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섣달 그믐 날이면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 경주 북천 강가 숲속 어느 초가집 우리집에도 아침부터 설 차례 준비에 분주하다.
기왓장 조각을 빻은 가루를 쟁깨미라고 했는데 멍석을 깔고 쟁깨미를 볏짚에 묻혀서 제사에서 쓰는 놋그릇을 닦으면 녹이 지워지고 반짝반짝 광이 난다. 아버지는 제사상 준비 하신다고 방안에서 도마질 소리가 뚝딱거린다. 돔배기며 조기등 산적을 만들고 밤을 깎고......
우리들은 옹기종기 둘러 앉아 칼질에 튕겨나오는 생선 꽁다리며 부스러기를 낼름낼름 주어 먹으며 설 만의 특수를 누린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구멍이 쑹쑹 뚫어져 눈발이 날려들어 오는 부엌에서 찬바람을 참으며 종일 나무가지 땔감을 지펴 지짐을 굽고 조청을 고아 숱뚜껑 엎어 놓고 쌀강정 콩강정 좁쌀강정 깨강정 만드 신다고 분주하다.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연기가 역류하여 온통 눈물 범벅으로 설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우리들은 안방에서 부엌 쪽문을 열고 마치 어미가 오면 서로 먹이를 달라고 입벌리고 짹짹 거리 제비 새끼마냥 강정 등 설 음식을 잘라내고 남는 짜투리를 한 조각이라도 얻어 먹으려고 다투어 손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저녁에 쇠죽을 끓여 퍼주고 난 가마솥에 우물물을 길어다 부어 뒷불에 따끈하게 끓으면 솥에 들어가 한 해 동안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내는 목욕 행사를 했다.
어머니는 외양간 사랑방 우리집 곳곳에 불을 밝히고 방 윗목엔 상을 차리고 쌀 담은 그릇에 촛불을 꽂고 불을 밝히고 날을 샜다.
하나 밖에 없는 좁은 방에는 이불을 펴고 이불 밑에 우리 식구 모두가 오글오글 다리를 뻗어 서로 끼우고 잠을 잤다. 문풍지를 붙였지만 문 틈 사이에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 이불을 서로 많이 덮으려 당기다가 발로 차고 이불 밑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믐 날 저녁이면 밤에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 보고 신발이 맞는 애를 대리고 간다하여 신발을 모두 방안에 들여 놓고 문고리에는 채(술 찌꺼끼등을 걸러내는 도구)를 걸어두었다. 채를 걸어두면 귀신이 방 문을 열지 못한다고 했다.
밤새 바람 소리에 문고리에 걸린 채가 연신 투닥거리는 소리가 귀신이 온 줄 알고 우리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서운 밤을 보내야 했다. 또 섣달 그믐 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쇤다고 하여 억지로 눈을 감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언제 잠 들었는지 잠이 들어 버렸다가 아침에 화들짝 놀라 얼른 거울을 보며 다투어 눈썹을 확인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때 그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10년이 훌쩍 지나 버렸고 어머니라도 계셔서 중심이 되었는데 지난 연말에 돌아가시어 이제 내가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오늘 섣달 그믐 날, 우리 가족들이 그렇게 북적대던 경주 옛집 어린시절 우리집 모습, 설빔을 분주히 준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 모습이 아련한 기억으로 살아난다. 아, 오늘따라 아버지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싶고 그립구나.
2019년 기해년 황금돼지해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소원성취하시고 건강하세요.
최성보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