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8월, 광화문 앞이다. 흰 아치가 도로를 가로질러 서 있고 꼭대기 현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경축 광복 제13주년 정부수립 제10주년'.
작은 글씨가 광복이고, 크게 박아 넣은 글씨가 '정부수립 제10주년'이다.
여름 셔츠 차림으로 길을 건너는 사람들, 흰 장갑 낀 교통순경, 길가에 늘어앉은 구경꾼까지 그대로 남았다. 이승만 정부가 세운 아치에, 이승만 정부가 직접 써 넣은 문구다.
'건국'이 아니다.
'정부수립'이다.
8월 15일을 건국절로 부르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이 사진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행사의 공식 이름부터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었다.
10년 뒤 광화문에 걸린 문구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 지금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2조를 펼쳐도 8월 15일의 이름은 '광복절'이다. '건국절'이라는 단어는 그 조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1919년을 건국으로 잡는 쪽 손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다.
제헌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답이 이미 나와 있다.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재건이다. 없던 나라를 새로 짓는 게 아니라, 있던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말이다. 헌법을 쓴 사람들 머릿속에 나라의 시작은 훨씬 뒤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회의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 의결을 거쳐 국경일 둘을 정했다.
'독립선언일', 그리고 '건국기원절'.
건국기원절이 음력 10월 3일이고 지금의 '개천절'이다. 나라가 처음 비롯한 날을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그때의 판단이었다.
3·1독립선언서 말미의 날짜 표기도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이다. 서기도 일본 연호도 아닌 단군기원으로 적었다.
정부 수립 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단기를 공용 연호로 못 박았다. 헌법 전문 끝에도 '단기 4281년 7월 12일'이 찍혀 있다.
호적도 화폐도 학위논문도 단기로 갔다. 그 단기가 사라진 날이 1961년 12월 2일이다.
5·16 뒤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법률 제775호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정했고, 부칙에 따라 1962년 1월 1일부터 서기가 공식 연호가 됐다.
박정희는 그때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회의 의장이었다. 국제 교류에 불편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단기로 세면 올해는 4359년이다. 2333에 2026을 더한 숫자다.
일본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1872년 메이지 정부는 태정관 포고로 기원절을 만들었다.
일본서기에 적힌 진무천황 즉위일을 역산해 이듬해부터 양력 2월 11일로 날짜를 고정했다. 진무천황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8세기에 편찬된 책 속 인물을 국가의 시조로 세운 것이다.
그마저 패전 뒤 1948년 폐지됐다가, 1966년 '건국기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건국기념일'이 아니라 '건국기념의 날'이다. 조사 하나를 끼워 넣느라 10년을 다퉜다. 없는 신화를 만들어 국가 기념일로 법제화하려니 그렇게 힘이 들었다.
우리는 그런 씨름을 할 이유가 없다.
이미 '개천절'이 있다.
물론, 이승만 본인은 단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 '대한민국 연호'를 끝까지 고집했고, 국회가 '단기'를 택하자 마지못해 따랐다. 그러니 저 아치는 건국절 주장을 무너뜨리는 증거는 되어도, 개천절을 건국의 뿌리로 보자는 내 주장까지 떠받쳐주지는 못한다. 다만 두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은 흔들리지 않는다. 1948년 8월 15일은 나라가 시작된 날이 아니다.
건국의 뜻을 이렇게 좁게 잡아서 얻는 게 무엇인가.
수천 년 이어진 역사를 78년으로 잘라놓고, 그 잘린 토막을 놓고 어느 해가 진짜냐를 다툰다. 자라나는 세대가 헷갈리는 건 당연하다. 헌법 전문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적어놓고, 정작 그 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정한 건국기원절은 셈에서 빠져 있으니까 말이다.
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은 정신이 곧 답이다. 1919년은 국호와 공화정 체제가 세워진 해이고, 1948년 8월 15일은 그 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건국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사진을 남긴 사람은 임인식이다.
192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중학을 나왔고, 1944년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가회동에 자리를 잡았다. 삼각지에 사진기 가게를 열었고, 해방 무렵 집 한 채 값이던 라이카를 손에 넣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전쟁이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에 사진대가 급히 꾸려졌고 그가 대장을 맡았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전선으로 갔다.
1950년 여름 충남에서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된 미군 병사를 찍었고, 그 사진은 AP를 타고 미국 신문 1면에 실렸다.
1952년 대위로 예편한 뒤에도 셔터를 놓지 않았다. 가회동 골목, 폭격 맞은 재동초등학교 운동장, 뚝섬 유원지의 포플러. 그가 1998년 세상을 뜨기까지 남긴 필름이 지금 우리가 1950년대 서울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이다.
기록이 없으면 논쟁도 없다. 저 아치가 무엇이라고 적었는지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