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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호이안에 피어 난 꽃
이준태
완전히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다. 가끔 매서운 바람이 불었지만 양지쪽에는 따스한 기운이 일었다. 청명이 지나 초목에 푸른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농가에서는 한해의 농사를 준비해야하는 바쁜 절기였다. 농군들은 못자리를 마련했고 논밭 둑을 손질했다. 야산에 들에 나물을 캐는 처자들의 모습이 봄기운을 돋웠다. 청명이 지난 절기였다. 성규는 봄날 재 넘어 남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을 맞을 때면 야릇한 그리움이 생겼다. 따스한 바람과 잘 알지 못하는 머나먼 지방에 대한 그리움은 탈향(고향을 떠남)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의 남쪽에서 불어왔던 바람은 달랐다. 남지나해에서 불어왔던 거대한 바람에 반도의 남부가 휩싸였다. 이 바람은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달려있는 무거운 바람이었다.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는 태풍이었다. 태풍을 피해 도망갈 수는 없었다. 태풍 속에 살아남기만을 요행수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포항역에서 사단장 김모 소장에게 신고식이 있었다. 인솔장교는 성규가 근무했던 김포여단의 작전보좌관을 했던 백모 소령이었다. 대원들은 열차에 앉아 있었고, 장교들과 부사관들만 플래폼에 정렬하여 신고를 했다. 신고를 마치자 장군이 백소령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고 차려 자세로 서있는 장병들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하며 격려를 했다. “꼭 살아서 다시보자.” “나라의 운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매달렸다.” “해병은 불사조다.” 세 마디 말을 번갈아하면서 사단장은 간단한 열병식을 마쳤다. 사단장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서 있던 장교와 부사관들이 열차에 오르자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청룡가” “나가자 해병대” “브라보 해병”등의 귀에 익은 멜로디였다. 열차외벽에는 각 차량마다 ‘임전무퇴의 기상으로 자유세계를 지키자.“ ” 백전백승의 해병 혼을 자유월남에 심자.“ ”장하다 청룡부대 용사들아“ 등의 프래카드가 붙었다.
사단장이 돌아가자 기다렸던 가족들이 몰려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호송 헌병이 차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젖먹이를 엎고 온 아낙네, 주름이 골 깊게 파인 어머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 열린 차창으로 남편과 아들과 손자와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아들을 찾지 못해 이 칸 저 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와 갔다.
장병들과 가족들을 이별의 슬픔에 오래 젖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열차는 예정된 시간에 떠나야 했다. 헌병들이 각 차량마다 호각을 길게 부르며 출발신호를 보냈고, 가족들더러 열차와 떨어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장이 파란깃발을 흔들었다. 디젤기관차는 둔중한 고동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항역을 출발하여 부산3부두까지 가는 월남 파병 전용군용열차였다. 총 일곱 차량이 디젤 기관차에 매달려 갔다. 장교 한 칸, 부사관 한 칸, 사병들 다섯 칸으로 나뉘어졌고, 총 사백여명 되었다. 전시체제의 일개 대대 병력이었다. 대대장 급인 중령이 인솔해야했지만 중령 이상은 비행기를 타고 갔다. 최초 월남 파병이후 삼년이 지났다.
처음 파월할 때보다 군용열차가 많이 좋아졌다. 파월초기에는 군용열차를 구식 증기 기관차로 끌었다. 포항에서 부산까지 네 시간이 걸렸다. 중령, 대령도 배를 타고 갔다. 지금은 안팎으로 페인트 칠이 정갈하게 되었고, 의자도 나무의자가 아니고 스프링이 있는 의자였다. 보통급행열차의 수준으로 파월 열차객실이 좋아졌다.
장교 칸은 넉넉했다. 장교는 총 이십오 명 이었다. 객차의 가운데 인솔 장교 백 소령과 대위들이 자리를 잡았고, 중위와 소위는 양쪽 출입문 가까운데 동기생들 끼리 서너 명 씩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 서로 말이 없었다. 평소 부대에서 만났다면 후배가 선배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고, 약간은 경직된 자세로 앉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선 후배들도 기합을 풀었고 선배들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성규는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소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긴장감이 더 함을 느꼈다. 그때 입영열차에서 몇몇은 술을 마셨고 객기도 부렸다. 사 개월 후면 장교가 된다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격어보지 못한 전쟁터에 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초조함이 싸
르르 흐르고 있었다. 성규는 일년 늦게 임관했던 소위들과 같이 않아 있다가 빈자리로 옮겼
다. 후임 장교들은 출입문 밖을 드나들며 담배를 피웠다.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졌
객차 안은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드나드는 데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강을 지나 경주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부사관들이 있는 객차가 시끄러웠다.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백소령은 중위 중 고참이었던 성규를 불러 상황을 파악해오라 했다. 부사관들이 있는 객실에 들어가보니, 헌병들과 어떤 아낙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군용열차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헌병을 불러서 내용을 파악해보니 그 아낙은 이번에 같이 파월된 반중사의 아내였다. 몸을 보니 아랫배가 부풀어 올랐다. 임신 중이었다. 열차의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남편을 만났고, 헌병에게 발각된 것이다. 헌병은 다음 역 경주에서 내리라 했고, 그 아낙은 부산까지 같이 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성규는 백소령 앞에 그들을 데려갔다.
솔로몬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소령은 ‘해병대의 아내’라고 군용열차에 숨어든 변중사 부인의 기민함을 치켜세웠다. 펑퍼짐한 회색 원피스는 여기저기 검정이 묻었고, 단화는 흙투성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간절한 눈빛에 어느 누구도 내리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백소령이 헌병에게 “야 김해병 그냥 부산까지 가게 해줘라. 그 다음부터는 같이 있고 싶어도 같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니.” “아 닙니다. 경주에서 꼭 내려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요.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야 임마! 우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이다. 책임지지 못할 일도 없고 두려울 일도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그만 소란 피워라. 부산항에 내리면 내가 너희 헌병대장에게 전화하마.”하고 종결지었다. 백소령은 그들 부부에게 장교객실의 빈자리를 주어 편히 가게 했다. 두 사람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일 년 뒤 귀국하는 배편에 변중사의 소식을 물으니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했다. 소대 선임하사로 소대 작전 회의 중이었는데 포탄이 떨어져 소대장과 분대장들과 같이 전사했다. 고노이 섬 상륙작전 중이었다.
경주역과 울산역에서 열차가 정차를 했다. 포항역을 떠나서 두 시간 반 걸려 부산항에 내렸다. 부산항 3부두에 거대한 수송함이 정박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제국 미국의 위력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성규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배중에 가장 큰 배였다. 상륙전 훈련 시 탔던 LSD보다 훨씬 컸다. 기관실의 연기를 뿜어대는 커다란 연통이 두 개 우뚝 솟아있었고, 대형 구명정이 전면에 다섯 정 걸려 있었다. 삼천여명의 인원을 베트남까지 수송했던 미 해군의 수송함 가피호였다. 입구에 대형 직사각형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가로의 윗부분에는 “축 환송” 세로의 좌측에는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 우측에는 “ 그 용맹 길이 빛나리 대한의 용사”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간판을 지나서 배에 오르는 현문사다리에 올랐다.
장병들이 수송함에 오르자 환송식이 시작되었다. 부산 시장이 대통령 환송사를 대독했고 육군소령이 장병들을 대표하여 답사를 했다. 환송식을 위하여 부두에 남아있던 십여 명의 장병들에게 부산의 남성여고 학생들이 화환을 걸어주었다. 군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남성여고 합창단이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하는 청룡 부대가와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하는 백마 부대가를 불렀다. 맨 마지막에 그 배에 같이 갈 청룡부대원이었던 남진이 소개되었다. 장병들이나 환송객이나 깜짝 놀랐던 순간이었다. 남진이 그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가슴 아프게”를 불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그 다음 노래가 “울려고 내가 왔나”였다. 환송식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남진을 포함하여 부두에 남아 있던 장병들이 배에 올라타고 현문이 닫혔다. 뱃전에 있던 장병들이 테이프를 도크에 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환송을 나왔던 여학생들이 테이프에 손수건을 매달았다. 장병들이 테이프를 끌어 올렸다. 손수건에는 “국군 아저씨 꼭 소식 주세요.”라는 글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가피호가 “ 부웅 붕”하며 출발의 고동을 울렸다. 부두에서 배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부산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장병들은 고개를 떨구고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다. 잔치 끝에 어둠이, 무거움이 내리고 있었다.
도로변에 서서 박수를 치며 무운장구를 빌었던 시민들의 격려, 뜨거웠던 환송식.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이 집단도취를 주었던 군가제창, 이런 모든 것이 순간 마취였다. 돌아서면 싸늘하게 밀려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가슴 저 아래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커먼 그림자가 있었다.
숙소를 배치 받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성규는 상갑판에 올랐다. 포항을 떠나올 때부터 성규는 줄 곧 고향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지만 부모 앞에서 월남 간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아랫마을 큰 집에 들려 ‘월남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며칠 후 집에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성규가 이 년 전 해병대 간부 후보생대 입교할 때였다. 전주에서 진해가는 순환열차를 타러 전주역에 갔을 때 어머니가 따라 나왔다. 그때 너무 슬퍼했다. 마치 전쟁터에 아들 보내는 것처럼. 이번에는 진짜 전쟁터에 가는 것을 알리려고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의 슬퍼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홀연히 집을 나왔었다. 성규는 마을 어귀를 나올 때 한참이나 서서 고향의 정경을 마음에 담았다. 세상만물을 품어주었던 모악산, 그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고향사람들, 마을 한쪽 경사지에 있던 과수원, 과수원 입구에 성규네 집 양철지붕이 보였다. 객지에서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양철지붕위로 저녁연기가 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같이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밥상머리에 식구들 끼리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군 입대 전에는 거의 매일 모악산을 오르내렸다. 이번 휴가에는 모악산에 오르지 못했다. 모악산을 향해 목도를 올렸다. ‘내가 일년 후 멀쩡해서 돌아온다면, 모악산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튼튼하게 키워주었고, 이역만리 화탕지옥에서 무사하게 살아나오게 훈김으로 감싸준 모악산에게 감사를 드릴 것이다.’라고
포항 사단 월남전 특수교육대에 있을 때였다. 동생이 면회를 왔다. 동생은 윤기가 나는 연녹색의 손수건 쌓인 것을 내밀었다. 손수건은 느낌이 있는 색깔이었다. 천잠(天蠶)이라고 하는 야생누에에서 실을 뽑아 만든 손수건이었다. 옛날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천잠 손수건을 가지고 가면 과거에 붙었다는 풍속이 있었던 귀한 손수건이었다. 야생 누에고치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고치에서 실을 빼어 물레에 잣고, 실로 천을 만들어 손수건을 만드는 과정이 선비가 과거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정성이 들었다. 아버지가 징용에 붙들려 갈 때 어머니가 이 천잠손수건을 만들어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안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였다. 이번에는 그 정성이 성규에 쏠려진 것이다. 손수건을 열어보니 십자가 달린 목걸이가 나왔다.
동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식구들 마음을 아프게한 형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다음에는 하얀 봉투에 편지를 건넸다. 편지지 한 장도 채우지 못했다. 어머니의 편지였다. 글자체도 고르지 못했고, 어법도 맞지 않았다. 이제 막 문맹을 벗어나는 시골어머니의 편지였다. 어머니 세대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이었다.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조금씩 글을 익혔다. “성규야 하나님의 가호가 너를 지킬 것이다. 이 목걸이 어디에 가든지 꼭 지니도록 해라. 그리고 그곳에서 같이 지내는 네 부하들도 너 못지않은 귀한 아들들이다. 그 사람들 잘 보살펴라. 하나님의 보살핌이 너와 너희 부대원에게 같이 하시길 빈다.” 성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생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어서서 면회실 창가로 갔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다. 교육중이라 면회시간이 길지 않았다. 위병소 밖까지 나와 동생을 보내며 한 말이 “걱정마라. 형은 꼭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였다.
다음 날부터 배에서의 일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오전의 함상교육과 훈련 오후에는 각자 부대정비였다. 부대정비라는 용어는 각자의 용품과 침구정돈 청소 등을 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의미의 휴식이었다. 군대에서는 과업시간(오전 여덟시에서 오후 다섯시까지)에는 휴식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함상교육은 배에서 지켜야 되는 예절, 가피호의 제원과 가피호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소개했고, 비상시에 구명보트를 이용하는 방법을 교육받았고 실습훈련을 했다. 모함(큰배)에서 밧줄 엮어진 망을 타고 내려와 구명보트에 올라타는 훈련이었다. 해병대는 상륙훈련 시 하선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군들에게 시범 훈련을 보여주는 것 처럼 착착해냈다.
배안에 탁구장, 당구장, 수영장, 영화관, 은행이 있었고 시설은 호텔수준이었다. 장사병을 막론하고 이런 호화로운 시설에 어리둥절했고 왈칵 가까이 할 수 없는 두려움도 있었다. 배에 있는 기간에 쓸 수 있는 군표(군인들이 쓸 수 있는 수표)를 지급하니 은행에 가서 달라로 바꿔 이런 저런 시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장시간 배에 머물다보니 뱃멀미는 선상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장병들에게 무차별로 덥쳤다. 아주 건강한 체격을 장병들도 맥을 못 추었다. 곳곳에 멀미약이 비치되어 있었어도 뱃멀미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엿새 밤을 세우고 나니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의 다낭이었다.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서 하루 더 외항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가피호에서 내려 작은 상륙주정(LCM)에 옮겨 탔다.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과 뱃전에서 서로의 군가를 부르며 작별을 했다.
다낭의 여단 본부에 도착하여 이틀만에 대대를 거쳐 바로 중대로 배치되었고, 중대본부에 도착하는 순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대본부는 반 지하로 내려가는 벙커였다. 노출되는 부분은 나무를 심고 출입구는 위장망을 쳐서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쉴 새 없이 오고가는 소총소리와 연이어 터지는 105mm 곡사포 포탄 터지는 소리에 성규는 움칠움칠했지만 중대본부에 근무했던 장병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중대장에게 신고하자마자 지금 전개되고 있는 전투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며 바로 소대로 내려가라 했다.월맹 정규사단과의 대규모 정규전이었다. 3대대 방어저지선이 뚫렸다가 다시 복귀되었다 했다.
잠시 후 소대장 전령이 나타나서 성규를 안내했다. 저녁녘이었다. 전투 시 이동통로인 교통호를 따라서 이동했다. 그 사이에도 포탄은 머지않은 곳에서 수시로 터졌다. 후보생시절부터 따지면 군 생활이 2년이 다되어 새내기를 벗어난 지 제법되었지만 베트남에 오자마자 전선에 배치되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적지 않게 두렵고 당황하게 되었다. 무기력하게 전령의 뒤만 좇았다. 전령은 얼굴이 침울해 있었다. 머뭇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 내뱉지 못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소대본부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업무를 넘겨줄 소대장이 없었고, 소대 선임하사가 어두운 얼굴로 성규를 맞이했다. 사흘 전 전투에 소대장과 분대장 1명과 대원 6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분대장은 고참 병장으로 자리를 채웠고, 대원은 3명을 보충 받았다고 보고를 했다.
방탄복과 M16소총을 챙겨들고 각 분대와 무선으로 소대장이 부임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전임소대장이 썼던 탄띠와 소총에서 씻은 흔적이 있었지만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노리쇠를 당기고 밀어서 방아쇠를 당겨보니 격발은 제대로 되었다. 엉겨 붙은 피가 노리쇠 밖으로 밀려나왔다. 한사람의 죽음이 소총에 배어 있었다. 전임 소대장은 성규보다 4개월 먼저 임관했던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로서 베트남에 온지 8개월이 되어 성규가 오면 바로 부중대장이나 여단본부로 갈 예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어떤 위로나 희망적인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깨끗한 최후를 맞이할 뿐이라는 다짐을 했다.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과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을 다시 만져보았다. 최후의 순간에 사용할 자폭용이었다. 포항에서 파월 특수교육을 받을 때 교관이었던 P소령의 말이 떠올랐다. ‘6.25이후 해병대 장교 중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다‘ 불명예 보다는 장렬한 죽음을 택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리가 몽땅 날아간다든지 팔이 없어진다든지 하는 상황도 최후의 선택이었다.
총소리가 뜸해지면서 각 분대장을 불렀다. 소대 간부들과 첫 대면이었다. 땀에 젖어 몸에서 쉰내가 났다. 청음초(밤에 소리를 들어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초소)의 배치를 물었다. 소대 전방 30미터 지점에 나가 있고, 설렁줄을 연결해 비상연락망을 확보했고, 청음초들이 잠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통신병들이 무전기로 확인한다 했다. 불을 켜지 못해 어둠속에서 악수만 건네고 돌려보냈다.
중대본부에서 소대본부까지는 유선으로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불안했든지 수차례 전화를 해서 소대현황에 대해서 물었다. 성규가 버벅거리면 “야! 강중위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아냐? 도착하자마자 인원파악을 먼저 했어야지. 임마 전방에서 소대장 생활을 해봤을 것인데 그것도 몰라”하면서 말이 거칠어졌다. 현황파악, 아직 빠르지 않은가? 이 사람이 나를 길들이려하는 구나 생각했다. ‘내가 신삥 소위도 아니고 중위 중고참인데.’ 성규의 모습을 봤던 전령이 눈치 빠르게 정리를 해주었다. “중대장님 행동이 거칠어서 별명을 개라고 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미친개라 하지요. 그런 점 감안하셔야 할 겁니다. 다른 소대장님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실 겁니다. 돌아가신 전 소대장님께도 그러셨거든요.” 군대에서는 상관을 잘 만나는 것이 제일 큰 복이었다. 야간에 기습을 해오는 적들 말고도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포에서 같이 근무했던 중대장이 생각났다. 부하들을 권위 내세워 압박하지 않고 솔선하는 좋은 지휘관이었다. 그때는 지휘관이 당연히 그런 것으로만 알았는데 새삼 그가 생각이 났다.
소대에 부임하여 첫날을 참호 안에서 뜬눈으로 날을 세웠다. 방탄복 속으로 땀이 축축하게 젖었다. 우기여서 습기가 차 끕끕했고, 모기가 얼룩무늬 위장복을 뚫었다. 먼동이 트면서 청음초들이 철수하며 이상 유무를 보고 했고, 밤사이 총성이 누그러졌다. 아침에 중대본부로부터 상황이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성규는 이렇게 호지명(호치민)에게 신고식을 마쳤다. 월남에 와서 첫 번 째 전투를 치르는 것을 호지명에게 신고한다 했고, 무사 귀국하게 되면 호지명이 귀국허가를 해준 덕이라고 농담을 했다. 호지명은 해병대가 주둔했던 다낭과 호이안이 있는 꽝아이 성 출신이었다.
소대 현황파악을 하고 나서 성규가 집중하여 교육을 시킨 것은 부비트랩(건드리면 터지는 위장 폭탄)과 지뢰를 탐지해내고 사후 조치하는 방법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사상자는 실제의 전투에서 보다는 지뢰나 부비트랩에서 더 많이 발생했다. 부비트랩을 조심해서 될 수 있으면 사람 다니는 길을 피했고 부비트랩의 인계철선에 걸렸다고 생각이 되면 주위에 “부비‘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서 엎어지는 훈련을 반복하여 시켰다. 유도의 전방낙법과 같이 순식간에 엎어지는 것이었다. 실전경험이 있는 고참병들이 시범을 보여주면서 훈련효과가 좋았다.
매복은 분대 단위로 매일 돌아가며 했고, 수색정찰은 대대본부의 지시를 받아 소대 단위로 했다. 그때 까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수색정찰을 다녀왔지만, 큰 사고 없이 5개월이 흘렀다. 성규는 베트남의 야전생활에 많이 적응이 되었다. 씨 레이선(전투식량)을 먹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매복이나 수색정찰을 나가게 되면 씨 레이션을 먹게 되는데 여섯 끼니 이상을 먹게 되면 아주 물려버려 굶기도 했다. 장시간을 먹게 되면 비타민 C가 부족해져 이 사이에 피가 흘렀다. 시간이 흘러가고 적응이 될수록 두려운 것이 전선에서의 삶이었다. 그 사이 동기생 두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특히 P중위는 아까운 젊은이였다. 서울의 넉넉한 가정에서 둘째 아들로 자라 명문대학을 나왔다. 축구를 잘했고, 병영생활도 모범적으로 해내어 임관성적이 뛰어났다.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가 좋았다. 장기복무를 하게 된다면 장성감이라고 꼽아주던 친구였다.
베트남의 남북분계선은 북위 17도였지만 실제로 북베트남의 지하 침투세력은 남베트남 전역에 뻗쳐있었다. 해안에 접한 대도시를 빼고는 거의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베트남의 등뼈와 같은 아이와이 산맥을 따라 이어지는 호지명루트가 남베트남 전역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호지명루트를 통해서 병기와 인원 및 군수품이 보급되었다. 미군이 이 호지명 루트를 막강한 인원과 화력으로 장악을 한 적도 있었지만, 잠시였다. 호지명루트는 캄보디아로 우회하여 다시 만들어졌다. 미국은 캄보디아에 강력히 항의를 하고 경고를 했지만 캄보디아의 시하누크는 미국의 경고를 거부했다. 전투에서 보급선이 길어지면 반드시 지게 되어있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에서는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북베트남의 보급선 때문에, 미국이 막대한 군비와 인원희생을 감수해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되었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상륙하여 해안가에 부대 본부를 설치했고, 조금씩 내륙으로 세력을 장악해 갔다. 특정지역이 아군에 수중에 떨어지면 베트남 정규군에게 넘겨주고 북쪽으로 부대주둔지를 옮겼다.
이런 과정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미군이 점령한 지역을 넘겨받으러 온 베트남군이 밤새 미군에게 총질을 하고 산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수십 명의 전사자가 밤사이 생겼다. 적군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 전쟁터였다. 성규는 이 소식을 다른 대대에 있는 동기생으로부터 들었다. 사기문제가 있어 일체 소대 내에서는 발설을 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것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복이나 정찰을 나가는 대원들이 보고를 할 때 반복해서 강조한 말이 있다.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다. 인류평화, 베트남의 자유는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꼭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성규가 다낭에 도착하여 소대장 생활을 한지가 오 개 월이 지났다. 9월 초였다. 베트남은 세 개의 계절이 있다. 더운 계절, 더 더운 계절, 미치도록 더운 계절이다. 열대의 내리 쪼이는 태양에 우기의 습도까지 높아지면 미치도록 더운 계절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고국의 가을은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올 때였다.
성규의 대대가 전날 밤 상륙전함인 LSD를 타고 새벽에 일어나 작전을 시작했다. LSM에 성규의 소대가 갈아타고 베리어 섬 백사장에 상륙을 한 것은 오전 아홉시 경이었다. 성규의 소대보다 먼저 상륙한 첨병소대를 향한 베트콩의 총알이 머리 위로 ‘핑핑’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인거리 확보하고 “부비추랩”조심하라고 분대장들에게 무전기로 지시하며 조심조심 전진했다. 우기가 끝날 무렵이어서 열대의 온갖 화초들이 만발했다. 특히 모래땅에서 자라는 샤보텐이 아름다웠다. 나무이파리 끝에 맺힌 이슬이 반짝거렸다.
작전개시한 뒤 한 시간정도 지났다. 방탄복 안에 군복이 땀에 완전히 젖었다. 수통의 물을 거의 비웠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해안에서 2킬로 쯤 전진했을 때였다. 첨병소대가 맹렬히 적으로부터 반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보고하는 것이 들렸다. 곧이어 중대장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성규의 소대가 좌측으로 돌아서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지시였다. 빠르게 측면으로 돌아가 적의 옆구리를 공격하자 적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규의 소대, 3소대가 첨병소대가 되어 전진을 하게 되었다. 지하 동굴을 만나면 동굴 속에 최루탄을 던져놓고 기다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수류탄을 터뜨려 동굴입구를 막았다. 세 번 째 동굴에서 폭파하기 전에 콜록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베트콩 둘이 손을 들고 나왔다. 중대본부에 보고를 하고 포로를 이송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지도를 보니 목표지점에 거의 다가왔다. 정글이 끝나고 논이 나왔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이 보였다. 우리나라 시골마을과 비슷했다. 초가집이었다. 거리는 200여미터 되어 보였다.
첨병을 보냈다. 그동안 반격하는 총소리가 가끔 들렸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극도로 긴장이 되었다. 첨병 한상병이 기역자로 쌓인 논둑을 한발 한발 조심스레 옮기고 있었다. 성규는 첨병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입에 침이 바짝 말랐다. 논둑이 거의 끝날 무렵 고요를 깨는 총성이 터졌다. 총알이 다행이 첨병을 비켜갔고, 우레와 같이 총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2개분대는 논둑에 바짝 붙었고, 1개분대는 숲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글로는 우회할 수가 없었고, 논으로는 진격할 수가 없었다. 트여진 공간에 더 좋은 사격목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트콩들은 그들의 거점인 마을을 사수하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었다. 1 분대장황하사가 돌격대를 끌고 나가겠다는 것을 막았다. 전투 중에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용기를 성규는 특히 경계했다. 중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 작전에 배속된 미 해병대 탱크를 불렀다. 이십분 뒤에 탱크가 와서 총알이 계속 날아오는 우측 방 대숲과 가옥을 완전히 분쇄했다.
적의 반격이 주춤했다. 상황을 봐서 적이 아군을 유인하기 위해 반격을 멈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한상병을 불러서 오라하고 2분대 조병장을 첨병으로 임무 교대하여 보냈다. 첨병을 필두로 개인간격 이십 보를 유지하고 마을에 진입했다. 적이 격렬하게 반항했던 대숲의 진지에 가보니 여섯 구의 남자시체와 두 구의 여자시체가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벌써 파리가 끌기 시작했다. 마을은 전체 삼십여 호 되었다. 집집마다 지하로 만들어져 있는동굴을 뒤졌고,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주민들을 끌어냈다.
성규가 마을 가운데에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는 끝집을 보고 다시 내려오고 있을 때 옆집 헛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자아이가 애원하는 듯한 소리였다. 달려가 보니 첨병으로 마을에 들어왔던 조병장이 열 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덮치고 있었다. 총과 철모와 방탄복은 한 쪽에 급하게 내팽겨 쳐져 있었다. 성규가 군화발로 조병장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윽 하면서 돌아서 상기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야 임마 조상호! 너 이 짓거리 하라고 첨병으로 보낸 줄 알아. 병기 풀어놓고 너 죽을라고 환장했지. 빨리 일어서 이 새끼야.“ 총구로 풀어헤친 것을 가르켰다. 여자아이는 한쪽에 벌벌 떨고 있었고, 조병장은 주섬주섬 장구를 챙기고 골목으로 사라지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내려갔다. 마을의 한 가운데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물가에 미쳐 피하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오십여 명 되었다. 청년들은 하나도 없었고, 노인들, 중년의 농군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있는 아낙네들이었다. 조금 전 위기를 모면한 아이와 또레의 여자아이들이 여섯 명 있었다. 그들을 인솔하여 피난민 임시수용소로 보냈다.
다음 달 중대의 기동작전이 시작되었다. 중대 진지에 경비병력만을 남겨놓고 8중대 외곽지역으로 이동하여 8중대를 엄호하는 것이었다. 8중대는 적의 수중에 있던 고지를 빼앗아 새로 진지를 만들었다. 적들은 다시 잃은 땅을 복구하고자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 왔다. 최근에 베트콩 두명이 200여미터도 되지 않은 바로 중대 관측소 앞에서 팬티 차림으로 약을 올렸다. 이틀 그 꼴을 보다가 참지 못해서 1개 분대를 출동시켰는데, 역습을 당하여 절반의 병력을 잃고 철수 했다.
8중대를 우회하여 8중대 너머 오백 미터 앞에 있는 43 미터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중대의 작전목표였다. 성규의 소대는 고지의 좌측을 맡았고, 3소대가 고지의 우측을 맡았다. 성규는 전투 경력이 많은 1분대장을 정찰조장으로 내세워 첨병분대로 보냈다. 그 뒤를 따라 소대가 이동을 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정글로 올라섰다. 전날 중대장과 3개소대장은 미군헬기를 지원받아 작전지역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서 각소대의 작전구역이 정해졌고, 진격루트를 지도에 표시를 했다.
아침에 어둠이 걷히자마자 이동을 시작해서 아홉시에 배치완료 했다. 미공군 팬텀기가 폭탄을 내리쏟고 나서 포병의 화력지원이 시작되었다. 팬텀기의 포탄은 쉬익식하면 내리 꽂아졌고, 155미리 곡사포는 폭탄이 터지면 땅이 울렸다. 포탄의 연기가 정글에서 피어올랐다. 아군은 정글에서 베트콩에게 취약했지만, 화력에서는 압도했다. 화력지원이 끝나고 적의 진지를 공격해갔다. 좌우 2개분대가 앞장서 개활지를 진격해가던 참이었다. 적의 반격이 완강했다. 포격 중에는 숨죽이고 있다가 진격을 하니 맹렬하게 반격을 해왔다. 분대에서 이미 부상자가 발생했고, 은폐물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적의 기관총알이 쏟아졌다. 잠시 총소리가 뜸해서 일어서면 파박파박하며 총알이 바로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박혔다.
적의 진지까지는 200미터가 개활지이고 다음부터 야트막한 산이었다. 그 산 중턱에서 기관총알이 쏟아져 나왔다. 공격방법을 다시 고민하던 끝에 적의 시야를 차단하고 난 후 공격하기로 하고 중대본부에 요청하여 60미리 박격포 연막탄을 요청했다. 적진지 아랫부분에 연막탄이 피어 올랐다. 10미터 간격으로 연막탄이 터졌다. 산전체가 연기에 쌓였다. 연막이 사라지는 순간은 길어야 7분이었다. 개활지의 마지막 논두렁까지 소리 없이 돌격하여 엎드려 숨을 돌리고 있었다. 연기가 걷히는 순간 M79 유탄발사기 사수 박상병이 적의 기관총좌를 향해 사격을 했다. 하나, 둘, 셋 정확히 명중하여 기관총이 날라갔다. 유탄발사기는 단발 사격이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성규가 전 소대원에게 사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접근전에서는 아군의 소총 성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적의 총알이 박상병에게 쏠렸다. 박상병이 쓰러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사지가 늘어졌다. 위생하사를 급히 불러 응급조치를 했지만, 의식이 가물가물 해져갔다. “박상병! 야 박상용! 정신 차려” “소대장 님”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복부에서 피가 흘러내려 논바닥에 고였다.
적의 예기가 꺾였다. 박상병을 위생하사와 전령에게 맡기고 돌격명령을 내렸다. 성규는 잽싸게 언덕을 차고 올랐다. M16을 자동으로 지향사격을 하며 적의 진지를 향해 올라갔다. 적은 다수의 전사자를 버려두고 도망을 갔고, 도망가지 못한 부상병들에게 난도질이 행해지고 있었다. 성규는 참혹한 광경에 고개가 돌려졌지만, 대원들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전우의 죽음에 미쳐 있었다.
뒤이어 3소대도 고지에 올라왔다. 전과를 파악해보니 적 전사 8명 노획무기 Vz59 기관총 3정, RPG-7 대전차 로켓2정, SKS 반자동소총3정 그리고 탄약다수 였다. 위생하사로부터 박상병은 전사자로 메드백(사상자 후송)헬리콥터에 실려 갔다고 보고받았다. 중대장에게 적의 시체와 노획무기 그리고 아군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보고했다. 1소대 사망자 1명, 3소대 부상자 2명이었다. 중대장은 전과에 도취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죽음과 부상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모진 인간이었다.
철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초에 작전명령대로 적의 수중에 있던 고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모두들 부대로 돌아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대대에서 새로운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현 위치에서 숙영을 하고 내일 새로운 작전이 개시 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숙영장비 및 전투식량이 헬기로 보급되었다. 대원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루 종일 전투하고 또 다시 진지작업이냐“우리 중대가 8중대 탄알 받침이냐.” “우리 중대장이 대대장에게 찍혀서 우리까지 고생을 한다.”는 둥. C 레이션으로 저녁을 때우고, 임시로 진지를 만들고 텐트를 쳤다. 쉴 사이 없이 야간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피곤하여 몸 가누는 것조차 힘이 들었지만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날 낮까지 적의 요새였으니 언제 적들이 기습해 올지 몰랐다. 군화를 신은 채로 잠시 쉬었다가 순찰을 돌곤 했다.
아침에 작전회의가 열렸다. 어제의 작전범위보다 훨씬 넓었다. 1킬로가 넘는 개활지에다 늪지대도 건너야했다. 성규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현지의 사정도 모르면서 지도만 검토해서 작전명령을 내리는 대대본부의 작전명령에 분통이 터졌다. 소대장 중에 고참이었던 성규에게 2.3소대장은 한 마디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성규가 나섰다. “중대장님! 오늘은 현 위치에서 대대본부에 적당히 보고를 해주고 방어를 하다가 철수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여기는 8중대 지역이고 어제 올린 전과도 있으니까요. 오늘 작전지역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대원들이 어제 전투에 많이 지쳐있습니다. 특히 저의 소대원들은 어제 죽은 박상병을 추도식도 없이 보내 불만이 많습니다.” “뭐라고? 야 임마! 그게 전투소대장으로서 할 말이야! 1소대장은 나약하고 너무 감상적이야. 그렇게 대원들 눈치보다 전투는 언제 할래.”“어제 잘 싸웠지 않습니까”“안돼! 추도식은 중대진지에 돌아가서 하면 되고. 작전명령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미군에서 LVT(수륙양용차) 두 대를 지원받기로 했다. 어제 혼이 나서 오늘도 놈들은 줄행랑칠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도망 갔을런지도 모르겠다.” 혼자 우쭐대고 있었다. 성규는 얼굴이 붉어졌다. 더 이상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작전이 개시 되었다. LVT 두 대가 가운데 가고, 좌우측으로 1개 소대씩 나란히 공격조를 편성해 옆으로 나란히 서서 전진해 갔다. 개활지의 절반 쯤 지나갈 때였다. LVT 한대가 늪 속에 빠져 헛바퀴를 돌았다. 다른 한 대가 견인을 하려 옆으로 갈 때 숲속으로부터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총과 기관총 알이 탄막을 형성해 날아왔다. 로켓트 폭탄에 맞아 LVT 한대는 화염에 쌓였다. 성규의 소대는 1분대장 황하사와 조장 1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우측을 전진해가던 3소대는 1개분대가 괴멸되었다. 부비추랩을 견디어내는 특수 강철판으로 둘려있고,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LVT도 늪지에 빠지니 적의 매복공격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삼면에서 날아드는 총알에 공격방향을 잡지 못했다. 모든 공격조는 논두렁에 엎드려 응사를 했지만 허공중에 총질이었다. 후퇴도 쉽지 않게 되었다. 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미군 앵글리코맨(항공, 함포 연락원)이 항공 연막을 요청했다. 온 벌판이 연막에 뒤뎦혔다. 그 동안 손을 못쓰고 발만 동동굴렸던 사상자 들을 빨리 수습하고 퇴각했다. 전날은 연막탄으로 승기를 잡았고, 그날은 연막탄으로 패배의 갈무리를 했다.
참패였다. 한국군 12명사망, 미군 3명사망 중경상 7명 LVT 1대 전소. 그날 늦게 중대 진지로 돌아왔다. 다음 날 사망자의 짐을 정리했다. 편지, 사진. 황하사와 박상병이 다낭에 외출 가서 샀던 기념품 등 유족에게 보낼 유품을 포장했다. 관품함에 붙어 있던 여배우 윤정희, 남정임의 사진과 속옷, 위장복, 군화 등을 같이 태웠다. 소대 막사 앞에 두 사람이 썼던 M16소총에 착검을 해서 땅에 박고 그 위에 철모를 얹혔다. 철모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총알 접근 금지구역” “순희야 쪼깨만 기다려라.” 소대 묵념! 그리고 진혼가를 불렀다.
짙푸른 정글에 젊음을 태우고
나 이제 떠난다 저 먼 곳으로
전우들아 잘 있거라, M16아 잘 있어라
간다 간다 꿈에 그리던 내 고향으로
언제부턴가 호이안 해병대 대원들 사이에 불려졌던 노래였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 노랫말을 부친 노래였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작곡한 푸른 도나우 강의 잔물결의 주 멜로디에서 따온 곡이었다. 원곡은 경쾌한 왈츠곡인데 일제강점기 침울한 민족의 분위기에 애조 띤 노래가 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분대장님” “상용아! 박상용.”성규가 1소대를 맡아서 6개월째 처음 발생한 사망자였다. 대상이 애매한 분노가 치밀었다. 황하사는 침착하고 기민하여 첨병분대장 역할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해냈다. 그 동안 수많은 매복 정찰에도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은 황하사 덕이었다. 박상병은 빠릿빠릿하고 눈치가 빨라 소대본부요원으로 뽑혀서 유탄발사기 사수가 되었다. 이웃부대에 복무했던 남진의 히트곡 ‘사랑의 이름으로 그리운 눈동자로‘를 흥얼거리며 분위기를 돋우던 흥이 많은 병사였다. 성규는 그 날 유탄발사기를 세 번째 발사하기 전에 끌어내려 앉히자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소대장실에 들어와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 해 시월 말이었다. 베트남에 온지 7개월이 흘렀다. 성규는 그 사이 대대의 고참 중위가 되었다. 후임 장교가 오면 소대장을 넘겨주고 부중대장 아니면 대대본부 참모부서로 가게 되어 있었다. 소대장으로서 마지막 작전이었다. 중대는 중대기지를 헬기를 타고 떠나 작전지역으로 이동했다. 베트콩이 출몰했던 지역이었다. 호이안의 해안이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닷가였다. 남중국해에서 수수만년 불어왔던 해풍이 모래를 날러주어 모래언덕이나 모래톱이 많았고, 석호가 발달되어 있었다. 야자수가 늘어진 열대의 풍경이 고갱이 만년에 보냈다던 타히티의 섬과 같았다. 전쟁이 없었다면 열대 낙원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에 성규는 잠시 잠겼다. 잉크 빛의 짙푸른 바닷물에 모래알을 간질러주듯이 파도는 잔잔했다.
군용헬기가 모래사장에 군인들을 내려주면서 평화로움은 깨졌다. 해안을 따라가면서 탐색작전은 계속되었다. 무더위에 수통에 담아온 물을 다 마셨고, 비 오듯이 땀은 흘러내렸다. 개울이나 논이 나오면 가리지 않고 물을 담아서 마셨다. 개구리나 작은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물속에 독이 들어 있지는 않아 보였다. 물을 소독하는 정수제를 넣어 마셨다. 일사병을 막기 위해 정제 소금을 서너 알 입에 털어 넣었다. 위장복에 허옇게 소금기가 배어났다.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세 시간을 탐색하고 점심식사를 했다. C 레이션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빈 깡통에 고체연료를 태워 끓인 라면으로 허기를 때우고 다시 작전을 계속했다.
뜨거운 복사열을 뿜어대는 모래밭과 뾰족뾰족한 선인장 가시를 피해가며 크고 작은 동굴을 뒤져나갔다. 오후 세시쯤이나 되었다. 한 대원이 삼십대가 넘어 보이는 여인을 끌고 나왔다. 땀에 절은 베트남 사람들 특유의 역한 체취가 났고. 양손에 PP 전선줄로 엮어 만든 그물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한쪽에는 닭 세 마리와 다른 한쪽에는 돼지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베트콩 가족이었다. 그 동굴에 가보니 베트콩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간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앞에 갔던 선임하사와 2분대장이 왔다. 부대위치도 노출되었고, 포로로 보고해 이송하기도 불편하니 처치해버리자고 했다. 성규는 ‘소대장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먼저가라’했다. 대원들 먼저 보내고 뒤로 처졌다. 대원들은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안쓰러운 눈빛을 주며 앞서갔다. 마지막 대원이 벵갈보리수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아무도 보이지 않게 끔 바나나 나무 아래로 잡아끌었고, M16 자물쇠를 풀었다. 사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바나나 나무를 향해서 두발을 쐈다. 나무가 휘청이며 넘어졌다. 그 여인은 그제서야 공포(空砲)라는 것을 알았다. 성규가 묶인 줄을 풀어주며
“리이 리 바” (가시오 아주머니)
“깜온 깜온”(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그 여인은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모래밭을 맨발로 달려가 금새 흔적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소대간부들과 전령이 베트콩 여인의 처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었다. 성규는 ”소대장이 알아서 처지했다.“고 만 했다.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 날 밤 논밭 가운데 얕은 언덕을 이용하여 임시 방어진지를 만들고 야영준비를 했다. 야간 불침번을 세우고 자리에 누웠지만 성규는 여러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우리 부대의 이동 방향을 알았을 것인데, 혹시 베트콩들이 역이용을 하지는 않을 것인지? 중대장 말대로 나는 너무나 감상적이지는 않은지?’ 자정이 가까울 시간 때 쯤 두두득하며 AK자동소총 날라오는 소리가 길지 않게 들렸다. 아군의 초병들도 응사를 하고 간단하게 교전이 끝났다. 야간 기습치고는 싱거웠다.
먼동이 텄다. 중대 진지 맞은 편 물 고인 논 언덕에 하얀 프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나무 양쪽에 걸려 있었다. 부비추랩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갈고리를 먼 곳에서 던져 끌어내렸다. 빨간 글씨로 쓰여 있었다. 엉성한 한글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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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국민과 한국국민은 힌 형재입니다.” (한 형제를 잘못 썼다.)
월맹정규군에는 북한 고문단이 파견되어 있어 한국군 포로 심문도 했고 한국어로 선무방송을 했다. 귀순하라는 삐라도 가끔 뿌렸다. 그 작전에 주월사령부에서 감독관이 나와 있었다. 감독관은 성규를 극찬하며 주월사령관의 복무방침을 확인해 주었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역설로 그만큼 민간인 학살이 베트남 전쟁에서는 많이 자행되었다. 중대장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 중위가 월남여인을 살려주어서 우리중대가 무사하게 됐다”면서.
논이 끝나는 산자락에 야자수가 늘어져 있었고, 그 뒤로 대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졌다. 대나무과 야자수 사이에 유도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침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밀물시간이었다. 상큼한 바다 기운이 밀려왔다. 나무 가지와 대나무 잎과 꽃이 어우러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첫댓글 작가 이준태의 또다른 전쟁소설 잘 읽었네.하얀전쟁을 읽는거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잘읽었네.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잃은 한마리의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사명을 다하는 해병의 인간애를 느끼게하는 작품.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많은 자료를 접했는데 재미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베트남전을 인터넷에 치면 짜빈동 이야기가 나오더구먼 짜빈동 이야기를 열번도 더 읽었어. 주인공 강중위의 소대에 남진이 있었는데 두어달 같이 생활했다고 했
남진이 이야기 까지 넣으면 이야기가 길어져 단편으로는 안되지. 그래서 남진이야기는 넣지 않았다.
준태 작가님 수고했어요! 긴장감 속에서 한번에 쭉 읽었는데 끝이네요. 새로운 장르 개척 축하합니다.
왠 새로운 장르 입니까? 다시 베트남 이야기를 쓸일이 있을 까요. 격려주신 덕에 졸작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다음 만날 때 베트남 전쟁이야기 하면 재미 있겠어요. 제가 이번에 소설 준비하면서 접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지인의 월남전 참전 스토리를 기본으로, 단편소설을 구상하고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 많은 자료를 읽고 참고 하였다니 그 노력이 대단합니다. 한편의 전쟁영화를 보는 듯 실감이 납니다. 지난번 다낭 가족 여행때 호이안을 다녀왔기에 소설속의 전쟁터를 상상하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옛날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에 관한 흔적은 찾아 볼수가 없었으며 당시 미군 헬리콥터 벙커 흔적만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국군에 대한 안좋은 기억거리를 남겨둘리가 없었겠지요. 지금은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우호적입니다.
오호 호이안을 다녀오셨군요. 제가 이소설을 쓰는 동안 오른쪽 모니터에는 구글맵이 열려져 있었지요. 매일 다낭 호이안, 짜국강, 짜봉강을 보면서 소설을 써내려 갔습니다. 제가 베트남에 가서 장기 체류했던 곳이 나짱이었는 데 나짱은 다낭보다 훨씬 아래고 이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지요. 베트남 전에는 나짱에 미군들 휴양소가 있었다고 하지요.
다낭은 가보지 못했어요. 아마 다낭도 나짱같이 아름다운 해안도시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한국 사람들 인기가 아주 좋지요. 나는 사이공(호치민)에서 택시 운전사가 제 집에가서 밥을 먹자해서 따라 간 적이 있어요. 좋게 생각했어요. 똥배장도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