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孤獨) “하나님은 당신의 외로움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난 12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나라 중 하나, 반려견에게서 동반자를 찾다”는 제목으로 한국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개를 식용으로 사육하는 전통으로 인해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동물권 단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람들은 반려동물, 특히 개를 키우는 데 열광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4가구 중 1가구는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지난달 29일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에서는 “반려견과 함께하는 선명상 축제”가 열려 반려견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하고, 충북 증평의 한 사찰에서는 강아지와 함께 참여하는 템플스테이 “댕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속에 취업을 포기하고 사회와 단절된 채 외로움속에 고립된 청년의 수는 지난해 54만명, 전체 청년인구의 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사회와 단절된 채 좁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청년 54만명, 누군가는 “개인적인 일”이라고 깎아내릴지 모르지만, 심각한 사회문제, 미래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청년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병이 드는 것은 물론이지만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실시한 온라인 심층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립과 은둔 청년 8436명 중 6360명(75.4%)이 자살을 생각했고, 이중 1698명(26.7%)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과연 사회에서 말하는 정부의 정책이 해결의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고립과 운둔의 외로움이 사회적인 취업과 인간관계, 개인 성향만의 문제일까요? 한 전문가는 이렇게 솔직한 고견을 밝혔습니다. “그들을 무조건 밖으로 나오게 하는 정책이나 제도는 실효성이 없다. 1차적으로 청년들이 왜 은둔하게 됐는지 이유를 파악한 후 심리ㆍ정서적인 부분을 치료해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들의 잃어버린 자존감과 소중한 정체성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요?
만일 인생 행복과 성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버드대학의 ‘그랜트 연구’(Grant Study)팀은 20대의 젊은이 268명이 90대 노인이 되기까지 그들의 삶과 건강에 대해 75년간 연구한 결과 행복의 비결도 결국엔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사이의 “함께 나누는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공적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특권이 아니라 어린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경험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사랑받고 자란 아이보다 70세에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한 비율이 8배 더 높았고, 어린 시절 어머니와 따뜻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노년기에 치매에 걸린 비율이 높았으며,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일수록 결혼 생활이 불행했습니다.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었습니다.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고백하기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4:9-12)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요, 인간과의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가장 기쁘시게 여겼던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靈的) 존재로 창조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행복과 축복을 누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인간에겐 여섯가지 인생의 운명과 팔자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문제, 성공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과 반복되는 비이성적인 문제들, 살아갈수록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 가장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이 돼지머리에 절을 하고, 나무와 짐승, 돌을 섬기며 부적에 의지하며 행복을 기대하는 어리석음, 삶의 편리함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우울증과 정신 문제들, 날로 늘어만 가는 악한 범죄의 반복들, 늘어만 가는 질병으로 무너져 가는 건강과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이후 지옥이라는 영원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공포, 여기다가 또 반복될 수밖에 없는 불행의 대물림...과연 없다고 말할 수도, 나는 아니라고 부인할 수만은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의 원래 축복을 회복하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하는 길,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난 원죄(原罪)와 그로 말미암아 멸망 가운데 살아야 하는 모든 인간에게 다시금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1:12-13)
■죄(罪)로 인한 인간의 저주와 재앙, 운명과 팔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8: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불행의 장본인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멸하시고, 영원한 지옥 심판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한일서3:8)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1:13-14)
인생 고독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당신과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참된 치유의 시작→ 영적본질 회복
동물과 인간이 확실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짐승에겐 종교가 없지만 인간 사회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1:27-28) 그리고 인간에게만 영혼을 담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창세기2:7) 그리고 누구든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3:11) 그래서 인간 행복의 문제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본질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도 행복을 찾아 몸부림치는데 왜 인간에겐 원치않는 실패와 불행이 계속 찾아오는 것일까요? 바로 인간의 본질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문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문제,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찾아온 문제, 사탄(Satan)의 손에 장악되어 고통 받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영적 문제요 원죄(原罪)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나의 집안에 반복되어 찾아오는 문제가 영적 문제입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정신 문제, 육신 문제, 가정 문제, 내세 문제, 후대 문제가 오게 됩니다.
영적문제는 하나님을 떠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셨습니다(요한복음14:6). 모든 죄와 저주, 사주팔자 운명에서 해방되는 길이 되셨습니다(로마서8:2). 사탄(마귀)의 일을 멸하며, 그 손에 붙잡혀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하는 길이 되셨습니다(요한일서3:8, 히브리서2:14-15).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고통과 사탄의 손에서 해방되며, 영적 문제를 이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승리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속지 마십시오. 어떤 환경, 문제 속에서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항상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20)
에덴의 행복① -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 히브리어 어법으로는 이 둘을 동의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라틴어: Imago Dei).
그러나 고대교회 이래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같은 것으로 보고 그 형상을 광의적인 형상(구조적)과 협의적인 형상(기능적)의 두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 측면의 형상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삼중적인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이며,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작동하게 하는 올바른 기능성으로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이 그것입니다(골3:10, 엡4:24). 그러나 이 둘은 구분하는 것이지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27절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그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 (본질의 사전적 정의는 “현상 배후에 있는 실재”이다. 그것으로 그것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없으면 더 이상 그것일 수 없게 하는 것이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이라 할 때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유일성을 본질이라 할 수 있겠다.) 인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합니까?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존재, 지혜), 호모 파브르(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퀴언스(언어를 구사하는 존재), 자기반성, 이성, 영혼, 등등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을 놓치면 사람을 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개념 속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