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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천(愛泉)
김 채 원
소자는 愛泉자를 읽지 못해 애, 애 하며 거리의 인파 속에 서서 길 건너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밖으로 쏘다니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람에 튼 가무스름한 얼굴에는 애어른 같은 설익은 표정이 서리어 있다. 아이의 조그만 몸은 밑으로 내리누르는 듯한 커다란 웃옷 탓으로 더욱 작아 보이는 반면, 이제까지 눈이 가 닿은 곳, 스치는 생각 경험한 놀이 등에서 얻어진 어떤 것이 자연스러이 그 존재를 형성해주고 있다. 아이는 한동안 간판그림에 몰두해 있다가 참 재미있는 영화겠구나 하는 결론을 얻고는 차가 밀리는 거리를 건너갔다. 아직 오전의 이른 시간이어서 극장 앞은 한산했고 매표구 주위에 뿌려놓은 물이 엷게 얼어 있었다. 소자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어 매표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른이 사 오라고 시켜서요. 표 파는 점원이 이상한 눈초리를 던지면 곧 이런 말을 할 것처럼 보였다. 마침 뒤이어 표를 사러 온 중년부인의 옷자락에 묻어들 듯이 극장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재미로 내 표는 내가 내요, 그런 얼굴로 표 받는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통과했다. 이제 국민학교를 졸업 한 아이는 극장에서 한 번도 걸린 일이 없다. 극장에 들어가는 데 온갖 꾀를 동원했다. 때로 바쁜 듯 뛰어 들어가 표를 내밀며, 조금 전 머리를 올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부인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물었다. 그 여인이 자신의 보호자이며 어찌하다 잠깐 혼자 뒤처졌다는 듯이. 그러면 표 받는 사람은 무표정 하게 으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휘장을 들치고 장내에 들어서자 이태리 특유의 눈부신 햇빛이 화면 가득히 쏟아지고 귀에 익은 멜로디가 햇빛 속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터지려는 가슴을 억제치 못해 아이는 두 손을 마주 잡아 눌렀다. 동시에 애, 애 하고 애(愛)자밖에 읽지 못하던 간판의 다음 글자가 저절로 알아졌다. 바로 애천의 주제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소자는 그 주제음악을 여러 해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으며 영화가 얼마나 좋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하고 있었다.
쓰리 코인즈 인 더 화운틴 뎃즈 와이…… 승일은 노래 불렀다. 승일의 노래뿐 아니라 라디오에서도 그 곡은 자주 나왔다. 영화가 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노래는 유행하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샘 속의 세 동전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어느 거리에 가면 소원을 말하며 동전을 던져 넣는 분수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그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소자는 비망록 속에 애천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샘에 가서 동전을 던져 넣어보리라 생각했었다.
소자의 비망록 속에는 아름다운 여배우의 사진, 남배우의 사진, 영화 속 어느 장면 아늑한 실내, 아름다운 식탁과 찻잔, 황혼을 받으며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부인 등의 사진이 붙여져 있는가 하면 이다음에 커서 입을 옷, 예를 들어 애심의 지키타가 정원에서 아이와 공놀이할 때 입던 옷, 백조에서 그레이스 켈리가 칼싸움 연습할 때 입던 옷, 애수의 비비안 리가 입던 바바리 등이 서투른 그림과 함께 메모되어 있다. 또 사랑의 기쁨, 쇼팽의 이별곡, 트로이메라이, 은파 같은 노래 제목들이 적혀 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미뇽의 노래는 학생잡지 부록으로 나온 세계명곡선집 중에서 찢어내어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삽화도 곁들여져 있는데 특히 미뇽의 노래 삽화를 소자는 사랑하였다.
들판에 마차가 한 대 서 있고 멀리로 길이 보이며 어느 아름다운 처녀가 정면을 향해 우수 어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림이다. 처녀는 남쪽나라로 가다가 잠시 들판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나라를―노래의 첫 한 구절만으로 소자는 세상을 전부 이해하고자 했다. 처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처녀가 가고 있는 곳을 상상해보았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온갖 것들이 있는가, 모든 것이 향긋하게 봄바람처럼 날리고 그리고 사랑을 만나겠지, 상상력을 굴려 가다보면 처음의 싱그러움이 없어지고 어쩐지 힘없이 수그러져버렸다. 그것은 소자가 더 어린 시절 어린이들만이 사는 나라로 가려 하던 때 상상력의 한계와도 같았다. 떠나는 출발의 마당에서만 항상 용솟음치는 가슴을 가졌을 뿐 정작 어린이들만이 사는 나라에서의 기쁨을 상상 속에서나마 누려보지 못했다. 어쩐지 물이 먹고 싶어지고. 어두워지면서 온몸이 추워지며 창으로 불빛 이 내리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 누래에서도 역시, 저 남쪽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기쁨을 얻지는 못했다. 왠지 그곳에는 영화의 결말에서 언제나 보여주고 마는 슬픔이 있으리라는 예감이었다.
비망록 속에는 소자가 보았던 영화제목들이 몇 페이지를 넘기도록까지 끝이 없을 듯 적혀 있기도 했다. 제일 첫 번 칸에 적힌 것은 녹원의 천사였다. 다음이 7인의 신부, 7인의 신부는 승일, 형자와 함께 보았다. 어머니는 승일에게 돈을 주며 동생들을 데리고 가서 영화를 보라고 했다.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는 녹원의 천사를 보고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했기 때문이다. 너희들 돌아올 때 비프스테이크를 먹어라, 애들한테 꼭 양식을 한번 먹여줘라, 라고 어머니는 승일에게 당부했다. 그 기억은 소자에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양식집의 아늑하고 깨끗한 분위기, 묵중한 식탁 위의 호사스러움, 반짝거리는 스푼과 나이프 불빛,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 이 세상 내가 모르는 곳에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감당하기 힘들던 느낌이 영화 7인의 신부를 떠올릴 때마다 저절로 달려 붙는 인상으로 소자에게 남아 있다. 그 후 춤추는 대뉴욕을 승일과 함께 갔다. 그리고는 거의 소자 혼자 다닌 영화들이다. 간혹 집에 오는 손님에게 아이는, 무슨 영화를 보았느냐 여배우는 누가 좋고 남배우는 누가 좋으냐, 어머니와 얘기하고 있는 틈새에 끼어들어 기회 있을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손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좋다고 말했다. 그 깨끗한 순진성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이는 갑갑함을 느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의 누구로 말하는 것에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또 다른 영화에서는 다른 배우가 좋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손님은 뒤이어, 아따 너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가게 못하는구나라고 핀잔을 주었다. 여중 입시에 낙방을 한 탓으로 아이는 재수하고 있었다. 식구 중 아무도 소자에게 공부하라고 야단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승일에게만 공부할 것을 강요했다. 세월이 퍼뜩퍼뜩 가는데 맨날 허얼썩 허얼썩 다니기만 하면 어떻게 한다는 거냐, 일찍 들어와서 공부를 좀 해라, 아코디언인가 하는 것은 그게 얼마냐, 그렇게 비싼 걸 철딱서니 없이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니. 어머니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어둠 속에서 느끼며 소자는 기타나 북(鼓) 혹은 다른 악기면 좀 싸지 않을까, 승일은 왜 하필 제일 비싼 것으로 산다고 할까, 생각했다. 어머니가 며칠째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림에도 승일은 아코디언을 꼭 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우쿠렐레라고 하는 장난감처럼 작은 악기를 가지고 있다. 기타와 같이 생긴 나무통에 줄 네 개가 달려있는 것으로 소리는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푸른 색깔이 칠해진 그 작은 악기를 어루만지듯, 승일은 노래를 불렀다. 짬볼
라, 쎄븐 론리 데이, 아이 웬 투 유어 웨딩, 잇즈 올머스트 투머로우,
돌아오지 않는 강, 투 영, 무랑루즈의 노래, 앤서 미 오 마이 러브, 하이눈 주제가 등의 영어노래, 또 벼슬도 싫다마는,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결어갈 때, 울고 넘는 박달재, 미사의 종을 즐겨 불렀다. 소자가 영화 보는 일이 힘 안 들고 자연스럽듯 승일도 노래 부르는 일이 그랬다. 만성기관지염으로 하여 승일은 늘 가래를 뱉어냈고 그로 인해 성대 역시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노래를 진정 사랑했고 눈을 감고 부르고 또 불렀다.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니, 사람이 속에 든 것이 없으면 남한테 업신여김 받는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말은 잔소리를 지나쳐 히스테리성을 띠었다.
소자의 기억으로 승일이 가죽점퍼를 살 때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며칠이고 계속해서 화를 냈고 거의 죄악시하는 감정으로까지 끌고 가더니 하루는 승일과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승일은 허리를 죄는 듯한 가죽점퍼를 입고 돌아왔다. 중고품이라고 했으나 가죽에 새로 칠을 하여 새것이나 다름없어 보였고, 안에는 양털까지 달려 있었다. 허리 밑으로 내려오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조금 추워 보이고 조금 깍쟁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승일의 기름을 발라 쓸어 넘긴 숱 많은 머리와 미남형의 갸름한 얼굴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너는 배우가 되라, 영화감독이 되는 게 어때? 어머니가 승일에게 상의하듯 물었다. 너네 오빠 뭐 하는 사람이니, 동네아이들이 물으면, 음 영화배우가 될 거야라고 소자는 말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마 그래, 너네 오빠 어쩐지 그런 사람 같았어, 하고 말했다. 승일은 아직 소자가 본 적이 없는 제임스 딘이라는 배우에 대해 자주 얘기했고, 몽고메리 크리프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놈은 연기를 순전히 자기 스타일로 하지, 이제까지 없는 새로운 스타일로 말이야, 어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돈을 꺼내는 동안에도 참지 못해서 몇 번이나 손을 움찔움찔 하고 몸을 가만두질 못해. 승일은 제임스 딘의 연기를 흉내 내어 식구들에게 보여줬다. 승일 자신은 몽고메리 크리프트형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긍정적인 표정으로 듣고 있다. 그놈은 겁이 많아가지고 눈에 늘 겁이 있어, 눈으로 연기를 다 해 이러옇게―그래 흉내 하나는 잘 내는구나, 어머니는 때로 시름을 잊은 듯 마음 놓고 웃기도 했다.
화면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음악은 여전히 흘렀다. 제목도 모르는 채 우연히 들어온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던 영화를 보게 되는 기쁨으로 아이는 화면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화면은 가다가 맥이 풀린 듯 툭 끊어져버리기도 하고 비가 오는 장면이 아님에도 비가 오듯 낡아 있었다. 이른 시간이어서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는데, 소자는 잠시 장내를 둘러보며 무감각하게 앉아 있는 관중들의 모습을 둔하게 느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혹은 자신이 나타나고 싶다는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마치 버스가 극장 앞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비치는 극장 간판을 승객들이 기웃거리지 않고 그대로 무심히 등을 돌린 채 실리어 가고 있는 모습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소자는 일부러 몸동작을 크게 하여 차창 밖으로 극장 간판을 내다보며, 아 지금 저 극장에서 무슨 영화를 하고 있구나, 그리고 다음 프로는 뭐구나, 며칠까지지? 가봐야지, 하는 말을 얼굴에 나타내려 애썼다. 옆 사람이나 앞에 앉는 사람이 신문을 보는 경우에도 그랬다. 신문광고란의 영화광고를 보려고 고개를 빼며, 영화광고는 보지 않고 재미없는 글자만 읽고 있는 사람들을 무취미하게, 거진 분노까지 느꼈다. 수많은 무덤덤한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가야 할 자신의 인생을 힘겹게 여겼다.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 가로수 나뭇가지 사이로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첫 회 도중에 들어가 3회째에 나온 셈이다. 재미없는 영화일지라도 대개 2회까지는 보았다. 애천은 소자의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주제가를 들으며 미리 상상하던 것과 달리 스토리는 의외로 단순했다. 배우들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프랑소와즈 아르 눌, 마리나 부라듸, 실바나 망가노 같은 여자의 매력을 소자는 알고 있었다. 어깨 위에 탄력 있게 걸려 있는 검은 속치마 끝과 스타킹의 마력을 벌써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멋진 세계가 거기에 있구나 하는 그 이상한 느낌은 크러나 자칫 어떤 혐오감을 동반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조금씩 징그럽게 생각되기도 하는 시기였다. 어머니와는 절대로 목욕탕에 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주제가의 음률을 따르듯 걸으며 소자는 이다음 로마에 가서 던져 넣을 동전에 대해 생각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무슨 소원을 말할 것인가, 그 순간 어떤 광휘가 분수 속에서 피어오르며 찬란하게 삶을 채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뿜어 오르던 물줄기가 푸슬푸슬 약해지며 어쩐 일인지 다리에 힘이 빠졌다. 시장 입구의 큰 한길가로 어머니가 오고 있었다. 황혼을 받은 그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황혼은 어머니라는 대명사를 거치지 않고 맞바로 뚫고 들어가, 그들 남매들의 어머니라기보다 예부터 내려오는 어떤 혈통을 이어받은 한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그것은 소자에게 태어나기 전 시간의 심연을 느끼게 했다. 어머니의 어머니, 까마득한 옛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일까, 다가가서 부른다고 해도 얼른 알아차릴 것 같지 않았다. 금은방이 몇 집이고 계속해서 늘어섰고, 쇼윈도의 기다란 형광등이 요란스레 껌벅이며 켜지고 있었다. 소자는 쇼윈도에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솜 속에 파묻혀 있는 옥반지와 금 은 비녀, 각종 이름 모를 보석이 박힌 반지와 목걸이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다음 집에 가서도 들여다보았다. 어느 한 가지 똑같지 않고 색깔, 모양이 모두 다른 것이 흥미로웠다. 운동구점은 그냥 지나쳤다.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텁텁하고 빛이 없고 심지어 아파 보이기도 했다. 소자에게는 고무다리와 고무손을 파는 집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다음은 수예품점, 그러고는 이발소, 이발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달러장수들이 서 있는 좁은 골목이 나온다. 소자는 되도록 그곳에 가지 않지만 간혹 어머니를 찾으러 가게 되면, 여러 얼굴들 틈에서 하나의 얼굴, 낯이 익으면서도 언제나 너무 뜻밖인 얼굴을 대하게 되었다. 어마어마 누구지? 하고 있는 사이 음 엄마로구나, 알아차리곤 했다.
음식점, 자전차점을 지나고 악기점 앞에서 소자는 멈추었다. 쇼윈도에는 북, 클라리넷, 기타 그리고 아코디언도 있었다. 아코디언은 소자가 생각했던 대로가 아닌 어쩐지 상이군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 놓은 것보다 작고 서정적 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앗빛 건반은 불빛을 받아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승일이 그것을 둘러멘 모습을 상상했다. 안 되는 것일까. 소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승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음습한 밤들처럼 그의 앞에는 엄격한 생존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는 것일까. 앙상한 가로수 밑 손수레에서 소자는 상한 오렌지 하나를 샀다. 수레에는 보기 좋은 싱싱한 오렌지들이 가득 실렸고 한쪽에 상해가는 물건도 있었다. 그것을 하나 잡고 값은 절반만 내었다. 가끔 이렇게 뜻 아니한 물건, 맛은 같지만 훨씬 싸게 파는 물건을 만나면 아깝지 않게 얼마든 맛을 즐길 수 있다. 소자는 오렌지를 먹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화려하게 차린 젊은 여인들 뒤를 싫증이 날 때까지 따라갔다. 흰 칼라를 빳빳이 풀 먹여 입는 단정한 여학생들을 따라 걸었다. 그들의 운동화가 깨끗하고 걸음결이가 얌전한 것, 가방을 쥔 손에는 손수건까지 들려 있는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여학생들은 간혹 서로 마주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단발머리를 흔들며 왠지 얼굴을 붉혔다. 낙방만 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같은 여학생이라는 생각은 못한 채 소자는 스스로를 어린이로 착각했다. 어머니의 헌 반코트를 땅에 닿을 듯이 입고 상해가는 오렌지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또한 자신은 여학생 시절을 거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어른으로 건너뛰리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거대한 흐름, 자신의 생각이 미칠 듯하면서도 무엇인지 확실히는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거부감에서였을까. 종종 사람들이 징그럽게 여겨지고 때로 가족이 몹시 싫어지는 심정과 통하는 것일까. 때문에 소자는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왜 또 꾀죽해 있니, 재가 저러는 통에 죽겠어? 왜 그러니 대답해봐, 라고 아이가 대답할 때까지 다그쳤다. 절대로 여학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 생각도 금방 지나쳤다. 거리 한가운데 서서 교통순경은 열심히 팔을 들어 올리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차들은 붕붕 시동을 걸고 클랙슨을 울리고, 버스들은 뒷구멍으로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때로 멈추어 섰다가 일제히 구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상이군인이 바짓가랑이를 주머니처럼 늘이고 목발을 짚고 지나갔다. 구두닦이 소년, 껌 파는 소년, 신문 파는 소년들이 아무 골목에서나 총알처럼 튀어나오고, 누군가 피가 흐르는 손을 감싸 쥐고는 물렸다아 물렸다아라고 외치며 뛰어갔다. 전봇대에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덩이가 한순간 쏟아졌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 새로 포장한 볼타르 냄새가 번져왔다.
어머니는 어두운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었다. 희뿌연 한 전등은 움푹 파인 검은 소쿠리 같은 부엌바닥에 스산한 빛을 뿌렸다. 어머니는 시장입구의 그 한길로 해서 집으로 곧장 돌아온 것일까, 갑자기 어머니를 모른 척한 데 대한 자책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항시 좀 성을 내려는 듯한 느낌을 아이에게 주므로 마음 놓고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소자에게 파 마늘을 다듬게 했다. 천장에서부터 고무줄에 매달아놓은 바구니에서 큰 멸치 몇 마리를 꺼내어 찌개 속에 넣었다. 소자가 까놓은 마늘 두 쪽을 칼등으로 찧어 함께 넣었다. 냄비뚜껑을 열자 이제 막 끓기 시작한 김치찌개의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어머니는 저녁상을 들고 찬실을 지나 ㄱ자로 구부러진 마루를 거쳐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ㄱ자로 구부러진 마루를 지나지 않고 안방을 거쳐 건넌방으로 갈 때도 있다. 안방은 크고 불이 잘 들지 않아 겨울에는 버려두고 있다. 반찬은 김치찌개와 무말랭이, 버터였다. 버터를 하루에 어느 분량 정도 먹으면 영양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버터가 제일 칼로리가 많대는구나, 어머니는 어디선가 듣고 온 얘기를 아이들에게 전했다. 이제 영양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듯이. 뜨거운 밥을 퍼먹으며 그들은 가족이라는 것의 결속을 쇠사슬 고리처럼 느꼈다.
저녁 후 밤에 잠들기까지 여느 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형자는 윗목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어머니는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 가끔씩 기침을 심하게 했다. 기침소리는 독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 같았다. 어머니는 밤이면 기침을 많이 했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승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이제 밤이 깊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욕을 먹기 위해 어두운 방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바로 앞산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엉 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에 어둠은 집중적으로 몰린다. 어듐은 예측할 수 없이 짙게 쏟아져 내리고 모든 것을 잡아먹어 버리고 단지 어디선가 등불이 하나 둘 셋 넷 더욱 맑게 깜박거린다. 집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크게 울려 자칫 발 하나가 들창을 뚫고 들어올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 목을 내두르며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렸다. 소자는 갑자기 배가 아파서 형자에게 변소에 갈 것을 청했다. 참을 수 없니라고 형자는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할 수 없이 남포에 불을 켰다. 그들은 방문을 열고 마루문을 연 다음 찬바람 속에 나섰다. 갑자기 입은 옷들은 뻣뻣하게 몸에서부터 뜨고 머리카락도 일어섰다. 신문지와 가슴으로 바람을 막고 있지만 중도에서 남폿불은 꺼져버렸다. 그을음이 섞인 석유냄새가 덩어리지며 코끝에 몰려들다가 한참 만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다시 방으로 되돌아와 남포에 불을 붙였다. 마당으로 무너지듯 드리운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무엇인가 떨어져 내리고 산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바람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아이들의 등을 세차게 밀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등불이 어둠과 바람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흐르는지 모르는 채 아이들은 오직 무서움에 질려있다. 승일의 방이 있는 아래채 뒤편에 변소는 따로이 돌아앉아 있어 후미진
골목으로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아이들은 봄이 되면 그곳 담 밑에 코스모스를 심어놓기도 하지만 모래땅이어서인지 잘 자라지 않았다. 변소 마룻장은 조금씩 흔들리기 때문에 용변을 볼 때마다 불안했다. 허나 누가 소제하는 것을 본 일도 없는데 항시 청결했다. 아이들은 때로 그곳을 예배당으로 정하고 앉아서 찬송가를 불렀다. 변기가 있는 칸의 유리문을 닫아버리면 변소 입구 남자 변기가 놓인 쪽의 조그만 공간은 엷은 나프탈렌 냄새를 풍길 뿐 충분히 작고 아늑한 방이 되어주었다. 소자가 용변을 보는 동안 형자는 남포를 든 채 밖에 서서성였다. 유성이 검은 거적을 쓴 지붕 위로 흘렀다. 남폿불은 어둠 속에서 흔들렸고, 소자는 주저앉은 채 남폿불이 만들고 있는 그림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니라고 형자는 묻기도 했다. 그 반대일 경우도 있었다. 소자가 남폿불을 들고 형자를 재촉하고 형자가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은 이제까지의 긴장으로 온몸의 신경줄이 끊어질 것 같다. 참고 마루문 앞까지 와서 후닥닥 뛰어들면 신발은 저쪽으로 벗겨져 나가고, 아이들은 이미 꺼진 남폿불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채 아랫목에 폭 꼬꾸라졌다. 잠들어 있
던 어머니가 놀라서 눈을 떠보고 기침을 한 후 다시 잠 속에 빠져 들었다. 형자는 숙제를 계속하고 소자는 어머니 곁에 드러누워 잠들기까지 생각할 영화 한 편을 마음속으로 정했다. 그것은 밤마다의 습관이었다. 새로이 음미해가노라면 어느새 여주인공 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다. 그러고는 점 점 그 영화 스토리에 말려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슬픔 속에 내맡겼다. 밤이 깊어질수록 들창으로 뿜어나가는 불빛의 강도는 더해가고 집으로 돌아오던 승일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승일이 아코디언을 산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쯤 지난 봄날이다. 어머니는 승일과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고 그날 승일은 크고 무거워 보이는 검은 악기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어머니의 마음이 돌아선 것은 승일이 악기 사는 것을 단념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승일이 아코디언을 사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안 사겠다고 하니까 오빠가 불쌍한 생각이 들잖아. 어머니는 의논의 상대라도 되는 듯 소자에게 말했다. 그로부터 돈을 모으는 데 두 달여나 걸렸다. 악기상자는 모서리 부분이 닳아 그 안의 나무가 조금씩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쇠고리를 끌러 뚜껑을 열자 상앗빛 아코디언이 빛을 내고 있었다. 건반뿐 아니라 악기 전체가 상앗빛이었다. 소자가 쇼윈도로 들여다보던 바로 그 악기일까. 승일은 조심스러이 꺼내어 어깨에 걸었다. 새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훌륭했다. 브으악 브으악, 부챗살 같은 부분에 바람이 넣어졌다 꺼졌다 하면 건반에서는 풍금소리 비슷한 물바람소리가 났다. 스웨덴 영화나 서부영화에서 듣던 그런 애상이 깃든 소리는 아니었다. 수십 개의 작은 단추가 달려 있는 부분을 눌러서 내는 반주는 라디오 노래자랑 시간에 듣던 음을 연상케 했다. 조금 현대적 이고 속됐다. 승일은 아코디언을 산 그날부터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노래반주를 서투르게 맞추기 시작했다. 승일의 노랫소리는 바람결을 타고 동네 구석까지 퍼졌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앞마당에 서서 신명 나는 몸짓으로 아코디언을 껴안고 자신의 전체가 휩쓸려 들 듯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자태는 동네를 잡아먹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야 베싸메 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이 세상은 리라꽃 향기로 충만했다. 실지 동네에는 집집마다 라일락이 피어 있어 천지에 꽃향기가 포화상태였다. 담 밖으로 고개를 내려뜨리고 있는, 혹은 담 안 울타리 저쪽 길을 가는 사람이 볼 수 없게 피어 있는 꽃들은 봄의 하루하루를 여름으로 이어가기 위해 간직된 힘을 모두 쏟아놓고 있었다. 뿌리로부터 수분과 자양분을 빨아올리고 햇빛을 받아 잎을 피우며 벌과 나비를 불러모아 꽃을 피우기까지 줄기차게 생명력을 동원시킨다. 그러고는 스스로의 힘에 겨운 듯 지친 듯 조금씩 풀어져 함몰해간다. 바람이 불면 작은 꽃잎들은 한 겹 한 겹 혹은 뭉떵뭉떵 떨어져 날렸고 뽀오얗게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 풍정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어느 승평* 세월에서 떨어져 나와 꽃잎으로 거기서 뒤채이던 것일까.
소자는 서랍장에서 때 이른 얇은 치마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 동안 입던 바지를 허물처럼 벗고 내복도 벗어던졌다. 한꺼번에 바지와 내의를 벗은 탓으로 맨다리에 와 닿은 대지의 감촉이 맵고 생소해서 다리를 오그리고 치마를 자주 끌어내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치마에서 좀약 냄새가 풍기고 있음에도 몇 군데 좀 슨 곳이 햇빛 밑에서 드러났다. 산그늘에 잠긴 집 안은 일거리가 쌓여 있었다. 먼지가 뿌옇게 앉은 마루로 사람이 지나가면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햇빛 속에서 몰아치는 독기 있는 봄바람은 겨울의 찬바람보다 배가 되는 먼지를 실어 왔다. 봄에는 아침저녁으로 마루에 걸레질을 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빨래광주리에 쌓인 빨래와 설거지거리들을 떠올리고 아이는 우울해졌다. 점점 떠맡겨진 일의 양이 많아진 것이다. 어머니는 갈수록 잘 웃지 않았고 몸져눕는 때가 잦았다. 입시에 낙방한 아이를 그대로 버려두는 것도 어머니의 병약한 몸 탓이 아닌가, 어머니는 자신감을 잃은 것일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녁이면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라디오 노래자랑 시간을 듣곤 했다. 또 양훈과 양석천이 나오는 코미디 프로를 들으며 많이 웃기도 했다. 승일이 일찍 돌아와 함께 라디오를 듣는 날이면 축일처럼 즐거웠다. 이상하게도 승일이 함께여야 라디오 프로가 더 재미있었다. 승일은 라디오를 사 오던 날부터 벌써 라디오 프로에 대한 것을 많이 알고 있어서 동생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식구들은 밝은 불빛 속에 둘러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귀 기울였다. 그 많은 라디오 상점의 물건 중예서 가장 라디오 같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고 승일이 말했다. 마(麻)기지와 같은 질감으로 가방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새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깨끗한 물건이었다. 잘 골랐구나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전등불도 그즈음 새로 들어오고 있어서 잠에서 깨이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하나씩 둘씩 살기 좋게 되어간다는 생각이 아이들에게 뚜렷이 들고 있었다. 비가 새어 구멍이 뚫린 천장을 다시 발랐고 깨진 기왓장을 고쳤으며 떨어져 나간 문짝에 고리를 달고 내려앉은 방구들과 밑으루 빠지는 마룻장을 고치는 등 폭탄에 울려 폐허처럼 된 집을 조금씩 정돈해나갔다. 어머니는 피란지에서 돌아온 후 양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질러 메고 우지끈 힘을 쓰며 일어섰던 것이다. 달러장사를 시작했는데 가끔씩 순경에게 쫓겨 한낮의 거리를 개처럼 달리는 때도 있다고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돌아온 형자와 함께 지었다. 형자는 매일 새로운 얘기를 가져왔다. 형자네 반에 한국에서 제일 부자인 아이가 있다고 했다. 걔네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낸대. 골동품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집 아이도 있어. 아무리 너네 반에 그런 애들이 있을까. 소자의 반발에 형자는 주춤했다. 고집 할 근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승일에게 가서 그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대자 그렇다고 인정해주었다. 그래도 소자는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란 다른 어디에 있겠지 바로 형자네 반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또 형자네 반에는 참 고상하고 어여쁜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외국에서 대사를지냈다고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인 수려한 용모의 영어선생은 자주 그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발음의 본보기를 보이게 했다. 영어 발음은 선생 자신보다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아이가 책을 읽지 않고 울어버렸다. 왜 나만 자꾸 시키느냐고 흐느끼며 교복 주머니에서 깨끗하게 다려진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눈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손수건에 이어 다른 쪽 주머니에서
역시 레이스 달린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예쁜 손수건이 양쪽 주머니에 들어 있었어, 하나도 아니고 두 개가, 라고 형자는 말했다. 똥닦개라는 별명을 가진 체육선생 얘기도 있다. 고전무용을 가르친다고 북 치는 소리를 입으로 떵 따깨 떵 따깨,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너너너구리의 너털불알은 바람은 안 불어도 너털너털, 그것을 보고 있던 우리 반 일동은 선생님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학생들은 가사를 만들어 붙인 노래를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했다. 형자는 학교에서 단체로 구경하고 온 영화 얘기를 해줄 때도 있다. 렛트가 떠나는 거야, 갑자기 그 여자를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련테 그 순간 스카렛은 렛트를 사랑한다고 깨달아, 그렇게 깨닫는 데 참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지. 형자의 얘기는 나중에 소자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실지 보았을 때보다 더 감명 있게 들렸다. 형자는 무엇이나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우아한 분위기를 지니는 것은 책을 많이 읽은 탓이라고 소자는 생각했다.
대지를 움트게 하는 바람이 계속 끊이지 않고 산 위에서 불어 내려와 때로 꽃잎을 거두어 다시 산으로 불어 올려갔다. 대지는 매 순간마다 물이 차올라 생동하고 있었다. 땅속에는 지난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썩어가고 있고, 조금만 땅을 파면 습져서 불어터질 듯한 벌레들이 튀어나왔다. 브으악 브으악, 아라비아 공주는 마법사 공주 오늘 밤도 외로이…… 승일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소자는 형자가 하던 말을 상기했다.
오빠 아코디언 있지, 내가 사지 말라고 편지 썼었어. 학교 가면서 오빠 방 문틈으로 밀어 넣고 갔어.
뭐라구.
엄마가 고생하는데 오빠가 악기를 안 사면 안 되느냐구.
소자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양다리 사이에 넣고 몸을 꼬았다. 앙상하게 여윈 두 다리가 나뭇가지처럼 엉컸다. 밝은 햇빛이 어두운 방 속까지 매달려 들어와 소자의 두 눈에는 황금색 불덩이가 여러 개 매달렸다. 온몸에 힘을 주었다. 무서운 전율이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어떤 거센 물살과 같은 그 느낌은 아이의 몸을 나른한 심연으로 끌어넣었다. 모든 것이 쏟아지고 흐르고 팽창되어, 터지며 흘러넘치고 있었다. 온몸의 맥이 저절로 놓아지고 무엇인가 붙잡지 않고는 더 이상 서 있을 힘횰 잃는 순간 눈을 떴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이는 도둑고양이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 한가운데 서서 돌멩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아직도 다리를 꼬고 서 있는 모습, 혐오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돌멩이를 꺼내 들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은 눈부신 햇빛으로 한낮의 절정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삶의 광휘가 찬연히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그 속으로 돌을 던지면 쨍하고 깨져버릴 것 같았다. 아이는 돌을 그대로 쥐고 선 채 산 위에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었다. 바람에 만개한 꽃잎들이 다시 날리고 있었다. 소자는 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떨구어버 렸다.
이상한 흥분으로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너 살쯤 되는 아이부터 소자보다 큰 아이도 있었다. 소자처럼 얇은 여름치마를 입고 서 있는 아이도 눈에 띄었다. 다리 밑이 휘영해서* 추워 보일 뿐 조금도 예뼈 보이지 않았다. 저기서 연애를 건다, 연애 거는 것 보러 간다, 이런 소리들이 들렸다. 아이들은 축대 밑을 지나고 작은 우물을 거쳐 낙엽이 질척하게 거품을 내며 썩고 있는 웅덩이를 넘어 산동네로 올라갔다. 누군가 봄볕에 졸고 있다면 아이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더욱 자장가처럼 졸음을 재촉할 것이다.
산동네는 피란민들이 들어와 지은 판잣집들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엉성하던 집들이 차차 온돌을 놓고 마루를 늘리고 기와를 올리며 다부지게 집을 만들어나갔다. 이제는 판잣집 같지 않은 여러 칸의 방과 뜰에 화초를 심은 집들도 보였다. 대신 산은 점점 허물어져나갔다. 소자에게 늘 생소한 그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을 만난 듯 몰려다녔다. 저기 무당집이 있다. 아랫동네 큰 우물 앞집에 무당이 산대, 혹은 산 위 저쪽 동네에 두부 만드는 공장이 있댄다. 가보자 가보자. 정말로 무당과 두부공장이 있기는 했지만 신나는 기세로 몰려가본 기대와 달리 흥을 돋울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무당은 보통 아주머니처럼 앉아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거나 두부공장이라고 하는 집은 젖은 헝겊을 씌워놓은 두부 상자 몇 개가 놓인 부엌을 보았을 뿐이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산 위의 어느 판잣집으로 몰려 들어갔다.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한 아이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머지 아이들은 판잣집 마당에 속절없이 서 있었다. 꽃밭에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 백일홍 분꽃 접시꽃 노랭이꽃 들이 아득한 세월 속에서의 어떤 필연처럼 고개를 내밀며 자라고 있었다. 붉은 꽃이 될 봉숭아의 대는 벌써 붉게, 흰 꽃이 필 때는 희게, 땅속에서부터 그 줄기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갑자기 창호지문이 열리고, 나이 어린 처녀가 방 밖으로 요강을 들고 나왔다. 문이 열리는 기세에 아이들은 몇 발짝씩 물러났다. 처녀는 아이들이 몰려 서 있는 것은 아랑곳없이 수채에 가서 요강을 비웠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한 번씩 기웃거린 후 곧 흥미를 잃고 하나 둘 흩어져 갔다. 소자 혼자 그집 마당에 서서 처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처녀의 회색 스웨터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올랐다 하구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모습은 감미로움이 있었다. 여학생이 되지 않고 곧바로 저런 처녀가 되는 것이라고 소자는 다시 생각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내일 아니면 모레쯤, 아니 한 몇 달만 지나면. 요강을 닦고 있던 처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었다. 소자가 나이를 대자, 근데 나이를 꽤 먹어 보이는구나, 나이배기구나 하고 말했다. 곧 처녀가 되리라던 심정과 달리 소자는 무안해지며 그 집을 나왔다. 처녀의 말 속에 짓궂은 심사가 있다고 느꼈다. 산동네를 거쳐 산 위로 올라갔다. 치마주머니 속에 있는 멸치를 먹으며 걸었다. 조그만 계집아이 하나가 소자를 따라오고 있었다. 소자가 나무 밑 바위에 앉자 계집아이는 얼마간 떨어져서 있었다. 얘 이리 와봐, 멸치 줄게라고 소자가 말했다. 계집아이는 그제사 소자 가까이 왔다. 너 이렇게 해볼래, 다리 한 짝을 들어봐. 소자의 말에 계집아이는 가만히 소자만 바라보았다. 멸치 줄게 다리를 이렇게 들어봐. 소자가 또 말했다. 계집아이는 멸치를 하나 받아먹고 앙상한 다리를 들었다. 아이는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치마 밑 맨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봄볕에 튼 다리에는 왕모래나 바위에 긁힌 곳들이 생채기를 내고, 흙먼지가 뿌옇게 한 겹 씌워 있었다. 소자는 계집아이의 치마 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다리를 내리면 또 멸치 하나를 줘서 올리게 했다. 아이의 그곳이 봉숭아 씨가 막 터지려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몇 가닥으로 갈라지며 부풀어 터지는 속에서 검은 씨가 쏟아질 것 같았다. 소자는 손을 내밀어 쏟아지는 씨를 받아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쩐지 더러운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먼 데서 들려오는 승일의 아코디언 소리는 소자를 혼미한 격정 속으로 휘말리게 했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내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몽글하게 올라오고 있는 가슴을 누군가 한없이 만져주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조선옷 치맛말기로 결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가슴을 꽉 동여매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도처에 비밀은 속삭대고 있었다. 형자가 생리를 시작한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어머니는 집에 온 친척 아주머니에게 우리 형자가 월경을 해요,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형자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나 얼굴을 붉히며 말리는 형자가 모두 징그럽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싫은 일이 있다니, 소자는 담벼락에 연필로 ○○의 피, 라고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적으며 돌아다녔다. 문은 도처에 있다가 조금만 눈을 주면 삐이끗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밝은 햇빛 아래 끌어낼수록 비밀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팽팽히 번져 나가던 한낮이 갑자기 수축되고 있었다. 세상이 다른 프리즘으로 바뀌어버렸다. 추웠다. 감정의 깊숙이까지 추위가 밀려들었다. 승일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그 무렵이다.
너 오빠가 우리 친오빠 아닌 것 아니? 형자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난 너그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빠는 우리 어렸을 때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살지 않았잖아, 우리하고 나이 차이도 많지 않니? 오빠가 중학생 때 엄마한테 보낸 편지를 봤어, 엄마가 장롱 속 깊이 노끈으로 묶어서 넣어두었어, 엄마가 써놓고 부치지 않은 편지들도 있었어, 엄마는 아빠하고 결혼하기 전에 사생아를 가진 거야, 어린 오빠를 먼 친척집에 떼어두고 시집왔어, 그렇다고 우리하구 오빠하구 멀어진 것은 결코 아니야, 알지? 같은 엄마의 아이들이니까.
소자의 기억 속에 전시의 어느 비 오는 날이 떠올랐다. 그것은 불현듯 떠올라서 고조되다가 어떤 부분을 확실히 이해시킨 후 꺼졌다. 그들이 어릴 때 몇 번인가 승일이 찾아왔던 적이 있다고 하나(형자는 오빠를 오빠야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했다) 소자에게는 그날이 승일을 본 최초의 기억이다.
어머니는 방 안에 앉아 열려진 창호지문으로 바깥 비를 정처 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먼 데서 간간히 폿소리가 들려오고, 폿소리가 날 때마다 비는 잠깐씩 내리기를 멈추고 공중에서 부르르 떨었다. 어머니는 군인이 되어 나간 남편을 염려한 것일까. 아들을 생각했던 것일까. 우리 승일이는 어떻게 됐을까. 이런 혼잣소리가 조그맣게 입에서 새어 나온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이어 치마를 끌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때 홀연히 한 군인이 국방색 우비를 입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 빗속에서 군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군화에 군모를 쓰고 있으나 우비 속에서 솟아나온 가느다란 목이 아직 여물지 못해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군인은 비옷도 벗지 않은 채 잠시 마루 끝에 빗물을 흘리며 앉아 있다가 그대로 떠났다. 일선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문밖까지 따라 나가 무엇이라고 소리쳤지만 빗줄기에 흡수되어 잘 들리지 않았다.
생각나니? 오빠는 겨우 열일곱 살인데 학도병으로 끌려 나간 거였어. 오빠가 가 있던 친척집에서 ―어릴 때 갖다 맡겼는데 그렇게 큰 거야, 친척집은 아주 가난했대, 밥도 굶는 때가 많았대, 엄마가 이따금 찾아가보면 오빠는 영양실조로 배가 남산만큼 불러가지고 자꾸 밥만 더 먹으려고 했대, 바보같이, 바보가 되어버린 거래, 밥에만 눈 밝히는 아이를 보고, 엄마가 허겁지겁 떠먹고 있는 아이의 가슴팍을 팍 밀쳐버린 일도 있댄다, 엄마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런 행동이 나온 거야, 엄마는 오빠한테 심하게 했나봐, 우리 어려서처럼 그렇게 아이를 귀여워할 줄 몰랐나봐, 우리는 엄마 아빠의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랐잖아, 근데 오빠는 그게 아니었어, 창호지문을 뚫는다고 엄마가 창호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의 손가락이 나오니까 바늘로 쏙 찔러놓았대, 그다음부터 다시 창호지를 뚫지 않더래, 그게 오빠가 두 살 때란다, 너 오빠 어렸을 때 사진 본 적이 있지, 소학교 아이들이 모두 높이 쌓아 올려진 철봉 위에 올라가서 찍은 거 말야, 오빠는 겨우 소학 일 학년짜리가 맨 꼭대기 육 학년짜리들이 올라가 있는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잖아,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밖에 데리고 나가면 금방 보이다가도 보이지 않고, 겁이 나서 승일아, 부르면 저 앞에서 돌을 차면서 오고 있고, 그러다가 또 없어지고, 알 수 있지 오빠가 어떤 아이였나, 그러던 아이가 엄마를 떨어지면서 이상해진 거야, 머리가 영리한 아이일수록 환경 변화에 따라 그렇게 되기 쉽대, 오빠가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 방학 때면 서울에 왔나봐, 엄마는 오빠한테 창경원도 보여주고, 그때 창경원서 우리하고 찍은 사진도 한 장 있잖어, 아빠도 함께였어, 우리는 머리에 리본을 달고, 오빠는 우리 옆에 쭈그려 앉고, 근데 아빠가 오빠를 싫어해서, 아니 그건 잘 몰라 왜였는지, 엄마는 오빠를 여관에 데리고 가서 자고, 그리고 기차로 떠나보내곤 했어, 오빠가 학교 뒷산에서 쓴 편지에 그런 게 씌어 있어, 달리는 기차에서 내다보던 엄마의 동그란 얼굴을 하루 종일 그리고 있다고, 그리고 엄마가 사준 만년필로 편지를 쓴다고, 이런 일도 있댄다, 엄마 친구가 지방에 갔는데 웬 아이가 자꾸만 쫓아오더니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뒤돌아보면 추춤하고 섰다가 걸어가면 다시 쫓아오고, 이상하다 했더니 알고 보니 오빠였댄다, 오빠는 뾰족구두 신은 여자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나서 무작정 따라간 거야.
그 말을 친구에게서 전해 듣고 어머니는 그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도 자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걸까, 전쟁이 끝났을 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승일만 돌아왔다. 어머니 무척 고생했구만요, 승일이 부대에서 보았던 연극대사를 흉내 내면 식구들은 둘러앉아 웃었다. 농사만 짓던 순진한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다리를 하나 잃은 부상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바보스럽게 말하는 장면이었다. 시골 청년은 전쟁으로 하여 비로소 세상구경을 한 셈이었다. 그 대사가 나오는 장면만을 보던 때와 달리 정작 전체 스토리를 들었을 때, 어머니와 동생들은 눈물을 흘렸다. 몹시 슬픈 얘기였다. 어머니는 승일이 살아 돌아온 것만 오직 감사하고 있었다. 승일이 휴가로 집에 올 때면(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더 군에 머물렀다가 제대가 되었다) 전등 없는 방에 드러누워 전쟁얘기를 들었다. 얘기는 한없이 계속되었다. 머리 위로 무수히 날아가는 총알을 보며 생각했었지, 저 총알과 내가 같다고 말이지, 저 총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르고 쏘아지는 방향대로 그냥 날아가는 것이니까, 물론 쏜 사람은 적을 향해 쏜 총알이라는 걸 알겠지만 말이야, 바로 그것처럼 나 역시 내가 왜 여기서 무엇 때문에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전우들이 순식간에 시체로 뒹굴고 하는데, 그러나 신은 내가 어째서 태어나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지, 단지 총알이 모르듯이 그걸 내가 모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었어.
어느 순간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얘들아 오빠가 살아 돌아온 건 기적이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구나 라고 부르짖었다. 승일은 포병으로 뽑혀 최전방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이 트럭에 실려 가던 도중 비행기 폭격을 만났다. 동승했던 전투원이 모두 죽고 승일과 또 한 사람만이 바퀴 밑에서 살아남았다. 그 비슷한 일들을 여러 번 겪었다. 어머니가 몸을 떨며 기적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들이 살아온 데 대한 감사와 또 그녀의 남편 역시 기적이 일어나 살아 돌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제대 후 승일은 육 개월간 수험공부를 하여 대학시험을 쳤다. 낙방이었다. 후기 시험을 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곧잘 불안한 몸짓으로 아들을 잡고 늘어졌다. 앞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세월이 퍼뜩퍼뜩 가는데―어머니는 애정을 받고 자라지 못한 자식이 가난한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이제 돌아와 자신이 바라는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한탄했던가. 알았니 소자야, 결국 우리는 삼 형제야, 아빠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어, 아빠 대신 오빠가 우리에게 돌아온 거야, 같은 엄마가 낳았으니까, 이런 사실을 알기 전과 똑같은 거야.
처음 여유롭게 서두를 떼던 것과 달리 형자는 갑자기 슬픈 어조를 띠기 시작했다. 엄마랑 오빠가 불쌍해 그리구 아빠두, 아빠는 영영 돌아오시지 않나봐, 라고 말하며 눈알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아침이면 형자는 윗목에 엉거주춤 돌아앉아 풀 먹인 교복칼라를 다렸다. 연탄불에 달군 다리미는 철거덕 소리만 요란할 뿐 잘 다려지지 않았다. 형자는 몇 번이고 다리미 밑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팔에 힘을 주어 얼굴이 빨개지도록 늘렀다. 그러나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어 대강 다려서는 감색 교복에 핀 세 개로 고정시켜 입었다. 이른 아침 햇빛이 방 안 깊숙이 들이밀리고, 햇빛의 부분에는 먼지와 같은 공기가 막처럼 드리웠다. 그 막을 가르듯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 담 밑으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소자가 길에서 보는 흰 칼라를 달고 걸어가는 여학생이 되는 것이다. 때로 빈방에 들어가서 브래지어를 하다가 뜻밖에 일찍 일어난 승일에게 들키기도 했다. 재 젖은 이만해, 라고 승일이 두 손을 둥그렇게 만들면 형자는 바쁜 중에도 흐드득거리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니도 형자 뒤를 따라나가고, 소자는 아침상을 대강 치워 설거지통에 담가 놓았다. 문득 영화 속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면 승일에게 가서 묻기도 했다. 오빠 이 노래 잊지 못할 사랑에서 나오는데? 임마, 그건 참 힘든 곡이야, 아주 힘든 곡이야, 승일은 동생 이 내는 음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일찍 돌아오고 있는 어머니를 소자는 동네 길에서 만났다. 손에 무엇인가 들고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찹쌀로 꽈배기처럼 꼬아서 튀긴 찹쌀도넛이었다. 언젠가 어머니도 하나 먹어보고 가게에 있는 것을 전부 사 오라고 소자에게 소쿠리를 들려 보낸 적도 있다. 사탕이 아닌, 영양가가 있어 보이는 군것질거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자는 길에서 먹던 것이 무안하여 배가 고파서 사 먹고 있다고 말했다. 왜 집에 밥이 있을 톈데, 라는 어머니의 말에 없었어, 오빠가 다 먹었어, 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집에 들어가던 길로 어린 동생이 먹을 밥까지 전부 먹어치우느냐고 승일에게 잔소리를 했다. 아코디언 상자를 끌러서 막 어깨에 메려 했던 승일은 좀 먹으면 어때요, 라고 불손하게 대꾸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와서 승일을 때리기 시작했다. 광기에 가깝게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어린 승일의 가슴팍을 밀치는 기분으로 그렇게 성이 났던 것일까. 승일은 몇 번 매를 피하는 몸짓을 하다가 어머니가 기침이 터져 제풀에 주저앉을 때까지 그대로 서서 맞았다.
승일이 아코디언을 악기상자에 집어넣는 모습을 소자는 마당 한구석에 서서 바라보았다. 뚜껑을 닫기 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군복에 물들여 입은 바지에서 빠져나온 와이셔츠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악기뚜껑을 닫았는데 그 모습은 언젠가 승일이 보여주던 연기의 한 부분 같았다. 승일은 윗도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마당에서 소자와 마주치자, 그냥 사 먹는다고 하지 않고 왜 배가 고파서 사 먹는다고 했니, 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 하던 어린아이의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무참히 꺾였을 때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방 안에서 이마를 짚고 누워 눈물을 흘렸다. 가끔씩 독이 깨져 나가는 기침소리를 낼 때마다 상체를 심하게 흔들었다. 짓누르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름으로 이어가는 나무들의 깊은 그늘이 숨 막히도록 무겁게 방 안으로 들이밀리고 어디선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서 일찍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순경에게 쫓기던 끝에 그냥 집으로 향한 것일까. 그때였다. 밖에 서 있는 웬 사내와 어머니는 눈이 마주쳤다. 열려진 방문으로 왜소한 몸체가 고개를 기웃하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적선 한 푼 줍쇼, 라고 사내는 말했다. 그 말을 못 들은 듯 어머니는 그대로 누워있었다. 걸인은 그림자처럼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걸인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갑자기 불에 덴 듯 튕겨 일어났다. 부엌으로 달려 나갔다. 왜 그놈이 부엌문 쪽에서 나오느냐고 속으로 웅얼거리며. 대문 쪽으로 들어와야 할 텐데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의 느낌은 한 사내가 부엌 쪽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느껴졌다. 수저통에 은수저가 비어 있었다. 아 은수저가 없어졌구나 수저가 없어졌다, 라고 어머니는 소리쳤다. 소리에 힘이 없고 떨고 있었다. 아직 마당 한구석에 그대로 서 있던 소자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 산 위로 올라가고 있는 걸인을 불러세웠다. 여보세요 우리 은수저가 없어졌어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렸다. 은수저가 없어진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거지는 매우 퉁명스럽게 몸을 돌려 말했다. 내 어쩐지 이상하드라니, 왜 대문 쪽에서 들어오지 않고 부엌 쪽에서 나타나냔 말이다, 어디 썩 이리 내려와, 순경을 부르기 전에. 어머니는 어느 틈에 대문 밖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이것 보시오 나는 불구요. 더러운 군복 윗도리 주머니에서 팔을 꺼내 몽땅 잘린 손을 걸인은 내밀었다. 손이 짤려버린 팔목 끝은 헌데*가 나서 살갗이 까져 있었다. 눈을 돌리고 싶은 몰골이었다. 어머니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가 걸인에게로 뛰어 올라가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치마를 여미지 않은 탓으로 풍뎅이 날개처럼 양쪽으로 갈라졌다. 불구의 손을 어머니는 만졌을까,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걸인은 눈썹도 없고 코도 비뚤어져 있었다. 눈에는 눈곱이 끼였고 옷에서는 오물 냄새가 풍겼다. 문둥이였다. 저물어져가는 빛 속에서 그 모습은 몹시 괴이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전부 피란을 떠난 것일까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비실비실 뒷걸음질 쳐 내려왔다. 조심스러운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홱 돌려 거지를 올려다보았다. 여보시오 거기 팔에 끼고 있는 게 뭐요, 겨드랑에 무엇인가 끼고 있는 것이 그제야 그들 모녀의 눈에 띄었다. 걸인은 그대로 산 위를 향해 몇 걸음 옮겨놓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산동네가 시작되고 있다. 여보세요, 팔에 끼고 있는 것이 뭐냐구요, 소자의 소리와 함께 어머니는 다시 달려 올라갔다. 걸인의 팔에 끼어 있는 것을 뽑아냈다. 더러운 부대자루를 접은 것이었다. 부대자루는 때에 절어 반질반질 쇠가죽처럼 닳아 있었다. 그 속에서 은수저가 나왔다. 낯익은 것이었다. 거지는 화살에 맞아 둔하게 방향을 돌리는 짐승처럼 산 아래로 내려와 소자 옆을 지나쳤다. 처음보다 더 작아진 몸에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었다. 쇠가죽처럼 된 부대자루는 반으로 접어 겨드랑에 낀 채, 조금씩 내딛는 걸음이 그러나 의외로 빠르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자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한 발짝 걸인을 따라 걸었다. 걸인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동냥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문이 열려진 집집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골목 끝에는 녹슨 빛깔의 황혼이 몰려 있었다. 황혼을 배경으로 한 조그만 몸체는 그가 문둥이라는 것을 잊게 해주었다. 그 모습은 영원 속으로 굳어져가서 이다음까지 시간을 초월한 창면으로 소자에게 떠오를 것 같았다.
어느 낯선 동네 구멍가게 앞에서 소자는 걸음을 멈췄다. 찹쌀 도넛에 체한 것인지 먹은 것을 토해내기 위해 가로수에 기대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길 건너편 잎이 무성한 가로수 사이로 영화관이 보였다. 한 떼의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지나갔다. 반 환경정리라도 하고 늦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하수도를 파헤쳐 놓은 흙더미에다 아이들은 발길질하며 걸었다. 불 켜진 구멍가게 안의 물건들을 소자는 상반신을 수그린 채 홍미 없이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서 물을 끓여 은수저를 소독할 것이다. 끓이고 또 끓인다고 해도 깨끗한 기분으로 다시 그 수저를 사용할 수 있을까.
창문마다 하나 둘씩 불빛이 보였다. 어느 순간 갑자기 툭, 소리를 내며 거리의 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정전은 익숙한 것이었다. 극장의 네온만 어두운 하늘 아래 선명 했다. 현실은 짓밟고 지나가야 할 무엇으로 소자에게 비쳤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알 수 없는 어두운 거리와 같았다. 그 거리는 끝없는 미로로 통하고 있었다. 소자는 이상한 힘에 이끌리듯 이다음 유명 한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다. 구멍가게 주인은 유명한 누구가 어린 시절 잠깐 자기 집 가게 문 앞에 와서 서 있었다는 것을 알까, 결코 알 리가 없으리라는 것이 아이에게 쾌
감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란 이다음 유명한 누구가 되기 위해 할 수 없이 거치는 어떤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복수심이 솟구쳤다. 여간해서 울지 않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나의 모든 비밀을 사랑한다, 소자는 울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일생 동안 많은 비밀을 만들어나가겠다, 이런 생각도 했다. 비밀을 극복하기에는 상처가 따른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깨달았을까, 그러나 어른스레 곧 눈물을 닦고 길 건너편 영화관 쪽으로 빨려들 듯 달려갔다.
소자는 어떤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어디서부턴가 이윽히 닿아온 그 소리는 그러나 소자가 눈을 뜨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몸은 헤매듯 떨어져 내렸다. 겨우 현재의 의식 속으로 되돌아왔을 때 쓰리 코인즈 인 더 화운틴 뎃즈 와이…… 멜로디가 눅눅한 새벽 공기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망망한 어듐 그 겹을 알 수 없는 무한의 어둠 속에서 음은 한 조각의 밝은 환영처럼 저절로 솟구쳐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렸다. 창을 밀고 들어오는 새벽빛은 천장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녀의 주름 진 얼굴과 창턱에 놓인 빈 화분도 어둠의 일부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의식은 이제껏 헤매어온 긴 미로 속을 급하게 소급하고 있었다. 차츰 시간의 안개가 걷히고 근원을 떠올릴 때면 일어나는 느낌, 향기 같은 것이 주위에 감돌았다. 유년 시절 걸인을 따라나섰던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문둥이를 쫓는 환상을 보곤 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는 아코디언 꽃잎 등불 같은 것이 찾아들곤 했다. 꽃잎들은 아직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꽃잎은 과거로 떨어져 갔고 또 미래에까지 떨어져 올 것이다. 아코디언 소리 또한 그럴 것이다. 이런 느낌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유년으로 손을 집어넣어 어둠 속에서 흐르던 등불을 찾아 쥐는 환영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샘 줄기를 찾고 싶은 갈증으로 시달렸다. 소자는 방금 그녀의 잠을 깨운 음을 찾으려 애썼다. 그것은 방치해두었던, 때로 피상적으로 떠올라 조금씩 가슴을 아프게 하던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음은 이미 노래는 아니었다. 가슴을 흔들고 지나가는 추억, 잃어진 유년 시절 속의 승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마음 놓고 떠올리기에 죄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형제이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그와는 성이 다르고 그리고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때문에 자연히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한 어린 시절 형자에게서 들었던 에피소드의 선에 아직 머물고 있다. 어머니에게 물어서라도 조금 더 알 수 있었을 것을, 태만했다고 뉘우쳐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가 된 소자는 그 기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생각하면 앗 하고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정신이 아뜩해져오는 때가 있다. 어떤 아이가 늘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리고 늘 배가 고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엾은가, 어머니는 소자가 큰 뒤에 말했었다, 글쎄 어디서 생긴 건지 내 사진하고 내가 너희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다니던 방송국 건물 사진하고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있더라, 목에다 거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그렇게 숨겨가지고 있더구나,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살아생전 몇 가지 얘기를 더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얘기는 형자가 해준 얘기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혹은 소자 스스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음의 일도 그렇다.!
어느 날 어머니는 승일의 직장으로 찾아갔다. 그때 승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만 회사의 사원으로 입사했다. 어머니의 낯빛은 햇빛에 그을었음에도 몹시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 터졌고, 오직 눈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승일을 회사 뒷마당으로 끌고 가서 뺨따귀를 때리고 가슴팍을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어머니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승일에게 돈 심부름을 시켰더니 전하지 않고 써버린 것이다. 달러 거래를 하고 있는 손님이 찾아와서, 아니요 댁의 아드님이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했을 때부터 어머니는 온몸의 혈관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길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생각해볼 여가도 없이 승일을 불러냈던 것이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말만 되풀이 정신없이 되뇌면서. 사무실 유리창으로 동료사원들이 흘끔흘끔 내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회사 문을 나서며 벌써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가족이란 그 안이야 어찌되었든 세상 쪽을 향해서는 똘똘 뭉친 집합체라는 것을 어머니는 잠시 잊었던가, 아니 가족이란 이 세상의 마지막 믿음이라고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승일이 사(社) 대항 운동 경기 도중 졸도하여 생명을 잃은 후 동료들은 승일에게 고독병이 있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어인 일인가, 그 말을 듣고서야 세 모녀는 처음으로 그 사실에 눈을 돌렸다. 같은 형제이면서, 바로 자신의 아들이면서 그것을 몰랐던 것일까, 얘들아 오빠한테 고독병이 있었다는구나라고 어머니는 눈에 가득히 눈물 괴어 말했다. 그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7인의 신부를 보고 돌아오던 때 함께 양식집에 들어간 일도 떠올린다. 승일 역시 양식집의 분위기에 서툴렀을 것이다. 그는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에서 군인으로 건너뛰어 그제 막 제대하여 돌아온 제대군인이었다. 그가 양식집에 가본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양식집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동생들을 이끌고 앉아 있던 모습, 메뉴를 들여다보던 눈길을 기억해낼 수 있다. 승일도 영화에서만 보던 것을 그 자리에서 처음 실행해보았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그때 의젓해지려고 숨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비구름이 모인 암회색의 날씨,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도 불어 수목들은 옆으로 몸을 뉘이고, 그 길로 달리는 끝도 없는 트럭의 행렬, 전장으로 나가던 젊은 군인들, 트럭이 잠시 머물렀을 때 어머니를 만나러 빗속에 달려왔던 목이 가느다란 소년, 그가 직접 총을 메었던 것, 그리고 죽음의 선에서 몇 번이고 곡예를 넘어 돌아왔다는 것을 소자는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오빠는 전장에서 돌아왔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하나의 사실로서만. 바로 피를 나눈 형제의 일이었는데.
소자는 손을 내밀어 아직도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을 듯한 그 아이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승일아라고 자신의 아들처럼 조그맣게 부르며, 그의 손을 잡아 가슴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투둑, 하고 끓어오르던 피가 터져버리는 느낌을 체득했다. 그때였다. 다시 그 음률이 소자의 귓가를 스쳤다. 쓰리 코인즈 인 더 화운틴 뎃즈 와이…… 이태리 어느 거리에 있는, 동전을 던져 넣으며 소원을 말한다는 샘, 그 음률은 그대로 샘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소자의 가슴속으로 샘이 흐르고 있었다. 맥이 뛰는 소리도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피상적인 느낌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심장 속에서 사무치듯 애잔하게. 그리고 한 아이,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는 아이, 어머니가 그리워 학교 동산에 하루 종일 어머니를 그리는 아이, 전쟁에 나갔던 소년,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넘치는 정열로 아코디언을 켜던 그 아이가 그 속으로 동전을 집어 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는 샘물에다 자꾸만 동전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문학사상』 135호(1984; 1); 『초록빛 모자』(나남 1994)
김 채 원
김채원(金采原) 1946년 경기도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유학했다. 1975년 『현대문학』에 소설 「먼 바다」 「밤 인사」가 추천되어 등단한 뒤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여성적 삶의 의미를 탐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환(幻)’ 시리즈의 하나인 고백체 형식의 중편소설 「겨울의 환」은 이 혼한 중년 여성의 삶과 내면 묘사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욕망,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짚어본 그의 대표작이다. 그 밖에 「초록빛 모자」 「애천(愛泉)」 「봄의 환」 「가을의 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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