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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업과 새 예루살렘
21장의 중심점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3)에 있습니다. 이는 신구약성경 전체가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성경 66권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 나라건설”, 이것을 이루어 온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21장에 와서 “이루었도다”(6) 하십니다. 이는 16:17절에서 “되었다” 한 말씀과 대칭(對稱)을 이루는 말씀인데, “되었다”는 말은 심판이 끝났다는 선언이고, “이루었도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백성”인데, 이들이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둘째는 “장막”인데, 이것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셋째는 통치하시는 보좌입니다. 21장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루었도다” 하는 하나님 나라건설은, “무너졌도다”(18:2) 하는 바벨론의 파괴가 있은 후에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장을 통해서 대조를 볼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음녀(17:1)와 대조되는, “신부”(21:9)가 등장하고, 큰 바벨론(17:5)과 대조되는, “새 예루살렘”(21:10)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사활적으로 중요한 점은 바벨론을 “파하고” 새 예루살렘을 “세우는” 일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2-23) 하신 싸움을 통해서 가능하여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1-22장의 중심점이 “요한이 본 천국”을 보여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7) 하신,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될 “상속”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7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기는 자들이 상속하게 될 것들을 약속하셨는데 21-22장에서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계시록이 암호문서도 아니요, 재림 직전의 짧은 순간에 되어 질 일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게 될 모든 전투하는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이겨라, 이길 수가 있다”라는 격려라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만일 21-22장의 내용을 천국에 대한 묘사로 여긴다면 천국 모습이 괴상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22:15절은,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하는데 이것이 주님 재림하신 후의 천국 광경이란 말인가?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8) 신부인 새 예루살렘
둘째 단원(9-2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셋째 단원(22-27) 성전인 새 예루살렘
첫째 단원(1-8) 신부인 새 예루살렘
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1) 합니다. 첫 말씀이 “새 하늘과 새 땅”인데 어찌하여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져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빛을 이사야 45:18절에서 받을 수가 있는데,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하십니다.
첫 창조 때에도 먼저 “사람이 거주할” 환경(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셨다면 대답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고 어린 양의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십니다.
② 그래서 환경을 새롭게 하신 후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상)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9절을 통해서 “어린 양의 신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사는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9-10)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③ 여기에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첫 창조나 재창조를 막론하고 창조의 중심점은, “사람, 곧 신부”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시고 신부를 지어주셨는데, 하나님께서도 교제의 대상으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창조에 있어서도 중심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새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도성이 아니라, “어린 양의 아내”에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아내”에 관해서는 이미 19:7절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준비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신 바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어린 양의 아내”를 또 등장시키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
㉠ 19장의 문맥은 신랑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신부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 21장에서는 신랑과 함께 영광에도 동참하는 신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④ 그런데 계시록에는 혼인 장면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어린 양의 혼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대답이 3절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 합니다.
3절 한절 속에 “함께” 라는 말이 3번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함께> 거하시고, <함께> 계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꾸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함께”라는 주제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중심주제입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지으라”(출 25:8)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막은 중간이 막혀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짐승의 피로는 죄가 속하여질 수가 없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함을 가능케 하지 못함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신 목적도,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렘 32:37-38) 라고,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함께 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2장의 짧은 순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거하던 것이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추방을 당했고, 하나님은 백성을 잃어버린 왕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회복이란 다름이 아니라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서 함께 거하는 것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⑤ 그러므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은 말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질러 놓은 죄 값을 누군가가 청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시록에서는 주님을 29회나 “어린 양”이라 부르면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9-10) 하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에덴에서 함께 거하던 것이 파괴된 후로, 구약시대에는 성전을 통해서 함께 거하시다가, 신약시대에는 임마누엘로 함께 거하셨고,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함께 거하시다가, 계시록에서는 함께 거하심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었도다”고 선언하심은 바로 하나님과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완성되었음을 가리킵니다.
⑥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4) 하십니다. “다시는 없다”고 열거하신 중에 핵심이 “사망”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이 정복되지 않는 한 완전한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사 25:8)고 예언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합니다.
“사망”이 있는 한 “눈물,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성도들에게도 사망은 지배(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통분痛憤)히 여기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셨다”(요 11:33)고 말씀합니다. 통분은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사탄에 대한 통분이요, 민망은 죽기를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안식하는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탄은 이미 십자가에 의해서 정복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다는 긴장상태가 지속되는 중에 싸우고 있는 것이 전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사망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날, 이 모든 갈등은 “다시는 없게” 될 것입니다.
⑦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매” 합니다. 다시 사망이 없다 함같이 “다시는 눈물이 없다” 하면 될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어주실 것임이라”(7:17)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형제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것을 상상으로라도 가능한 일입니까!
“모든 눈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눈물들일까요? 환난과 핍박 중에 흘린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한 싸움을 싸운 어린 양의 아내들이 승리한 후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 환희의 눈물일 것입니다. 이런 눈물은 아무나 흘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승리자가 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제발 제 설음에 흘리는 그런 값싼 눈물은 없었으면 싶습니다.
⑧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5) 하십니다. 어찌하여 “기록하라” 하시는 것일까요?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다 더 반드시 지켜주실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보증서(保證書)다”.
⑨ 그리고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6상) 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을 21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선언을 하시고, 22장에서는 주님께서 선언하시는데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를 주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은 “이루었도다”와 결부하여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죄가 들어오자, “내가---하리라”(창 3:15) 하고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이루었도다” 하고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 이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와 결부하여,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22:12-13) 하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다시 오심이 없다면 “알파는 되시나 오메가는 되지 못하고, 처음은 되시나 나중은 되지 못하고, 시작은 되시나 끝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롬 4:18-21)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죽이려는 사울에게 쫓기어 굴에 숨어 있는 중에서도,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57:2), 즉 자신을 왕위에 세워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다가 아둘람 굴보다 더한 로마 지하 감방에 갇혀있는 중에서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⑩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 하십니다. 이 축복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2-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한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 약속과 경고가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20-22장인 것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을 왕이라 할 때 우리는 백성이 되고, 주라 할 때 우리는 종이 되고, 신랑이라 할 때 우리는 신부가 되며, 목자라 할 때 우리는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십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천지의 대주재자인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부족합니까?
계시록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왜 그런가? 모든 싸움이 끝난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 되어 아버지와 한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이상의 위로와 격려와 보상은 없습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여기가 천당(天堂)입니다.
그렇다고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심은 그 때가서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써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만주의 주와, 죽도록 충성해야 할 종”의 관계임을 명심하십시다. 다시 말하면 사령관과 군사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⑪ “그러나”(8상) 합니다. 이는 이기는 자가 받을 유업과 반대되는,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종말(20:10, 14)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8) 합니다. 이것이 “지옥”(地獄)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죄목들은 한마디로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9:20-21) 사탄을 추종한 죄인 것입니다. 의외로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첫손에 꼽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합니다. 성경에 최초로 “두려움”이 침입한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한 때입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그렇습니다. 두려움이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의”(롬 1:17, 3:21)를 거절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산과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6:16)고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3:18).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6:15). 이들에게만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둘째 단원(9-2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①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9) 합니다.
우선적으로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하게 되는데 이는 17:1절에서,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한 것과 대칭을 이루는 장면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17장에서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음녀”를 보여준 반면 21장에서는,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천사를 통해서, “음녀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인가? “땅의 임금들과 음행한 음녀”와, “정절을 지킨 어린 양의 아내”를 대조해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음녀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17:3) 한, “광야”에서 보게 되었는데 어린 양의 아내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21:10) 보게 되었다고, “광야와, 높은 산”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②그런데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보여준 것은 어린 양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10) 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아내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 대조가 나타나는데 17장의 “음녀는 바벨론”(17:5)과 결부되어 있는 반면, “어린 양의 아내는 예루살렘”과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함같이, 어린 양의 아내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신 것같이 물리적인 성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백성들 중에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③ 요한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에스겔 40장을 반영하고 있는데, “성이 함락 된 후,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겔 40:1-2) 합니다.그리하여 에스겔은 높은 산에서 먼 훗날 회복될 성전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던져버리셨습니다. 성전이 불탄다는 것은 선민 이스라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목격하게 되자 백성들은 죄절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 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 지어다”(겔 40:4) 하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 하시는가?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서는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이 비전이 계시록에서 성취되고 있으며 우리가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11-27절의 묘사를 통해서 외형적인 성(城)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를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
④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한, “어린 양의 아내”(19:7, 21:9)라는 주제는 생각같이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이는 최초의 혼인 때부터 신비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아담에게 아내를 짝지어주실 때에 “흙”을 빚어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몸의 일부인 갈비뼈로 지어주셨다는 것은 큰 신비였던 것입니다. 만일 흙을 빚어 지으셨다면 둘의 관계는 타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일부분으로 지어주심으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잠들게 하심으로 그의 아내를 지어주실 것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신부가 19장, 또는 21장에서 비로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피로 사셨을 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거듭날 때에 이미 어린 양의 신부 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신부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하) 하는 “준비하고 단장”(丹粧)이 되어 가는 과정(過程)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하고, 단장”해 가는가? 이것이 계시록의 내용이라 할 수가 있는데 한마디로,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2-3장) 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14:4) 한, “순결”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 하신 “믿음과 인내”로 연단해나가는 것이 신부로 “단장”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2:11) 한 영적 전쟁을 통해서 신부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⑥ 이점이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19:7-8) 한 “어린 양의 아내”와,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 하는 “군대”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丹粧)한 것 같더라”(2하)는 말을 미용실 용어쯤으로 생각한다면 계시록의 특성을 오해한 것이 됩니다. 계시록의 중심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종말적인 예언에 있는 것도 아니요, “요한이 본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를 향해서 “이기는 자는, 이겨야 한다”는 병법(兵法)이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린 양의 아내는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과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에게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신 목적은 영적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기 위함이요, 이기는 자만이 신랑에게 사랑(3:19, 요 14: 21)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아내로 “예비하고 단장”하는 비결입니다.
⑦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11) 합니다. “영광”이 있다 하는데 모세의 성막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출 40:35)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대하 7:1)했습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라는 장막을 입고 오실 임마누엘의 모형으로,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다락방이라는 건물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거기 모인 120명, 즉 교회에 충만(행 2:4)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하여졌습니까?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 영광이 새 예루살렘에 충만한 것입니다.
⑧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11) 하는데 이는,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묘사한 것(4:3, 6)과 상통하는 영광입니다. “12문이 있는데,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라”(12) 합니다. 또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14) 합니다. 어찌하여 새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가?
12지파는 구약교회를 상징하고, 12사도는 신약교회를 상징 합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 이긴 자(남은 자)와, 신약시대에 이긴 자(남은 자)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한, “통일”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새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2기초석(基礎石)에 12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하는데 이점을 성경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12사도가 놓은 “기초석”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 터전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교회를 12문으로 상징한 것은 구약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⑨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성을 측량하니 12000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나비와 높이가 같더라”(16) 합니다. “길이와 너비”가 같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높이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높이도 12000스다디온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씀하심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왕상 6:20) 한 지성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맞는다면, 새 예루살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지성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전 3:16)고 말할 때에 “히에론”이라는 말 대신에 지성소를 가리키는 “나오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 몸에도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다(고전 6:19)면 우리의 몸도 네모가 반듯한 지성소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거하실 성은 물질적인 보석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보석과 같은 승리한 성도들로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⑩ “그 성곽을 측량하매 144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17) 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을 묘사하는 수치(數値)들을 유의해 보셨습니까? 12문에는 12지파의 12이름이 있고, 12기초석에는 12사도의 12이름이 있더라 합니다. 12지파+12사도=24장로와 일치하고,
12,000스다디온은, 각 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자의 수와 일치하고(7:5), 144규빗에 만 수인 1,000을 곱하면 144,000이라(7:4) 한 것과 일치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수에는 상징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이 지점에서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이기는 자에게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니”(3:12) 하셨습니다.
⑪ 음녀는 “많은 물”(17:1), 즉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17: 15) 위에 앉아서 통치하였으나, 하나님과 어린 양은 구속함을 얻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7: 9)와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5:10)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며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시 114:1-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란 출애굽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 “유다”가 여호와의 성소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다 지파에 계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시편 기자는 놀랍게도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나실 것이라는 언약(창 49:10)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할 때에, “선두(先頭)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민 10:14)이 행진하라 명하셨는데, 홍해 바다가 이를 보고, 즉 왕의 행차를 보고 도망하며(갈라지고), 요단은 물러갔으며”(3) 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감동적인 시 중에 본문과 부합되는 대목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領土)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토는 하늘과 땅과 성(城)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즉 자기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장막”(3, 13:6)이요, 영토요, 아내요, 새 예루살렘 곧 “여호와 삼마”인 것입니다.
셋째 단원(22-27) 성전인 새 예루살렘
①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2) 합니다. 본 단원의 중심주제는 “성전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음녀와 아린 양의 아내가 대비되듯이,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이 대조가 됩니다. 2:13절에서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하셨는데, 바벨론은 다름 아닌 큰 음녀, 곧 사탄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보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22상) 합니다. 만일 새 예루살렘 성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말씀한 “어린 양의 아내”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부의 이미지는 둘이 하나 된 신비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성전이란 여러 개의 담으로 막혀있는 이미지를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폐쇄성을 배제하기 위해서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않는다”(25)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계시록에서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이루어 오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스데반이나 바울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7:48, 17:24)고 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2하) 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9)가 하나님과 어린 양이 거하실 성전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신 “영합”의 신비가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23) 합니다. 22:5절에서도,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합니다. 이점도 계시록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인 것입니다.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 라고 예언했고,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6-7)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비춰진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이라고 증언합니다.
④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24) 말씀하고, 26절에서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겠고” 하는데, 이 “왕들과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들인가?
학자들은 이 문제로 고심을 합니다. 세상 왕들이나 불신자들은 백 보좌 앞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누구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계시록에는 “내가 본 천국”이 없다 한 것입니다. 이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즉 이기는 자들이 참여하게 될 “영광”이 어떠한가를 우리의 눈높이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사야서에서는,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49:23)고 격려합니다.
이점에서 계시록의 구조를 다시 상기하게 되는데, 1장에서 주님은 야전군 사령관으로 등장하셔서, 2-3장에서 7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고 격려하신 후에, 마지막 부분인 21장에 이르러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21:7)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4-20장까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누구와 싸워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를 말씀하는 내용인데, 이것이 계시록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 계시록의 기록목적과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는데 계시록은 암호문서도 아니요, 천국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요, 천년왕국이나 재림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라”는 전투하는 교회에 주신 병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중심주제가 “이기는 자”에 있다는 점에 확고하기만 하다면 모든 난제와 이설은 해소가 된다 하겠습니다.
⑤ 21장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고 마치고 있는데, “들어감과, 들어가지 못함”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긴 자가 받게 되는 영광과는 대조되는 관점으로 한 말씀인 것입니다.
제가 계시록을 상고하면서 주목해 본 것 중 하나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17:14)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기를 어느 지점까지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21장 쯤 와서는 달리 부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어찌 보면 영광스러워 보이지도 아니한 “어린 양”이라는 이미지를 마지막장(22:1, 3)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게 합니다. 21장에서도,
㉠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2) 합니다.
㉡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3)합니다.
㉢ “어린 양의 생명책”(27)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처럼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되게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1:5),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려주신”(5:9), 그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이는 요한이 복음서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증언한 복음을, 계시록을 기록하는 동안 1장으로부터 22장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증언하는 자들에게,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기라”(12:11)는 격려를 하기 위해서요, 또한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는 점을 무언중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