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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의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역사문학기행의 길라잡이로 애쓴 안상학 시인이
첫날 낙동강변에 있는 숙소까지 이동하는 교통수단이 트렉터라고
얘기할 때는 그냥 흘려들었었는데...밤의 강변에서 그 말은 진실이었고 ...
평생 잊지 못할 추억쌓기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
권정생 선생님 생가 방문으로
시작된 안동, 영주, 영천 지역
역사문학기행.
청량산의 늦단풍은 고왔고
칼선대 벼랑 위에서 들려준
이육사의 ' 절정' 낭송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울림이 컸고,
낙동강의 구비진 물줄기와 강산을 물들이는 석양은
섬사람들에겐 쉬 접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이틀 밤낮으로 안동소주를 포함한 백여 병의 술을 마시고도 말짱한 시인과 작가들.
바쁜 일정을 비우고 달려와
따뜻한 노래 공연을 해준 '징검다리' 부부.
소리없이 이것저것 챙기느라 애쓴 피재현 시인. 그리고 상학.
영주에서 숙소로 찾아와
함께 자리해 준 권서각 시인, 박승민 시인. 그외 동료작가들.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정 마지막 날, 영천에서 만나
한국전쟁 전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의 비극을 들려주던 이중기 시인의 목소리는 왜 그리 떨렸는지요.
서북청년단이 이 영천지역에서
'학살 연습'을 하고 제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 딱 한 곳만 들를 수밖에 없어 찾아간 '아작골'
수백의 목숨이 스러져간 골짜기
어디에서도 학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울컥한 마음을 추스리고
그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오랫동안 머리숙였습니다.
휴식과 즐거움의 시간 속에서도
역사를 되돌아보는 순간들이 있어 고맙고 다행이었습니다.
막바지 가을날의 휴가,
오래오래 기억될...
......이종형
<다녀온 곳>
<권정생 선생 생가>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생가는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1(조탑안길 57-12)에 위치해 있다.
권정생 선생은 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출생하여 광복 직후 1946년 외가인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가난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으로 힘겹게 생활하였는데 객지를 떠돌면서 결핵과 늑막염 등의 병을 얻어 평생 병고에 시달렸다. 1967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한 권정생 선생은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기도 했다. 이때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해 1969년 단편동화《강아지 똥》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제1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1973년《조선일보》신춘문예 동화부문에《무명저고리와 엄마》당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하면서 1984년부터 교회 뒤편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오랜 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2007년 5월 17일 71세에 작고하였다. 2009년 3월 그의 유산과 인세를 기금으로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 위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저서: 동화 《강아지 똥》《사과나무밭 달님》《하느님의 눈물》《몽실언니》《점득이네》《밥데기 죽데기》《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한티재하늘》《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무명저고리와 엄마》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깜둥바가지 아줌마》 등과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
< 병산서원>
- 선조 5년(1572년)에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이 풍산현 북쪽에 있던 서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5년(1613년)에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됨
- 그 후 철종 14년(1863년)에 ‘병산’이라는 사액 받음.
- 병산서원은 낙동강 건너 병풍 모양의 아름다운 병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고남저의 지형에 따라 조화롭게 배치
- 남쪽으로부터 외삼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 만대루(晩對樓) 누각 아래로 오르면 좌우로 동·서재가 있고 정면으로 강당인 입교당(立敎堂)
- 사당은 입교당 뒤편 동쪽으로 살짝 비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으로 배치
- 서원의 부속건물로는 고직사와 장경각
만대루 :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는 멀리서 보면 기둥 위에 지붕이 덩그마니 놓인, 그야말로 텅 빈 공간.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부재와 장식적 공간을 극도로 절제한 건축의 멋, 바닥 평면과 기둥 높이 그리고 지붕의 물매 등 상큼한 비례가 시원하게 함. 만대루의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 보름 병산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만대루 앞 방형 연지에 비치고 서원 안마당에 달빛이 가득 내리면 병산서원은 그야말로 시적 공간.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백미요, 비어 있음 미학의 본보기.
동직재, 장서실 : 마당 동쪽에는 ‘동직재(動直齋)’, 서쪽에는 ‘장서실(藏書室)’이라 쓴 현판. 유생들의 기숙사로, 동재는 고학년, 서재는 신참 유생이 사용하는 곳.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
1904년 5월 18일(음 4.4)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 원삼(源三)
1927년 23세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얽혀 구속됨
1931년 27세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붙잡히다. 3월 석방.
1933년 29세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 상하이에서 루쉰(魯迅) 만남. 7월에 서울 잠입.
1934년 30세3월 20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경기도경찰부에 구속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9년 35세 8월 《청포도(靑葡萄)》, 1940년 36세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3년 39세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
1944년 40세1월 16일 새벽, 베이징에서 순국.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1960년 고향 원촌으로 이장)
1945년 유시(遺詩)《꽃》, 《광야》소개, 1946년 《육사시집》 출판함.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포장에서 1990년 기준 변화로 바뀜) 추서
2004년 탄신 100주년, 순국 60주기 맞추어 이육사문학관 개관, 생가 복원.
<청량사>
-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 창건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어서 중건 등의 역사는 전하지 않음. 다만, 창건 당시 승당(僧堂) 등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해짐
- 내청량사는 부대하는 당우로 볼 수 있는데, 전자를 유리보전(琉璃寶殿), 후자를 응진전(應眞殿)으로 별칭.
- 현재 여승의 수도처가 되고 있는 두 절은 극히 사세가 미약하며, 단지 유리보전만이 경북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
<칼선대>
- 왕모산 중턱에 있는 풍광이 빼어난 곳으로 절벽을 밑에서 올려다 볼 때 칼처럼 날카롭게 보인다고 해 '칼선대'라고 하며, 선녀가 내려왔다는 전설
- 왕모산(王母山)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걸쳐 있는 해발 648m 높이의 산
- 왕모 산성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유실되고 지금은 50m가량의 흔적
- 산성 안에는 공민왕 어머니를 신으로 모신 왕모당(王母堂)이 있고, 남녀 한 쌍의 목상
- 칼선대는 이육사가 대표작 '절정'의 시상을 떠올린 곳
- 공민왕은 이곳 안동에서 2개월 정도 머물렀지만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어 공민왕이나 그 가족을 신격화해 신앙 대상으로 삼은 마을도 9곳.
<월영교月映橋 >
-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과 성곡동 일원 2003년 안동호에 놓인 목책교.
- 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간직되어 있는 나무다리.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을 담아 다리 건설.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 다리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아작골>
영천경찰서 및 각 지서 경찰은 민보단, 우익 청년단(서북청년단), 방위대 등의 협조를 받아 보도연맹원들을 연행․구금하였으며, 군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이들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산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항쟁>
1946년 9월 23일, 부산에서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다른 지역의 철도 노동자는 물론 출판, 체신 등 다른 부문의 노동자도 동참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9월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25만 명이 넘었다. '정치범 석방' 구호도 있었지만 '일급제 폐지하고 월급제 실시', '점심 지급', '식량 배급'처럼 생활과 밀접한 요구 사항이 더 많았다. 미 군정의 정책 실패로 물가는 치솟는데 임금은 그것을 못 쫓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쌀을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10월 항쟁이 터졌다.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이 쏜 총에 시민 1명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시민들이 경찰서 등을 습격하는 항쟁이 방방곡곡에서 약 두 달간 벌어졌다. 10월 항쟁은 식량 부족,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 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보리공출과 대구 10월 항쟁>
<이중기 시인의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해방공간 한 선교사의 ‘영천 일기’②
해방 1945년은 풍년에다가 일본에 공출이 없어 쌀이 남아돌았고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시장제도’를 실시했다. 그런데 500만 섬 이상이 일본으로 밀수출되고 지주들이 곳간 빗장을 지르면서 국내에는 쌀이 절대 부족한 일이 벌어졌다. 패전국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미군정과 한민당의 묵인 아래 벌어진 밀수출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기 시작했다. 초근목피의 대재앙을 불러온 미군정은 일제도 하지 않았던 보리공출까지 너무 가혹하게 강행했고 그게 항쟁의 원인이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7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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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82)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방동마을의 그믐날... 연재중 일부
소작인으로 5, 6년을 살면서 착취당해온 조 동지의 집은 8.15해방을 맞이하여, 일제 지주의 착취에서 해방되었다. 그 왜놈 지주는 이 땅에서 쫓겨났고, 빼앗긴 아버지의 땅을 몽땅 도로 찾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8.15해방은 땅을 찾게 된 이 조 동지 집안의 구세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해방의 기쁨, 그리고 빼앗긴 땅을 찾았다는 기쁨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바로 그 해 한 해, 1945년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1946년 2월이 되자, 이와 같이 도로 찾은 땅을 미국 점령군의 소유라는 것으로 되었고, 1946년 2월부터는 소작료를 미 점령군의 대행자인 『신한공사』에서 받아간다는 것이다.
1946년 봄, 보리가을에는 일제 때 지랄을 하던 공출마저 새로 부활시켜 미국 엠피가 군정청 경찰을 끌고 와서 왜놈에게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은 것은 물론이고, 모든 농민에게 공출이라는 왜놈의 법을 가지고 빼앗아 가는 것이다.
1946년 11월부터는 가을 곡식을 또한 공출하라고 달려들었고, 조 동지의 집에는 『신한공사』라는 곳에서 소작료를 매기고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10월인민항쟁이 좀 숙어지자 면직원이 지서 순경을 대동하고 공출과 『신한공사』 지세 고지서를 들고 왔고, 12월부터는 강제로 집뒤짐을 해서 빼앗았으며, 『신한공사』의 지세를 받기 위해서는 미군이 군정경찰을 지휘하여 소작료로 약탈했으며, 이 가운데서 실력행사가 일어났고 숫한 농민들이 붙잡혀 갔고 폭행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다.
조 동지의 집에서도 공출 받으러 온 면 직원 그리고 지서 순경과 충돌이 생겼고, 이 충돌로 조 동지의 아버지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폭행을 당했다.
조 동지는 이와 같은 말도 되지 않은 미군정의 행정에 저항하는 투쟁에 발 벗고 나섰다. 마침내 조 동지는 『2.7구국투쟁』에 떨쳐나선 것이다.
2월 7일, 초동면 경찰지서 공격에서 한 손에는 사제 폭탄을 들고 한 손에는 사제권총을 들고 지서 안으로 쳐들어갔다.
“손들엇!”
경찰관은 모두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를 폭행한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그 경찰은 조 동지를 보자 겁이 나서 발악을 했다. 옆구리에 찬 권총으로 손이 가려는 찰라 누가 쏘았는지,
“탕!”
한방의 총소리, 그 경찰은 손에 쥔 권총을 떨어뜨렸고 쓰러졌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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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0월 대구항쟁 관련 참고자료<배경요약>를 보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