라르 ↔ 말린체 등 마야인 ↔ 멕시코 원주민" 의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1. 마야 문명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 에서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 이며 탄생- 성장- 쇠퇴-
붕괴의 과정을 거쳐 순환한다고 했는데.... 23개 문명 중에서도 6개 문명은 원시사회에서
스스로 발생했다고 말했으니, 훗날 사람들이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에 중국 문명을 4대 문명이라고 말하게 된 시초가 되었습니다.
토인비는 일본은 중국문명에 영향을 받았으나 “서구열강의 도전에 응전” 해 독자적 문명으로 발전했다고
보았고, 한국은 중국 문명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말년에 한국의 “효(孝)” 사상과 “경로(敬老)” 사상
을 듣고는 감격해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사상' 이라고 극찬했다는데, 21세기 들어 한국은 경제성장
과 한류(韓流)로 한(韓) 민족의 융성을 이루니 2천년간 동쪽으로 흐르던 문명이 이제 서쪽으로 흐릅니다.
한국 문명이 독자 문명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거란족 요나라가 중국화 되지 않으려고 한자 사용을
억제하고 “거란 문자” 를 만들어 사용했듯이.... 조선은 먼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가 녹아있는
한자(漢字) 를 버려야 하니, 단어도 중국말인 산(山) 대신에 뫼, 강(江) 대신에 가람, 해(海)
대신에 바다로 쓰고 백두산은 흰머리뫼로 동해는 샛바다로 한강은 큰 가람으로 고쳐 부릅니다.
2천년전 중국에서 한자(漢字)가 들어오니 한(漢)나라 사람의 말에 밀려 사라진 우리말이 많으니, 동서남북을
뜻하는 말을 잊어버렸는데 혹자는 동풍은 샛바람이고 서풍은 하늬바람이며 남풍은 마파람 북풍은 된바람
이며 또 “내일(來日)” 에 해당하는 우리 말도 잊어버렸는데 누구는 “하제” 라 말하며, 석양은 저녁놀, 여명
은 동트는 아침으로 쓰는등 조선 조정에서 매일 매일의 승정원 일기 부터 한자 대신에 “한글을 전용” 합니다.
조선은 천주교를 탄압했으니 신해박해 - 신유박해 - 기해박해 - 병오박해- 병인박해로 이어지면서 프랑스인
20명 신부와 수만명 기독교도 조선인을 잡아서 고문하고 무자비하게 처형한지라.... 1866년 프랑스가
문책한다며 쳐들어오니 병인양요로, 1840년 아편전쟁에서 하늘같은 상국 청나라가 패한 사실에 비추어
세상이 변했으니 프랑스와 전쟁할게 아니라 화의를 한 후에 문호를 개방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에 주자 학문인 유교 성리학을 버리고 대성전을 없애며 천주교를 허용하, 선비들의
평생의 꿈인 유교경전으로 치르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청년을 프랑스에 유학 보내 관리로
임용하며, 반상의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퇴계 이황이 자식에게 노비 367구를 물려주었듯
사대부 양반들의 주요 재산인 "노비를 해방" 하며 천민제도를 폐지하고 5백년간 이어진
과부 재혼 금지제도를 철폐하며 왕실과 정부 회계를 분리하고 경찰과 법원을 따로 설치합니다.
또한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양반 지주들의 토지를 시세의 50% 에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해 10년
분할상환하도록 하고 지주들에게는 채권을 주어 서구문명 도입으로 세워지는 방직, 철도,
기계, 금속, 자동차, 화학과 조선업에 무역과 보험등 기업의 주식을 교부해 주주로 키우며 도로와
다리에 철도를 건설하고 재정을 출실히 해 서양 무기 도입과 서양교관을 채택해 군사력을 기릅니다.
유교 성리학(주자학) 대신에 가칭 선교(仙敎)나 단교(檀敎) 같은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체계화
하고.... 주역의 태극과 8괘등 음양오행론과 설과 단오, 추석 및 동지 같은 중국 명절
들을 과감히 버리고 5월에 삼한의 수릿날과 10월에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상달제 그리고 12월의 부여의 영고 같은 우리민족 고유의 명절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설날을 우리 고유명절로 아는 분이 많은데... 중국의 톱모델 류원(劉雯) 이 인스타그램에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전처 웬디 덩과 찍은 사진을 올리며 “Happy Lunar New Year (음력설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올리자 중국 누리꾼들에게 뭇매를 맞았으니.... 중국인들은
“Happy Chinese New Year(춘제에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써야 했었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설을 춘제(春節 춘절) 라고 부르는데 중국 누리꾼들은 “춘제는 중국인이 만든 명절이니 당연히
‘Chinese New Year’ 그러니까 ‘음력설’ 대신에‘중국설’ 이라고 써야한다는 것인데 동아시아에서 문자를
만든 나라는 중국인이 유일했으니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관찰해 한자(漢字)로 기록하고 누적된 자료
를 검토해 달력을 만들면서 음력 1월 1일을 춘제로 쇠었으니 이 설날이 이웃나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라?
중국의 연호 대신에 조선의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무력하고 비겁한
중립을 말할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처럼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적극적으로 청군과 협력해
조선군이 무력으로 조선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켜 쫓아내고는 황제국을 선포해서 중국, 일본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했었다면.... “한국 문명이 독자문명” 으로 인정받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원시에서 독자적으로 태어난 세계 6대문명 중에 하나 “마야문명” 은 메소아메리카
에서 기원전 2000년 부터 17세기 까지 3,800년에 걸쳐 번영을 누렸던 문명으로..... 멕시코 동남부
의 5개 주에서 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 부터 기원후 250년까지 이어진 선고전기에는 저지대의 대도시 엘 미라도르(El Mirador)
를 중심으로 책력(달력)이 만들어지고 마야 문화의 기틀이 잡혔으며, 250년 부터 9세기경 까지
지속된 고전기에는 티칼과 칼라크물 등의 패권국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처럼 도시국가들의 전쟁과 동맹이 이어지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데 “티칼”, 칼라크물 등
을 비롯하여 팔렝케와 우슈말, 우아삭툰, 코판 등의 대도시들이 연달아 등장하였고, 5천명에서 부터
10만명에 이르렀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피라미드와 사원, 석비들을 대규모로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벌목과 농경지 개간, 기후변화 등 원인들이 겹치면서 도시국가들이 연달아
쇠퇴하며 고전기는 끝나고 이후 살아남은 유민들과 북부 지방의 일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후고전기가 시작되는데, 후고전기에는 치첸 이트사나 마야판 등의
대도시가 등장해 마야 문명의 명맥을 이었으나 고전기만큼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13세기에는 최후의 대도시 “마야판”이 멸망했고, 중소 규모의 도시들도 얼마 가지않아 모두 쇠퇴
했으며 “멕시코의 아즈텍문명” 으로 대체되는데....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한
1500년대에는 “마야문명”은 거의 멸망한 상태였고, 1690년대에 마지막 도시 “노즈페텐
(Nojpetén)” 이 스페인 군대에게 함락당하면서 "마야 문명" 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현대인들이 남미 문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글 속에 묻힌 고대 유적의 이미지가 바로
“마야문명” 이니 이 마야 문명은 유카탄 반도 일대의 정글이 주요 무대였던 것에 반해 멕시코의
아즈텍이나 페루 잉카제국의 문명은 정글 보다는 건조한 사막, 고원 지대가 주요 활동 범위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달력은 정확히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에 만들어졌으니 이때가 마야 문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문명 최초의 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원전 3114년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이 시작되기 보다 천년 이상 전의 일입니다.
1) 선고전기 마야의 중심도시 엘 미라도르
마야인들은 기원전 2600년경에 벨리즈 지방에 처음 도달했으니 마야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매년 5월에서 11월까지 비가 퍼부으면 개울과 강이 넘쳐 강변의 낮은 습지대와
호수에 물이 고였으나, 2월이 되면 물이 그쳤고 다음 우기까지 물이 점점 귀해졌기
때문에 마야인들은 호수나 습지 같이 수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작은 마을들을 세웠습니다.
초기 마야인들은 밭을 가꾸고, 정글의 동물들을 잡아먹고 늪에서 먹을 것들을 채취하는 수렵채집 생활과
농경 생활을 병행했으니.... 옥수수나 호박, 콩, 카사바 등 다양한 채소들을 실험적으로 정글에서
길러보았고, 그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옥수수” 였기에 이후 마야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옥수수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작물이었으니 가뭄이 들면 시들었고, 새순은 적당한 비가
필요했고 가루받이가 일어나는 짧은 기간 약간의 빗물을 필요로 했는데, 몇달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저지대에 살던 마야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으니 마야인들은 옥수수
를 심는 시기를 건기가 끝나는 때에 잘 맞추어야만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농경과 날씨에 관련된 지식이 중요해지자 평등했던 마야 사회에서도 농사에 능하여 언제 어떻게
옥수수나 작물들을 심어야 할지 잘 알고있던 자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올랐고, 새 엘리트
계급은 날씨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평민들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니 지도자들은 비와
풍요를 불러온다는 구실로 거창한 제례를 위한 피라미드와 사원들을 쌓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들의 말을 듣고 사원을 쌓아 신에게 제물을 바친뒤 사제들이 명령하는 시기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으니 풍작을 얻을수 있었으니 마야인들은 이 권력층들에게 무언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흉작과 가뭄, 기근이 올까 두려워 복종했으니
기원후 100년경에는 마야 최대의 도시였던 '엘 미라도르 (El Mirador)' 가 등장합니다.
엘 미라도르는 기원전 600년에 건설되어 기원후 900년경에 몰락했으니 최대인구는 10만명
정도였으며 당시 최고 도시였던 엘 미라도르는 거대한 삼중 피라미드와 천문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68m 에 달하는 마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건물인 단타 복합단지를 짓기도 했습니다.
엘 미라도르의 마야인들은 피라미드를 포함한 건물에 두툼한 회반죽을 발랐는데,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숯을 지핀 가마에서 대규모의 석회암 덩어리를 고온으로 가열했으며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나무가 필요했고, 도시 인근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 나무들이 사라지고
비가 내리면서 농사에 필수적인 부엽층이 쓸려내려가 버리자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멸망합니다.
2) 마야 고전기의 티칼(Tikal)과 경쟁국 칼라크물(Calakmul)
고전기 초기에는 멕시코의 군국주의적 대도시였던 테오티우아칸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는데,
얼마 가지않아 망하면서 마야인들의 시대가 돌아오니 이미 선고전기 시절부터 번영했던
저지대의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고전기의 대도시들을 능가하는
영광을 재현하면서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며 전쟁을 벌이고 무역을 하며 부를 쌓아나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었다면 마야에는 티칼과 칼라크물이 있었으니 두 국가들은 서로
견제하면서 동맹 도시들을 규합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마야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우슈마신타 강 인근의 팔렝케, 최남단에 자리한 코판, 페텐 분지의 우아삭툰 등이 있었으며, 40여개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몇백개 소규모 도시들과 촌락들이 점점히 흩어져 서로를 견제하거나 협력했습니다.
562년, 전투적인 강대국 칼라크물이 인근 도시국가 카라콜의 힘을 빌려 티칼의 와크 찬
카윌 왕을 꺾는데 성공했으니 티칼을 약탈한 다음 포로로 잡은 왕을 처형하였고
칼라크물은 마야의 유일한 패권국으로서 화려한 번영을 누렸으니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전기의 초기와 후기를 구분하니 '티칼 히아투스 (Tikal Hiatus)'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티칼은 682년에 자소우 찬 카윌 1세 대왕이 즉위해 칼라크물을 공격해 함락하는 데에 성공해
120여 년만에 암흑기를 끝내고 부활했으니 티칼은 칼라크물의 몰락후 마야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며, 6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2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인 키니치 하나브 파칼 역시 이 고전기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던 팔렝케의 국왕이었습니다.
8세기경부터 소빙하기 때문에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인구가 급감했고, 지속적인 내전과 환경파괴,
가뭄등 원인들이 두루 겹치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이 한꺼번에 몰락하기 시작했으니 마야 문명의 중심
남부 저지대 대도시들을 버리고 떠나는 유민들이 발생했으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티칼이나 코판,
도스 필라스등 도시들은 버려진채로 정글의 어둠 속에 묻혔으며 무역은 끊겼고 모든 것이 잊혀졌습니다.
8세기 중반 칸쿠엔은 주변 국가와 혼인동맹으로 우호를 끌어낸 타지 찬 아크의 치세 아래 마야의
중심도시로 떠오르는데, 770년에 지어진 마야 최대의 궁전(2만 3,000m² 의 넓이에 200개의
방) 이 그의 치세에 지어졌으나 후계자 칸 마악스(Kan Maax)는 주변국들의 분란에 휘말려
죽자 교역의 핵이었던 칸쿠엔이 붕괴하고 각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마야는 쇠퇴합니다.
3) 후고전기 초기 마야의 중심 치첸 이트사와 마야 최후의 대도시 마야판
3세기부터 9세기까지 600여년에 걸쳐 마야문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고전기의 도시들이 몰락한후
북쪽으로 피난간 난민들과 세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문명의 명맥을 이어
갔으니 10세기부터 15세기를 후고전기라 하는데 치첸 이트사가 마야 문명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치첸 이트사는 7세기에 등장해 코바와 약수나 등의 도시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불렸고, 마야의
북부 저지대 지역을 통합하면서 헤게모니를 쥐었는데 13세기경에 인근 대도시 마야판에
정복당해 약탈당한 뒤 사람들에게 버려지니 마야판은 치첸 이트사의 왕족들을 참수
하였고 이후 치첸 이트사는 기억 속에서 잊힌채로 정글의 두터운 나무들에게 잡아 먹힙니다.
마야판은 한때 치첸 이트사의 속국이었으나 1221년 즈음에 치첸 이트사의 왕과 귀족들의 학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세운 도시국가로, 치첸 이트사를 무너뜨린후 온두라스와 벨리즈 지방의 북부
유카 반도 대부분 지역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마야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습니다.
마야판의 통치는 144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1441년 한 대귀족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마야판을 약탈하고
불지른채 방치했고, 마야 문명의 최후 대도시 마야판마저 몰락하면서 마야의 대도시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마야 문명은 1500년 경에는 대부분의 사회구조나 도시들이 붕괴해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1500년대에 유카탄 반도로 진입해 들어왔을 때에 마야문명의 도시
들은 이미 망해있는 상태였고, 폐허나 유적들도 정글과 초목에 침식당하면서 찾아보기 조차
힘들었으니 그나마 남아있는 소도시이자 마야인들의 최후의 보루였던 도시 노즈페텐이
1697년에 스페인 제국 군대에게 함락당하면서 마야 문명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만 스페인인들이 침략했을 때까지도 마야 문명의 기록은 상당수가 남아있었고 마야 문자를 읽을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당시의 일부 스페인 학자들은 마야 문자와 그 발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그러나 남은 마야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죽었고, 나머지도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희생되면서 마야 문자를 읽는 법 등은 완전히 잊히게 되었고 기록
대부분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워졌으니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겨우 4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실물로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으니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
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만은 아닙니다.
수십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시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렝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니 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 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6만
개 건축물이 있는 상주인구 20만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되었으니 연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2. 과테말라
과테말라라는 이 나라의 국명은 '나무의 땅' 을 의미하는 마야어 K'iche' 에서 왔다고 추정하는데 K'iche'
와 같은 의미의 나와틀어 Cuauhtēmallān 가 변하여 과테말라(Guatemala) 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야 문명은 멕시코 남부에 많이 지분이 있어 멕시코 문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잉카 문명이 페루, 에콰도르
와 칠레, 콜롬비아, 볼리비아 심지어 북부 아르헨티나까지 공유했던 것과 같이 마야 문명도 멕시코
남부는 물론 이 나라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벨리즈, 온두라스, 니카라과가 공유하던 문명에 속합니다.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후 잠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함께 멕시코
제1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구성했으나 1838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별개 국가로 독립했지만 이후 미국이 끼어들며 이권을 챙겼는데
미국은 발 밑에 있는 이 나라를 우습게 보고 보호국으로 여기며 이것저것 마음대로 했습니다.
심지어 1940년대에는 미국이 현지 주민 5,500여 명에게 매독 생체실험을 한 적이 있을 정도인데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과테말라 정부는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중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생체 실험을 버젓이 한 행동인지라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51년에 토지개혁을 공약하고 당선된 민주정부로 인해 미국계 과일회사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의 이권이 빼앗길 것을 우려한 CIA는 군부세력을 지원하여 민주정부는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 나라의 쿠데타 실상을 보고 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해 본격적인 환멸감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과테말라 내전이라 하는데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전에
시달려야 했으며 시작부터 과테말라에서 뭐든 맘껏 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이 자기네
국적 식품회사 이권 지키려고 시작한 쿠데타가 뿌린 씨앗이었으며 그런 만큼 더 처절했습니다.
민주파는 합법적 선거로 얻은 권력을 되찾아야 했고 유감스럽게 미국이 지원한 군부는 민주파에 권력
을 주고 싶지 않았으며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의 힘이 쎘으니 과테말라
내전이란 군부 출신인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1951년에 혁명 행동당에서 대통령으로 당선 됩니다.
농지개혁(유상매입) 등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문제는 과테말라에서 대규모 플렌테이션
을 운영하던 미국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의 농장을 국유화하기도 했다는 점이니 아르벤스 정권
에 의한 사회주의적인 개혁은 미국의 이익에 반(反)하여 당시 냉전 치하 인접국의 공산주의화
를 우려한 아이젠하워 정권은 아르벤스 정권을 공산주의 정권이라 간주하고 쿠데타를 시도합니다.
미국은 군과 정부 내부의 반 아르벤스파를 결속시킴과 동시에 CIA 에서 추진한 일명 "PBSUCCESS 작전"
으로 인접국인 온두라스에서 반아르벤스파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반정부군을 수도로 침투
시켰으니 군의 지지를 상실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실권하고 1954년 6월 27일에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 후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하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정권은 국내 기초를 다진후 선거
에서 아르마스파의 반공연맹만을 내세운 독재체제로 나아갔는데 이에 반발한 군 내부의
아르벤스파와 아르마스파가 대립하면서 아르벤스파의 청년장교들이 군을 이탈하여
반정부군이 되어 게릴라 활동에 나서면서 과테말라의 정국은 내전 상태로 접어들은 것입니다.
3.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마야문명의 동쪽 끝으로 코판에서 1500년이 넘은 마야 유적지가 발견되는데 16세기
콜럼버스가 온두라스에 도착한 이래 스페인의 침략을 받았으니 렝카족의 렘피라 등이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토벌되고 여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처럼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배 시기 온두라스는 자원도 부족하고 인구도 적어 낙후되어 있었는데 그나마 은을 캐서
경제가 유지되었으며 한편 영국은 모스키토족의 지원으로 동부해안을 점거하고 목재를 가져갔습니다.
1821년 온두라스는 중미 연방의 일원으로 독립을 선언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로스알토스와 함께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1823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일원으로
독립했지만 중미연방은 20년도 못 버텼고 1838년 온두라스가 독립을 선언하고 연방은 와해되었습니다.
독립 이후에도 온두라스는 1876년까지 82명이 권력을 잡았고 수백건의 내란이 발생했으며 1876년
이후에도 혼란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나 온두라스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바나나 농장과 광산을
외국에 개방했으니 외국 바나나 회사는 철도 부설권까지 따냈고, 정권에 붙어 타 산업을 통제했습니다.
한편 온두라스의 이웃나라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 면적의 5분의 1에 불과한 소국이었으나 인구는
서로 비슷했으니 땅이 부족한 엘살바도르인들은 일을 찾아 온두라스로 건너왔는데 온두라스
에서는 1963년 기업이 외국인을 10% 이상 고용하지 못하게 했고 1968년 엘살바도르
인들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으며, 결국 1969년 갈등 속에 그 유명한 "축구 전쟁" 이 일어납니다.
1972년에 군부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198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로 빈부격차도
날이 심화되는 추세이며 온두라스에 있는 미군기지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전선을 반대하는 콘트라 반군 기지로 이용되었는데 당시 오요 대통령은 이들의
온두라스 주둔 금지를 공약했으나 미국을 등에 업고 있던 반군들이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4. 니카라과
스페인의 침입으로 식민지가 된후 대농장주들이 원주민을 노예나 소작농으로 부려 생산물을
수출하는 형태로 식민지 운영이 이뤄졌으니 유럽인들의 이주로 천연두와 황열병
같은 감염병이 퍼지자 강제노동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고, 노동력이 부족해진 백인 농장주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대거 수입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페인이 자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니카라과와 제3국의 무역을 금지하자 농장주
들은 이에 반발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니 1821년 니카라과는 타 중미 국가처럼 보수주의자
들이 멕시코 제국의 한 부분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했다가 1823년 멕시코에서 떨어져 나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과 함께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구성합니다.
1838년 니카라과는 다시 중미 연방에서 독립하는데 영국은 이 무렵 니카라과 동해안을 장악했으며,
북부 레온 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 중심의 보수주의자의 대립이 계속되어 내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용된 미국인 백인 용병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 가 황제 노릇을 한 적도 있었지만 군벌들에게 밀려 쫓겨났고 보수주의자들이 집권합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니카라과에서 커피 산업과 바나나 산업이 나타났는데, 이들 신흥 소지주들이
감히 대지주들 땅을 뺏을 순 없었으니 원주민 땅을 빼앗자 염료와 목축을 하던 대지주들도
커피와 바나나 재배를 시작했으니 1890년대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 정부는
교회의 땅을 뺏어 커피 농장으로 만들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의 지원을 요청해 미군이 파견되어 니카라과는 19년간 미국의 간섭을 받았으니
산디노가 이에 저항해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 의해
죽었고, 국방군의 가르시아가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으며 암살당한 후에도 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 와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가 연달아 니카라과의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었으니 소모사 족벌의 영향력
이 강해지자 기존의 기득권층은 위협을 느꼈고 소모사가 1972년 대지진 때
받은 지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자 소모사에 대한 불만은 더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1978년 소모사가 자신에 반대하던 유력지 《라 프렌사》의 페드로 차모로를 살해하자 반
소모사 운동은 더욱 강해졌으니 1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혁명전쟁이 발발했고 1979년
마침내 소모사 일당이 해외로 망명을 감으로써 혁명은 성공하여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산디니스타 혁명정권은 국방군을 해체하고 혁명에 참여한 정당 및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국가재건위원회
를 구성해 토지 개혁과 국유화 등을 시도해 GDP 의 41% 에 달했던 소모사 일당의 소유 재산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1년만에 문맹률을 50%에서 13%
로 떨어트렸으며, 전국적인 의료보건제도를 도입하여 영유아 사망률을 떨어트리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니카라과에서 경제재건을 위해 쿠바와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니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권에 반발했고 1982년
제재조치를 취해 세계 최대 바나나 회사가 니카라과를 떠나 큰 타격을 주었으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이라 불리우는 뻘짓을 감행했는데, 산디니스타를 엎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밀수출까지
하면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고 콘트라 반군이 현물세로 걷은 코카인까지 미국이 맡은 것입니다.
한편으로 미국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소련과 쿠바, 불가리아의 지원이 이어졌는데 그러나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도 군사비 부담이 커져서 추가로 전선이 늘어나는걸
부담스러워해 소극적으로 지원하는데 그쳤고, 쿠바와 불가리아 모두 당시 공산권에서
국력 규모가 큰 나라는 아니었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보탬은 못 되었습니다.
5.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는 밀림으로 덮여 있는지라 타 중미 국가보다 더 낙후되어 있었고 원주민들의
저항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에스파냐 식민 통치자들도 빈곤에 시달렸는데
1821년에는 멕시코의 일부로 스페인에서 독립하다가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일원으로 독립하였으며 1838년에는 중미 연방에서 독립하였습니다.
1864년에도 인구가 12만명에 불과했으니 코스타리카 초대 대통령 카리요는 자유주의적인 정책
을 폈으며, 1870년대 과르디아의 독재를 겪기도 했으나 다른 중미 국가보다 혼란은 덜했으며
과르디아는 바나나 농장을 세우고 커피 수출을 위해 미국 기업에 철도 부설권을 넘겨 주었습니다.
이후 군부 독재와 민정이 연달아 이어졌고, 1930년대엔 공산주의가 득세하자 1936년 선거
에선 커피 경작자들에 의해 반공 및 친나치 성향의 코르테스가 당선되기도
하였으니 1940년 집권한 과르디아가 복지국가 전환을 시도하였으나그는 얼마 안가
인기를 잃었고, 1944년 그의 측근 피카도가 대통령이 되자 부정선거로 규탄 당했습니다.
사민당 피게레스 페레르가 반정부 봉기를 주도해 수도를 장악 코스타리카 신헌법이 제정되어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고 군대가 폐지되었는데 페레르는 1953년 대통령이 되었으며 반독재의 기치를
들었으며 주산업이던 바나나 산업에서 이익 배당률을 10%에서 30%로 늘렸으니 인구도 400만
으로 늘었고 백인이 다수이며 정치가 안정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생활 수준도 가장 높은 편입니다.
6. 파나마
입지 조건을 보고 스페인에서는 이주민들을 보내 인프라를 개척하려 했으나,모기가 창궐하는 자연 환경
때문에 유럽인 정착자들이 대부분 죽으면서 손을 뗐고 19세기 콜롬비아가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면서 그란 콜롬비아 가맹국인 콜롬비아의 주(州) 로 함께 독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콜롬비아 육지 본토와 붙어있으면서도 정글에 격리된 지역적 특성과 콜롬비아
본국 정부에 식민지 같이 착취당하던 터에 종종 분리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대부분
콜롬비아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했는데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중남미로 영향력 확장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거점으로서 파나마를 주목하였습니다.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에 파나마 운하 착공을 위한 자금을 제시하고 사업에 착수하려 했지만 콜롬비아
상원이 대가를 더 요구하며 거부하자 미국은 방침을 바꿔 파나마 지역의 토착 영주들이 콜롬비아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사주?) 이를 후원했고 나중에는 미군을 파견하여 파나마
독립군과 함께 파나마를 1903년에 콜롬비아로부터 분리독립시켜 독립국가로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은 파나마 정부로부터 운하착공에 대한 전권, 운하의 운영과 관리권, 보호를 위한 군대 주둔에 관한
협정까지 일사천리로 맺고 착공에 들어가 1914년에 파나마 운하를 개통시켰으니 이 일대를 '파나마
운하 지대' 라 하는데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의 항로가 획기적으로 단축되는 쾌거가 이루어졌습니다.
파나마 운하 공사는 수에즈 운하를 완성한 프랑스인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이미 계획한 적이
있었지만 지독한 열대 더위와 막대한 사업비, 그리고 무엇보다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들의 습격
을 인부들이 견디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는데 파나마는 말라리아 매개체를 개미라고 알아 애꿎은
개미를 잡겠다고 침대 다리를 물그릇에 담궈놓는 등의 삽질을 해서 모기가 더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9년이나 시간을 들여 막대한 돈을 날린 이 운하공사의 대실패로 레셉스는 파산했고 그는
정신이상까지 겹쳐 늘그막을 비참하게 지내며 사망하였으며 그로부터 20년쯤 지나서
말라리아 매개체가 모기라 밝혀졌고, 공사를 맡게된 미국은 착공에 들어가자 프랑스
측의 대실패를 교훈삼아 모기가 살만한 곳은 죄다 없애버리는 것으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할 시설을 건설하고 건물마다 살충제를 쌓아놨으며 모기의 번식처가 될만한 웅덩이
는 죄다 메꿔버리고 늪지와 연못에는 석유를 뿌리는 철저한 방역 작업을 하여 모기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는데 하지만 늪지대에 석유를 붓는다는 막장 방역법 탓에 애꿎은 다른
동식물까지 몰살당하여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면서 파나마는 다른 면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파나마 운하의 권리는 사실상 영구 임대나 다름없어 미국은 파나마를 속국처럼 마음대로 다뤄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파나마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던 것은 아니고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까지 독재자가 수십년간 통치하던 기간도 있었는데, 1960년대 이후 중남미에서도 민족주의의
열기가 고조되자 파나마에서도 운하에 대한 이권을 회수하려는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습니다.
운하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운하에 대한 문제는 파나마 전체의 사활을 건
이슈였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예전처럼 무력진압 따위를 할수 없었던 미국은 어쩔수
없이 1977년에 오마르 토리호스와 협상하여 파나마 정부에 운하에 대한 모든 권한을 반환
하기로 약속했고, 1999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운하의 소유권이 파나마 측으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파나마에는 지금도 많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1989년 12월에는 마누엘
노리에가라는 파나마 장군이자 대통령을 마약 밀수 혐의로 군사 작전을 벌여 미군을
보내 체포하는 일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 지역에서의 이권 문제에 미국이 얼마나
민감한지 잘 보여주는데 1994년 10월 개헌으로 코스타리카처럼 군대를 폐지하였습니다.
7. 도미니카
1492년 콜럼버스가 가장 먼저 발견한 신대륙은 쿠바, 바하마와 푸에르토리코 및 이 섬인 히스파니올라섬
이며 2차 항해에서 멕시코 동부 유카탄과 베라크루즈,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를 발견했고 3차 항해에서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그리고 기아나 연안 등을 발견(?) 했습니다.
초기 스페인 점령 당시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토착민인 타이노인이 살고 있었으나 15세기 스페인인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점령된 이후 거의 사라졌으니 원래 50만명의 원주민 인구는 16세기
중반에는 수천명까지 줄어들었으며 곧 이마저도 사라졌으니 이후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는데 다만 백인이나 흑인과 피가 섞인 혼혈 타이노족들은 아직 현존합니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사탕수수 농장이 세워졌으나 스페인은 금과 은이 풍부한 남아메리카에 더
관심을 가졌으니 페루-볼리비아 일대에서 엄청난 금, 은이 산출되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페루 부왕령
쪽 경영에 주로 매진했고 그 다음은 역시 은이 풍부하게 나던 멕시코의 뉴스페인 부왕령 쪽이었습니다.
18세기 들어 이 섬의 서반부는 프랑스인들에게 점령되어 훗날 아이티로 독립을 하게 되며 스페인령으로
남은 동부(도미니카)는 여전히 별 볼일 없었으니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해 부려먹는 처지라
한마디로 소 치는 스페인 식민지 동부와 플랜테이션으로 풍요로운 프랑스 식민지 서부로 나뉘었습니다.
1795년 바젤조약으로 히스파니올라섬 동부 스페인령도 프랑스에 넘어갔는데 1804년 아이티가 독립한
이후에도 프랑스군은 동부에 주둔해 있었으니 스페인은 영국과 합세하여 동부 도미니카를 탈환해
1809년 다시 스페인 치하에 들어갔으며 그 후 1821년 스페인령 아이티 공화국이라는 이름
으로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했지만 바로 서부에 자리한 아이티가 이곳 동부를 침략해 지배 하였습니다.
이후 22년간의 아이티 지배를 받았고 1844년에 독립하였는데 이후 1856년까지 아이티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으니 이러한 역사 덕분에 이 나라는 아이티 하면 이를 갈며 아이티와의
경제력, 국력이 역전된 지금은 도미니카인들이 대놓고 아이티인들을 짐승 취급하며 무시합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스페인이 도미니카를 재점령하기도 하였고, 1930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대통령이 50번 바뀌고 쿠데타가 30번 일어나는 대혼란이 일어났으며 1869년, 도미니카 대통령 부에나
벤추라 바에즈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거액의 부채를 지고 있는 도미니카를 미국이 합방해줄 것을
요청하니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또한 도미니카 합병론에 동조하였으나, 미 상원에서
합방에 필요한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했으며 1916년부터 1924년까지 미군이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8. 자메이카
1494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지 2년 만에 알려진 곳으로 스페인인들이 잠시 점령하였다가
1655년 영국이 점령하여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대항해 시대나 17~18세기를
다룬 카리브해 해적 게임이나 영화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영국의 포트로열이 바로 이섬에 있습니다.
포트로열항이 현재의 수도인 킹스턴 항구이며 1962년에 영연방 왕국의 일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다른 영연방 왕국의 총독들처럼 자메이카의 총독도 영국 의회가 추천한 영국인이니
패트릭 앨런 총독도 자메이카 포틀랜드에서 영세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메이카 토박이 입니다.
국가원수는 자메이카 국왕 찰스 3세이나, 자메이카 총리가 실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총독은 영국
왕의 임명을 받은 국왕의 대리인으로, 영국왕 대신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고, 대변인 역할도
일부 수행을 하여 총리의 정책을 국민에게 발표하는 등 의전상의 역할을 주로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