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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궁궁통1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일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와
무척 닮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사막 지형입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광야가
국토의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상당수가 사막 지형의 광야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푸른 초지가 나온다. 백성호 기자
게다가
물도 부족합니다.
동쪽의 요르단강을
제외하면
물이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남쪽은
황량한 느낌입니다.
북쪽은 다릅니다.
차를 타고
갈릴리 호수가 있는
북쪽으로 올라가면
조금씩,
조금씩,
황량함이 초록으로
바뀌어 갑니다.
마침내
갈릴리 호수에 닿으면
바다 같은 호수와 푸른 언덕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이 언덕에서
산상수훈을 설했다고
전해집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초록이 무성하다. 예수는 이곳에서 하늘의 뜻을 전했다. 백성호 기자
그래서일까요.
산상수훈에는 뭐랄까,
생명의 푸릇함이
구절마다 감도는 게
느껴집니다.
산상수훈에 담긴
여덟 개의 복,
팔복 중에서 네 번째 복을
차동엽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궁궁통2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예수님은 ‘의로움’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로워지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설하신
‘의로움’이 대체 뭘까요.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된 사람들.
그들이 의로운 사람이겠지.
중세 때
기독교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교도와 싸웠던 숱한 사람들.
그들이 의로운 사람이겠지.
한국전쟁 때
공산주의 치하에서
인민군의 회유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사람들.
그들이 의로운 사람이겠지.
의로움 사람들, 하면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주로 떠올립니다.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구역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무장한 채 순찰을 돌고 있다. 백성호 기자
무언가
싸움이나 전투가 있고,
거기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
그런 곳에서
의로움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설하신 ‘의로움’은
이런 식의 의로움과
많이 달랐습니다.
#궁궁통3
차동엽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꽤 놀랐습니다.
왠지
의로움, 하면
싸움·전쟁·정의 같은 뜻이
담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에 부합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에 맞아떨어지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에 부합하고,
무엇과 맞아떨어진다는
뜻일까요.
차 신부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양심에 충실했느냐’였다.
모세 때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가, 아닌가의
기준이었다.”
차동엽 신부는 생전에 십계명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답했다. 중앙포토
제가 물었습니다.
“십계명의 알맹이가 뭔가?”
차 신부가 답했습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재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님께서 뒤집었다.”
“어떤 식으로 뒤집었나?”
“사랑으로 뒤집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건 율법의 격식을 파괴하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의로움의 잣대로
‘사랑’을 명시했다.”
#궁궁통4
의로움, 하면
사람들은
목숨을 거느냐, 아니냐를
떠올립니다.
그게 아니더군요.
예수께서 설한 의로움은
무언가에 맞아떨어지는걸
의미하더군요.
창세기에는
신이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속성을 본떠서
인간을 지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때는
신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이
서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그 속성에서 멀어집니다.
갈릴리 호수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호수 위를 새들이 날고 있다. 백성호 기자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왔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체다카라고 불리는
‘의로움’은
무엇과 맞아떨어지라는
뜻일까요.
그렇습니다.
신의 속성과 맞아떨어져라,
하느님의 속성에 부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을
말했습니다.
신의 속성,
하느님의 속성이
다름 아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품고,
그런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면서,
우리 모두가
신의 속성을 회복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궁궁통5
차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의로움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이념에 갇혀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의로움과
사랑이 깔린 의로움.
둘은 무엇이 다른가?”
차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뗐습니다.
“둘은 격이 다르다.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다르다.
부드럽고 따듯하다.
상대방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차 신부는
구체적인 예를 하나
꺼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이야기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 날 위험이 있음에도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를 보라.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 날 우려가 있음에도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주위에서는
죽이자는 의견도 있지 않았겠나.
그러면서
안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
그에게는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
안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주춧돌 위에 선 정의,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이 말 끝에 차 신부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의로움은
투사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이름 없는 소시민도
삶의 뒤안길에서
주워 올릴 수 있는
참 행복의
비밀이기도 하다.”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나의 속성이
신의 속성과
찰, 칵, 찰, 칵
맞아떨어질 때,
우리 안에서
밀려오는
근원적 평화.
세상에 그보다
값진 행복이 있을까요.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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