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세라토)
타라고나를 떠난 차가 해안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집도 점점 많아지고 공장도 자주 나타난다. 큰 도시에
가까이 온 것이다. 그들 말 그대로 옮기면 바로 이 지역이 까딸루냐다.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바르셀로나가 코앞에 다가왔다. 우린 그
쯤 방향을 틀어 바르셀로나를 비켜 내륙으로 향하는 지방도로를 탔다. 톱으로 자른 바위산이란 의미를 갖는 몬세라토라는 곳을 가기위해서다. 그곳은
고도 1235미터의 바위산으로 11세기부터 베네딕트 수도원이 세워져 경치로서도 말할 것도 없고 이 지역에선 성모 마리아 성지로서 카탈루냐
사람들의 종교적 터전이 되어 온 곳이다. 프랑코 총통은 그들의 독립을 염려하여 카탈루냐어로 미사를 보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그들은 이를 어기고
카탈루냐의 독립과 저항의 상징으로 이곳을 택하였다고 한다.
그곳 성지에 이르렀음은 바위산과 그를 향하는 케이블카로 한 눈에 알아보았다. 우리는 한적한 산동네의 냇가를 건너
케이블카 타는 곳에 차를 대고 케이블카를 탔다. 오르면서 내려 보이는 기암괴석을 보니 영암에 있는 월출산 바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저마다 제멋대로 뾰족 솟은 하얀 돌이 산 특유의 질감을 자아내며 시선을 모으게 한다. 사는 모습들은 저렇게 제각각이지만 같이 어울려서도
웅장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군상을 만들 수 있다. 우리들도 그런 자연의 느낌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따로 잘 나 제 모습을
보아주기만을 바라는 군상들이 과연 누구일까. 자연속의 훈훈한 미덕을 보는 듯 나는 그렇게 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바위 틈 좁다란
산길이 빤히 보였다. 케이블카가 없던 그 시대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리기 위해 오르던 산길임에 틀림이 없다.
목회자는 무릇 삶의 고통을 딛고 고산에 피어난 한 떨기 에델바이스와 같다. 수련과 고행으로 해탈에 이르고
거룩한 사랑이 되는 것은 동서고금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똑같은 섭리다. 자기성찰과 희생 속에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음 속에 삶의 진리가 있다.
베풀고 섬기는 것이 삶의 길이고 용서와 사랑은 삶의 참된 가치다. 그 쯤 자비와 사랑은 합치된 하나의 사상이고 이 세상 빚어낸 조물주의 뜻이
아니던가. 나 같이 믿음도 별로 없는 돌팔이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오르는 산길에 에델바이스라도 곱게 폈으면
좋겠다. 어느덧 케이블카는 산 중턱에 닿았다. 수도원이 바로 산중턱에 있다고 했다. 깎아 오른 산 중턱에 이렇게 넓은 대지가 차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디부터 볼 것인가 망설이다가 우리는 푸니쿨라를 타고 산 정상까지 먼저 가보기로 했다. 산 정상에 올라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저 쪽은 필시 사라고사 쯤 될 것이라 곳을 바라보았다.
로마시대 때 기독교 박해를 받은 대표적인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곳도 성모 신앙의 성지로서 필라르 기적이 있다
하였다. 그러고 보면 스페인은 곳곳에 기독교 성지가 펼쳐져 있다. 로마 교황청이 스페인을 그 시대 유럽의 큰언니라고 한 것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장장 8백년에 걸쳐 국토회복을 하였으며 이후로도 십자군원정에 참여하거나 신교로 나서는 영국과 전쟁을 치루기도 하는 스페인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톨릭의 총 본산과도 다름이 없다. 알다시피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로 나누어져 교황청의 뒷받침이 되어
주지를 못하였었다. 베네치아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적극 참여를 하였으나 이는 오스만투르크가 그들의 해상통로를 막아 살길이 막막하여 그간 벌은
뒷돈을 들여 참여 한 것이다. 스페인처럼 조건 없이 종교적으로 헌신한 것은 아니다.
그 바람에 스페인은 애써 신대륙에서 벌어들인 재화를 자신들을 위해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군비축적이나 전쟁에
쏟아 부어야 했다. 어느 면 약삭빠르지 못하여 몇몇 귀족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모두 허약하여 그로 인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개혁을 위한 중심세력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수난과 쿠테타가 되풀이하여 발생되었다고 나는 본다. 왜 그들은 못난 왕들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도 끝내 버리지 않았는가.
내가 여행을 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줄곧 갖았던 의문이다. 알고 싶은데 모를 것이다. 그들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시원찮은 왕 때문 좋은 호시절을
놓치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자면 이러하다.
그들의 왕권 통치는 1492년 국토회복 완수를 시발로 급속히 가속화된다. 귀족들이 감히 왕권에 도전을 못하도록
절대적으로 군림을 한다. 민심은 어디까지나 천심이라 그것만으로 왕권이 저 아래 하층 계급까지 파급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바로 난 그 점에
있어서 이사벨 기독교왕들을 대단한 예지의 왕들로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종교와 왕권을 같이 묶어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통치권이
가톨릭수호이고 가톨릭의 믿음이 왕권과 부합되며 이는 곧 백성의 할 도리로 자연적 자리하게끔 만든 왕이 바로 그들이다. 이를 발판으로 왕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교회 추종세력은 부를 축적하며 이에 순종하였다. 그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 왕을 저버린다는 것은 곧 믿음을 잃는다는 것이니
그 누가 믿음을 배반하면서 왕을 버릴까. 그러한 통치 속성은 현세에서도 계속되어 결국 나중엔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만 프랑코 총통은
가톨릭을 등에 업고 독재를 시작하였었다. 나는 이를 그들의 뼈저린 정신적 아픔으로 본다. 물론 이 말을 들으면 그들은 펄쩍펄쩍 뛸 것이겠지만
어렵게 종교를 되찾았으나 이로 인하여 발목이 잡힌 꼴이라 할까.
누구를 왕으로 추대할 것인지 싸움이 일어나도 결코 왕족이 아닌 사람들이 끼어들지 않은 것이 바로 그런 연유이고 세
살짜리가 왕이 되어도 곱사등이나 광녀가 왕이 되어도 이를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것이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역사학자도 아니고 그곳에
산 사람도 아닌 이방인이라 보는 견해가 짧아 가당치도 않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정도로 생각해 두기로 하였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내려와
대성당으로 향하였다. 성당의 웅장함이 산세의 수려함에 겹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믿음이 절로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안에 들어서
이층으로 올라 모네레타라는 검은 마리아상을 보았다. 정말 얼굴이 검다. 이 마리아상은 원래부터 검은 것이 아니라 신도들이 바친 등불에 오랜 세월
그을려 검어졌다고 한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들의 마음을 바로 알아 몸소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런 마리아님을 보니 믿음이 모자라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간절히 기도하였을 그 시대 어린 백성들을 다시 보는 듯싶다. 대성당을 빠져나오자 산위 바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저녁놀이 아름답다. 마치 공양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사를 하산하는 기분이 든다. 산길을 오른 그들도 그쯤 세속을 떠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철저한 불교신자인 아내가 곳에 동전을 놓고 온 것 또한 믿음이란 마음의 것으로 동화되어 필시 깨끗하고 소중한
삶의 것을 원하여 그리 한 것이리라.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하는 세상이라니 종교도 돈이 필요하겠지만 믿음의 종교가 어디 정치에 속할 것이고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돈과 권력으로 쓰라린 과거를 겪었음에도 현실은 여전히 어쩌지 못하는 것만 같다. 이를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까.
세상사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하다. 믿음의 계곡에 어둠이 짙다 느낄 뿐 이에 더 할 이야기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