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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조창나루터 원문보기 글쓴이: 태금 이미숙
■ 근촌 이상술 추모 특집 자료
1. 선생의 출생과 교육, 성장배경과 출생지의 산수, 성장기의 일화
근촌 이상술은
1927년 2월 17일 전남 나주군 다시면(多侍面) 복암리(伏岩里) 766번지에서
아버지 이호곤(慶州)과 어머니 전양순(天安)의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6대 종손이다.
선생께서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강암마을은
가마산의 서쪽 봉우리(170미터) 서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그미 북쪽으로 국도 1호선과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다시역’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흘러 일찍이 농사가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호남평야를 대표하는 넓은 농경지와 복암리의 고분은 그 유구한 역사를 일러 준다.
이 마을이 형성 된 해는 1750년이며
1820년경 경주 이씨가 나주시 오량동에서 이사와 터를 잡았다.
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남쪽이 아랫대미,
북쪽이 웃대미,
그리고 웃 대그미와 새그미로 나뉘어 있다.
어릴 적 추억이 스민 정겨운 땅이름을 선생의 셋째 아들, 이순형은 이렇게 전한다.
구산, 동봉, 새그미, 옹구리매등, 산바실재, 짱아배미, 독다리, 함지배미, 성천걸, 냉시미들, 강암바위, 새샘, 뛰밭샘, 웃샘, 강담샘, 앞샘, 큰재, 작은재, 설태, 방아다리, 붓샛 등.
성장기의 일화에 대하여서는 녹취를 할 만 한 곳을 찾지 못했다.
선생의 어린 시절을 기억 할 분들은 이미 황천의 객이 되어 있었으므로.
2. 선생의 시조입문 동기와 스승에 대한 기록
선생께서 시조에 입문하시게 된 동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로 근동인 목사골 향리에 박희성(朴希聖)선생께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촌 이상술이 19세 되던 1945년 8. 15일.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된다.
잔혹했던 일제 치하.
그 몸서리 쳐지는 시절에 하루하루를 한량으로 소일하던 박희성.
그 박희성 선생께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근동의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시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당연히 충정우국의 애민 정신으로.
그랬으니 그 내용이 어떠했겠는가.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 속에서 풀려난 국민들의 정서를 자극하기에는 시조창이 제격이었으리라.
그가 수학했던 시조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 1945년(19세) : 박희성에게 시조창 사사.
- 1947년(21세) : 나주의 가객 박남규(朴南奎)에게 시조창 사사.
- 1954년(28세) : 광주국악원 안치선(安致善)선생으로부터 시조창 및 단소 사사.
- 1960년(34세) : 유종구(柳種九)선생으로부터 시조 사사.
- 1963년(37세) : 정경태(鄭坰兌)선생으로부터 가곡, 가사, 시조 사사.
3. 시조를 하시면서 선생이 겪으셨던 애로나 좌절, 기쁨과 보람은?
근촌 선생의 부친께선 근동에까지 엄하기로 소문이 난 어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셨기에
언제나 사랑채에 손님 끊길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토록 손님의 래왕이 잦던 사랑방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발길이 뜸해 졌다고 하는데,
선친께서는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가셨던 것이다.
만약 그 선친께서 더 오래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의 근촌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선친의 바람은 오직 당신의 장남으로 하여금
영산포 평야에 너부러진 옥토를 돌보며 대농의 살림살이를 꾸려 갈
대농부로 키우고 싶었던 까닭이다.
시조는 취미정도로만 읊조리고.
그런데 그렇게 엄하기만 하시던 선친께서 돌아가시자
근촌의 활동범위도 달라졌다.
타고 난 끼 덕분이었던지 그는 무엇이든 접하기만 하면 배터랑이 되더란다.
북도 장고도 시조도.
그 당시 그의 북 솜씨가 얼마나 뛰어 났던지
최전성기의 광주국악원에 주재 하시던 인간문화재 김성권씨나 한진욱씨같은
내로라하는 국악인들과 어금 버금 이었다니.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이어 터진 6.25 사변.
온 국토가 불바다가 되었으니 문화인들 온전했으랴.
밤과 낮이 수시로 바뀌는 긴박한 나날.
그 위태로운 생활 속에서도 그의 모친은 유달리 그를 생각하여
장손을 보호할 목적으로 광주로 피신을 시켰더란다.
일제 때 학도병으로 차출되기 싫어 학업마저 포기한 상태.
그런 그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시조창에 대한 열의는 식지 않더란다.
전쟁은 멎었으나 국악의 보존은 어렵게 되어 진 상황.
광주의 문화도 마찬가지여서 몇몇 뜻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당시.
맥 빠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즈음,
어느 날 박희성 선생께서 근촌을 불러 이르더란다.
“난 더 이상 자네를 가르칠 게 없으니 이제 떠나야 할 시기가 왔나 보네.
내가 다른 선생을 소개 시켜 줄 테니 거기에서 공부를 더 하도록 하게.”
그러면서 소개하신 분이 바로 문평면에 계시던 박남규 선생이시더란다.
4. 선생에 관한 에피소드
근촌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인 매정 김순경 선생의 이야기다.
“수업만큼은 얼마나 지독하게 시키던지...”
우선 한숨부터 쉰다.
그리고서 잇는 말.
매일 연습할 분량을 정해 주시곤 그것을 혼자 터득하라고 한단다.
그러면 죽을 듯이 옆방에서 고래고함을 지른단다.
별 짓을 해도 선생님께선 반응이 없으시더란다.
이 어른이 제자에게 공부하라고 시켜 놓고
정작 당신께선 딴 노름을 하시는가 싶어 잠시 딴전을 피웠더니
곧바로 몽둥이를 들고 쫒아 오시더라는 것이다.
두렵기도 하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선생님께서 내 소리를 듣고 있구나 싶어
한편으로는 고맙더란다.
무관심한척 하면서도 모든 관심을 기우리는 소상한 스승.
당신의 몸은 뒷전이고 제자들 가르치기에 혼신을 다 하는 열정만큼은
여느 스승 못지않았단다.
호랑이보다 무서웠던 선생이지만 수업만 끝나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아저씨였다는 게
김순경씨의 추억이다.
막내딸인 소정 이미화의 얘기도 들어 보자.
소정이 어릴 적,
아버지의 수업을 참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 세우고는 소리를 해 보라고 하시더란다.
얼떨결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읊조렸더니
당장 어머니께 이르시기를
“미화에게 시조를 시켜야 겠다”고 하시더라나.
그리고 그날 이후 어머니를 졸라 하는 수 없이 소정이 시조를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해금을 전공하던 때라 음감을 잡는 데는 유리 했었지만
그래도 직접 시조를 가르쳐 주는 법이 없었단다.
무조건 혼자. 어떻던 혼자서 터득을 하라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했단다.
그러지 않고선 아버지한테 매일 야단만 맞아야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단다.
귀여움과 사랑을 받아야 할 막내딸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그러니까 고기를 잡아 준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교육법인가.
5. 선생의 인생철학, 평소의 좌우명
[적당히는 없다]
이것이 선생님의 좌우명이다.
철두철미, 완전무결.
특히 시조에서는 더하다.
‘시조는 음치가 해야 해’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이유는 시조를 배우게 되면 음치도 치료가 된다는 말씀이시다.
과연 그랬다. 많은 제자들이 음치(音癡)를 넘어 음치(音治)를 했다.
그리고 칭찬을 많이 하신다.
“잘 했어”. “됐어”
이것이 선생의 18번이다.
어려운 시조를 배우려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하기 위함인 것 같다.
6. 선생의 시조에 대한 철학과 가장 좋아하신 시조는?
시조에 관하여 만큼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이 소중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우선 그를 증명하기 위해 시조 때문에 가산까지 탕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늘 가족은 뒷전이고 시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더란다.
가족보다도 당신의 신체보다도 더 소중하고 애지중지했던 게 시조였다.
선생의 애창곡은 [명년삼월]
7. 시조 이외의 재능?
단소연주와 판소리 북.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판소리 북 솜씨는
인간문화재에 버금갈 수준이라고 했었다.
8. 시조를 배우려는 초심자들에게 들려주시던 말씀
시조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보배 같은 유산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값어치를 모른 채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서양 문화에 제 자리를 빼앗겨 버린데 대해
분개 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었다.
시조창이란
문학적으로 표현되어진 ‘시조’를 음악적 율려에 맞춰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읽는 시를 입으로 읊으면서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선현들이 정가로서 인격을 수양했듯이 우리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시조창 부르기에는 규칙이 있다.
우선 음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음보에 맞춰 발음역시 정확하게 해야 한다.
음률만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면 그건 시조가 아니다.
자세도 마찬가지.
어떤 장소라도 시조창을 부를 때는 정좌를 해야 한다.
목을 움츠린다거나 창에 따라 몸이 움직여선 절대 안 된다.
눈조차 깜박이지 말라.
그것이 진정 시조를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특히 발음에 유의하고 어떤 경우라도 사투리를 섞어서는 안 된다.
의미 전달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발성법부터 익혀야 하는 것이 순서다.
대체로 이런 말씀들이었다.
9.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던 말씀
평소 과묵하신 성품이라 대체로 말씀이 적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잠간씩 유머를 즐기셨을 뿐 제자들에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10. 현재의 시조계나 후학들에게 들려주시던 말씀
현 시조계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수시로 말씀을 하셨다.
우선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시조창이야말로 선비들이 즐기던 고급문화다.
그런데도 최근 시조를 늙은이들이 읊조리는 옹알이 따위로 아는 사람들이 비일비재 하며
더군다나 젊은 사람들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으니 한심 할 따름이다.
이런 것부터가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져야 할 것들이다.
첫째, 지도층 인사들이 지나치게 노회(老獪)하다.
자신들의 영역구축에만 관심을 가진다. 기회만 있으면 분파도 불사하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어떤 분야던 기능은 세분화 시켜도 창구는 단일화 시켜야 힘이란 게 생긴다.
그 힘이 바로 세력이 되는 것이다.
둘째, 이론에 너무 취약하다.
시조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속가완 확연하게 다르다.
이론에 밝아야 한다는 뜻이다.
악보를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셋째, 검정을 필한 교과서가 없다.
예전에 교과서로 통하던 정간보 보다 석암보가 이해하기에 쉽다.
그러나 그 석암보도 변질되어 여러 갈래가 되어 버렸다.
정확한 보(譜)의 공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적으로 그 정확한 보를 바탕으로 한 공부라야
정확한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넷째, 교육체계가 미흡하다.
정부의 지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자체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시우회가 만들어 지긴 하나 제도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라
교육을 시킬 마땅한 장소가 없다.
선생이나 사범의 자질도 마찬가지다.
소정의 교과 과정을 이수한 자에게 자격을 부여 하여야 함이 원칙이다.
하루빨리 그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문제점을 피력 하셨으나
대부분이 공감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기에
이것들만 소개하기로 한다.
11. 시조를 저변확대 시키고 부흥시키려면?
우선적으로 행정적 지원이 필요 하다.
조기 교육적 차원에서 초등학교 교과 과정부터
시조창 부르기를 생활화 시키는 것.
그리고 엘리트층의 참여가 절실하다.
누구나가 알고 보면 좋아 할 수 있는 우리 문화인데도
일려지기까지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잦은 시조경창대회도 문제다.
명인이나 국창을 많이 배출시키기 보다는
진정한 지도자를 길러 그들로 하여금 시조의 부흥을 꾀하도록 권해야 한다.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의 명인부나 국창부 장원자들은 그 순간이 지나면 끝이다.
그래선 안 된다.
그들이야말로 첨단 전도사가 되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데 일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12. 선생의 공적들. 그리고 어록들
우리 시조의 역사를 들추면 선생의 공적은 혁혁하다.
우선 계보를 보자.
정수리는 최일원(崔日元, 전북 전주)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정경태(국가주요무형문화재 제 41호)와 이상술이 있다.
물론 이상술이 정경태로부터 가사와 가곡, 시조를 사사 받긴 하지만.
1968년 부산대회에서 ‘명인’을 획득한 이후 선생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가르치는 것은 물론, 각종 대회의 심사위원 자격까지 획득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전국을 돌며
우리 시조의 우수성을 알리는 한편으로
맥이 끊어 질 뻔했던 광주국악원을 박인천(독지가)씨의 도움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스스로 원장을 맡아 후학을 양성했던 것이다.
한때는 시조를 공부하는 회원이 무려 150여명이나 되었고
전국시조경창대회가 열리면 전국각지에서
대략 500여명의 인원이 몰려 성황을 이뤘단다.
평소의 소신이었던 시조창 보급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더 늦기 전에 젊은 학생들에게도 시조를 알리고 보급시켜야겠다는 포부로
전국의 사범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조연수회를 열었다.
숙식은 물론 온갖 경비는 다 무료. 당연히 사비였다.
특별히 어록이라고 들춰 낼만한 건 없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것은 추호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것과
철두철미한 자기관리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전부다.
13. 현재 시조계에서 활동하시는 선생의 제자들과 그 활약상들
선생의 제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공주 백제문화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심성자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한 문정순,
서울 국창부 장원 고광열, 정창섭, 김공수, 정용우를 비롯,
현 광주전남지부장을 맡고 있는 이미화(막내 딸)와 사범 김순경씨.
그리고 인원지회장과 근촌선양회를 조직운영하고 있는 추창규 회장과
전국의 시조경창대회 심사위원 및 지회장 80~ 90%가 선생의 제자들이다.
14. 선생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들
1) 사모님
평생을 시조와만 살았기 때문에 가족과는 별다른 추억도 없다.
자식들에겐 더 없이 따뜻했지만 아내에게만큼은 혹독한 지아비였다.
성격도 얼마나 날카롭고 급했던지 어떤 말에라도 ‘토’를 달았다간
치도곤을 당하기 때문에 그냥 평생을 끽소리 한 번 못하고 뒷바라지만 하셨단다.
2) 따님
어렸을 적, 이빨을 뽑아야 할 시기를 넘겼음에도
두려워서 그것을 뽑지 못하고 망설이자 도화지에 드랴큐라 형상을 그려 놓고
‘네가 정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 나중에 이 그림에 나오는 괴물처럼 될 테니
알아서 해라’면서 겁을 주시더란다.
아무리 어린 맘이라지만 그 그림을 보고 이빨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는
회고담이다.
또 다른 일화는 눈 다래끼가 났을 때다.
한창 통증이 심한데 ‘저어기 저 좀 봐라’는 말씀에
그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는 데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토록 고통스럽던 눈다래끼는 감쪽같이 나았단다.
막내딸로 태어난 것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조를 공부하였기에 그 사랑과 애정은 남달랐다.
하지만 시조를 가르칠 때만큼은 그렇게 혹독할 수가 없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제자나 가족이라고 하여 심사에 유리한 적은 하번도 없었단다.
얼마나 엄격하게 평가를 하시는지 만약에 조금이라도 틀린 곳이 나오면
사정없이 실격처리를 해 버리셨단다.
그러면서 아무 말씀이 없어 여쭙기라도 하면 불호령을 치신단다.
공부가 덜 됐음에도 자신을 모른다고.
그래서 시조에 관한한 어떤 경우라도
아버지께 따지거나 건의조차 할 수가 없었더란다.
3) 제자들
(매정 김순경)
처음 시조창을 배울 당시를 그녀는 이렇게 추억한다.
목이 쉬어 소리가 나지 않아 겨우 꺽꺽거리며 악을 쓰고 있는데
느닷없이 선생님이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하시더란다.
뭣 때문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입좀 벌려 봐”하시더라나.
그래서 더 궁금하여 “왜요?”하고 물었더니
“아 글쎄 입 벌려 보라니까” 하시며 역성을 내시더란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아’하고 입을 벌리자마자,
쥐고 있던 장구채를 세로로 곧추 세우곤 목구멍을 향해 내리 꽂는 시늉을 하시며
“이놈의 목구멍에 콱...”하시더란다.
얼마나 혼비백산을 했던지.
그 뒤부터 쉰 목이 어디로 갔는지 소리가 터지더란다.
그리고 한번은 애원성 목을 써야 할 대목에서
하도 목이 아파 가사만 익히고 있으려니
“너 남자 있냐?” “아뇨” “그러니까 안 되지.
그 목은 말야, 잠시만 안 보면 미쳐버릴 것 같은
남자한테 한번 차여봐야 낼 수 있는 소리거든.”하시더라나.
아무튼 지금도 선생님 생각만 하면
그 당시가 떠올라 피식 웃는다는 그녀의 어금니가 오늘따라 예쁘다.
(추창규 - 남원지회장)
다리가 불편하셔 업히기를 좋아 하시는데 등에 업혀서도 꼭 말씀을 하신단다.
“아~ 이쪽으로 가랑께. 그쪽이 아니란 말이여.”
설령 그쪽이 돌아가는 쪽이라도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해선 안 되었단다.
지금도 무슨 맘에 그러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혹시 내 등에 오래 업혀 있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인천대회 때였던가?
갑부 응창을 하는데 “어화청춘~”하고 시작하자마자
“네 맘대로 어화청춘이여~~” 하시면서
박자를 맞추시던 장구를 획 집어 던지시더란다.
그 밖에도 자잘한 애기들이 수없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선생님곁에서 동고동락 하셨으니 당연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훈구 - 전주지회장)
별첨
(향산 강재일)
근촌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
그래서인지 무척 관심을 보이며 남다른 애정을 주셨다.
금년 봄, 진해에서 개최된 전국시조경창대회에
선생님께서 불편한 몸으로 참석을 하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접했으면서도 다른 스케줄로 뵙지를 못했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전화 한통을 받았다.
나를 스승님께 인도했던 고성 시우회 회장인 김무 선생님.
“근촌 선생님께서 자네를 찾는 눈치던데 내일은 꼭 와야 하네.”
다음날 새벽같이 달려갔다.
마침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회장으로 이동하셔야 할 시간에 맞춰 당도하였다.
작년 가을. 광주 문화원에서 열렸던 근촌 선생님의 제자들이 펼친 공연자리에서
선생님의 거동이 불편한 걸 알고 내가 업어 모신 이후,
다음부터서는 꼭 내가 곁에 있어야 했다.
살 내린 야윈 몸을 등에 업으면서 무척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스승님을 업고 있을라치면 꼭 돌아가신 아버지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사부는 한 몸이라 하셨던가?
그날도 우두커니 서서 날 기다리시더란다.
그러다가 내 모습이 보이자 활짝 웃는 얼굴로
“향산 왔는가”하시며 지팡이 쥔 손을 저어셨다.
그렇게 스승님께선 마지막 제자인 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던 것이다.
거기엔 아마도 아들인 이순형과의 친분도 한 몫 했으리라.
그래서 더욱 아들 같은 느낌으로 대하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승님을 통해 아버지를 느꼈듯이.
15. 기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들
율려상조법에 대하여 얼마나 엄격 하셨던 지는 다음 일화로도 짐작이 된다.
소정(이미화)이 대상부를 준비하던 23~ 24세 때.
월례회시간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막 들어서는데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란다.
얼른 달려갔더니 곧바로 우조질음을 한번 불러 보라고 하시더라나.
그래서 숨을 고른 후 목청을 뽑는데
갑자기 장고채로 장고를 부서져라 두드리면서 악보를 보라고 하시더란다.
얼른 악보를 펴 드니 거기에 뭐라 적혀 있냐고 보라고 해서 그냥 ‘6이요’했더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시면서
“악기를 만진다는 것이 음정이 뭔지도 모르고 ‘6’이라고? ‘6’이 뭣이여? 엉??”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도 60여명이 넘는 회원들 앞에서 대학생 딸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 않고
그렇게 창피를 줘 버리더란다.
그날 밤. 소정은 밤을 새워 율려상조법을 다 익혔단다.
그것은 선생님의 교육법이기도 했다.
‘기둥을 치면 보가 울린다’는 말. 바로 그것이다.
절대로 사람을 직접 나무라는 법이 없단다.
‘갑’을 나무라기 위해 ‘을’을 꾸짖고,
‘을’을 교화시키기 위해 ‘갑’에게 가혹하게 군다는 것이었다.
박치는 법에 있어서도 꼭 무릎 박과 함께 손장단을 맞췄단다.
그러다가 틀린 곳이 있으면 망부석처럼 손을 들고 계신단다.
그럴 때 눈치 없이 노래를 중단했다간 또 치도곤을 당한단다.
만약 틀리더라도 자신이 어디가 틀렸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틀린 곳을 교정할 수 있다는 논리다.
선생께서 노력하신 시조창의 저변확대.
현재 활약하고 있는 노인층이 사라지고 나면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지방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노당’이나 ‘노인대학’에
정규 과목으로 시조를 채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터.
뿐만 아니라, 각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문화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의 특별활동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지만
여건 조성을 위해 교육계 인사에게 시조창을 이해시키는 방안도 강구 해 볼 일이다.
[출처] 근촌 이상술 추모 특집 자료작성자 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