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교육열이 높았던 필리포스 2세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해 13-16세 때까지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맡겼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떠날 때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리스 문화나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즉위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북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코린토스로 가서 그리스 동맹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왕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됐음을 정식으로 승인하도록 했다.
그동안 그는 테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물론 이 반란은 그리스 동맹의 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이 반란의 처리를 일임하게 된 동맹 이사회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그 토지를 동맹 도시들에 분배했을 뿐 아니라 테베인은 모두 노예로 삼았다. 동맹 이사회의 결정이라는 형태를 띠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당연히 알렉산드로스였다. 이 사건 이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무자비하고 가혹한 파괴자’라는 고리표가 따라다녔다.
기원전 334년 봄, 본국 마케도니아의 내정은 부왕 필리포스 2세 시절부터 측근이던 장군 안티파트로스에게 일임하고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부사령관에는 필리포스 2세의 부하였던 명장 파르메니오를 지명했다. 해협을 건넌 병력은 “최소 보병 3만, 기병 4,000, 많게는 보병 4만, 기병 5,000”(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다. 이 중 보병이나 기병에도 그리스 동맹군이 참가하고 있었으며, 이 밖에 5,000명의 그리스 용병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병사의 수는 전체의 30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 원정을 떠나며, “과거 페르시아가 그리스 신전에서 했던 신성 모독 행위에 대한 복수”를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그리스 병사의 참전은 이러한 대의명분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고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일단 달성되는데, 거기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은 그라니코스, 이수스, 가우가멜라의 3개 지역에서 페르시아와 큰 전투를 벌였다.
첫 번째 전투는 소아시아의 북서부에 있는 그라니코스(지금의 코카바스 강) 강가에서 벌어졌다. 그라니코스 강은 이른바 ‘아시아로 통하는 문’이라 불리는 프리기아의 중요한 관문이다. 이 강을 건너면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은 지척이고 그 길은 페르시아 제국 소아시아의 중추인 사르디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전투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제위 기원전 336-330)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에서 가슴에 창을 맞지만 클레이토스 등 측근이 그를 구했다.
전투가 끝난 뒤 고르디움의 신전에 들른 알렉산드로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 신전에는 전차를 묶어놓은 복잡한 매듭이 있었다. ‘고르디움의 매듭’으로 알려진 이 매듭에는 “매듭을 푸는 자는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매듭을 보자 한 칼에 베어 매듭을 풀었다고 한다.
다음은 기원전 333년 가을,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륙 경계에 있는, 오늘날 터키공화국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 실리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이수스 전투다. 실리시아는 동쪽으로 아마나스 산맥, 북, 서쪽으로 타우루스 산맥이 솟아 있으며 시리아로 빠지는 좁은 관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수스는 실리시아의 남쪽에 펼쳐진 작은 평원 너머 동쪽 끝에 있는 산악지대다. 알렉산드로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다리우스와 직접 대치했다.
애초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린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로 망명한 아뮨타스의 조언으로 아마나스 산지의 남쪽, 시리아로 펼쳐진 소코이 평원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자 참을성이 없는 다리우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뮨타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알렉산드로스는…..다리우스가 직접 출전했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는 간신배들의 말만 믿고(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방 원정기>) 대군을 아마나스 산중의 좁은 전장에 배치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다리우스의 패배는 결정됐다. 다리우스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함께 그의 어머니와 왕비, 왕녀 등 왕실의 부녀자들도 남겨두고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2세기 전반에 로마 제국 카파도키아의 총독을 역임했으며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아리아노스가 남긴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방 원정기>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붙잡힌 다리우스의 어머니나 왕비, 왕녀들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추격전에서 돌아온 날 밤, 자신의 막사 근처에서 여인들의 비탄에 잠긴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종을 시켜 알아보니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활과 방패, 게다가 망토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왕비가 다리우스가 죽었다고 생각해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측근 한 명을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보내 “다리우스는 아직 살아있으며 무기와 망노는 그가 도망치면서 전차에 두고 간 것으로, 내가 얻은 것은 이 물건들뿐”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왕족의 신분에 걸맞게 대접할 것이며, 왕족으로서의 존엄을 가지고 여왕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다리우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은 개인적인 적의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갖고 아시아의 지배권을 다투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정의감과 마음 씀씀이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다리우스는 바빌론으로 대피해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세 번째 결전을 준비했다. 그동안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를 뿌리뽑기 위해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 이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튜로스 왕은 용감하게 저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작은 섬을 굴복시키는 데 7개월이나 걸렸다. 또한 가자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어깨에 중상을 입는 등 가자를 굴복시키는 데도 두 달의 기간이 걸렸다.
기원전 332년 1월, 이집트는 무저항 백기투항을 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멤피스에서 파라오 대관식을 치렀다. 오늘날 이지브의 룩소르에 가면 신전에 새겨진 알렉산드로스 상을 볼 수 있다. 그는 또 나일 델타의 서쪽에 처음으로 식민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후대에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 세계에 찬란히 빛나는 국제도시가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은 세 번째이자 최후의 결전에 나서게 된다. 장소는 오늘날의 북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 하구에 있는 가우가멜라(지금의 텔 고멜) 평원이었다. 이때 페르시아군은 수십만에 이르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대군이었으며 거기에 15마리의 코끼리와 예리한 칼날을 매단 200대의 전차까지 준비했다. 전황은 알렉산드로스가 적과 대치한 자신의 군대를 우측으로 전개하자 이를 맞이한 페르시아군의 좌측 부대가 전투를 개시했고, 이때 페르시아군의 전열에 틈이 생겼다. 이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기병과 중보병으로 I자 대형으로 만들어 단숨에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돌격했다. 다이우스는 전세가 아직 기울지 않았음에도 전선을 이탈했고 이것으로 승패는 결정되었다. 다리우스는 이후에 메디아의 엑바타나로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도 바빌론에 무혈 입성해 엄청난 양의 재물을 손에 넣었다. 나아가 그는 페르시아 본토로 진격해 수도인 수사를 거쳐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페르세폴리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70킬로미터)에 입성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도시를 수도로 삼았는데, 그중에서도 이 두 도시는 수사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특히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인의 도시’를 의미하는 파르사의 중심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에 4개월간 머물렀는데 기원전 330년 5월(1월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했던 이 도시의 궁전을 불태우게 된다.
페르세폴리스를 점거하고 그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그가 내걸었던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라는 대의명분은 이뤄졌다. 실제로 그 후에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에 진군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그곳에서 또다시 박트리아로 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테살리아군과 그리스 동맹군을 해산, 귀국시켰다.
그 후 다리우스는 측근이었던 박트리아인 베수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지내고 그때부터 자신을 스스로 ‘페르시아 왕의 후계자’라 칭했다. 옥수스 강(지금의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망친 베수스는 결국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혀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후에도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이란 동부, 아프가니스탄, 박트리아 등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변경이었던 땅들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따라 남하했다. 이윽고 인더스 강에 도달했고 거기서 더욱 남하해 현재의 펀자브 주 히파시스 강(지금의 베아스 강)에 이르렀다.
동방 원정은 이곳에서 끝났다. 그를 따라온 병사들이 행군에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7개월 동안 인도양으로 나와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혹한 사막을 횡단해 기원전 324년 2월,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수사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12년 만에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땅을 수중에 넣었고, 인도의 일부 지역에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빛과 그림자
알렉산드로스는 군사적인 면에서 천재였다고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군과의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대군을 상대로 모두 완승을 거두었다. 정세를 파악하고 불리한 지형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고 용병술, 기병을 활용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의 본진을 향해 돌격하는 등 전략과 전술이 매우 뛰어났다. 페르시아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던 다리우스는 이런 전술가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용맹함이 신화적으로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리스, 페르시아전쟁을 기술한 헤로도토스도 그랬지만 정통적 사관으로 분류되는 아리아노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기술한 저자들 모두가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를 과장되게 표현했다. 예컨대 아리아노스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60만 명,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100만 명으로 적고 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지적했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만으로 쓰인 자료는 거의 없다. 자료는 모두 그리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들이며,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쓰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점에 대해 페르시아 역사의 저명한 연구가인 리처드 N. 프라이는 “아마도 그라니코스에서는 마케도니아군의 수가 페르시아군보다도 많았을 것이다”고 얘기했다. 결국 양쪽 군사의 전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전투기계로 단련된 마케도니아군과 오합지졸 페르시아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페르시아군의 기병은 마케도니아군의 기병과 거의 대등했으나 보병은 마케도니아 중보병 군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페르시아가 믿을 곳은 그리스 용병뿐이었는데(페르시아군에도 그리스 용병이 다수 있었다), 결국 그들도 돈으로 고용한 병사일 뿐이엇다. 예리한 칼날과 전차를 전투에 투입했던 것은 승승장구하는 마케도니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햇던 다리우스의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고 프라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 용병에 관해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당시에는 그리스의 도시에서 수많은 정치적 망명자나 범죄자들이 추방되는가 하면 경제적인 이유로 돈을 벌려고 고향을 떠나 용병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년 동안 이어진 팍스 아케메니아로 말미암아 페르시아군은 이들 용병을 많이 고용했고, 이러한 평화체제는 자연히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다리우스 3세의 나약한 모습도 대부분은 그의 개인적 성격에 기인하겠지만 이런 팍스 아케메니아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에 대한 생각 또한 크게 변했다는 게 정설이다. 애초에 동방 원정은 부왕 필리포스 2세의 유지를 받들어 ‘페르시아가 저질렀던 신성 모독에 대한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랑캐(바르바로이)’에 대한 복수라는 목적은 명목에 불과햇으며, 그의 진정한 목표는 처음부터 ‘아시아의 왕’이 되는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과연 알렉산드로스에게 처음부터 그런 의지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페르시아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바빌론의 지방장관(사트라프)에 페르시아 귀족 마자이오스를 임명할 무렵부터 점차 달라졌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를 함락하고 왕위를 찬탈당한 다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왕’이라 자신을 칭하기 시작하면서 매우 명확해진다. 이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계급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수사와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이란 고원지대의 지방행정구역 책임자로 임명됐다. 피에르 브리앙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따르면 기원전 331-327에 걸쳐 정복된 12개의 구역 중 한 곳을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처음부터 페르시아인 총독이 임명됐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왕의 의복을 입었고, 그리스인과 마테도니아인들에게도 절을 하는 페르시아 궁중 의식을 강요했다. ‘절을 하는 의식’이 무엇인지는 앞서 설명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페르시아식 의식을 강요하자 그의 측근들도 강하게 반발해 결국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페르시아와의 통합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기원전 327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박트이라왕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네와 결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을 장려하기 위해 수사에서 개선을 축하하는 대연회를 열고 80명의 무장을 페르시아인 여성과 결혼시켰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햇다. 또한 1만 명의 장병에게 페르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고 거액의 결혼자금을 하사햇다.
알렉산드로스는 지방행정조직의 장관이나 간부에 페르시아인을 다수 기용했을 뿐 아니라 군대에서도 페르시아인을 그리스인과 동등하게 채용했다. 이에 마케도니아인들이 강하게 반발했음에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기병을 중용해 차래로 기병군단에 편입시킴으로써 마케도니아의 기병대를 더욱 강화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기반은 더 이상 마케도니아가 아닌 페르시아에 있었다. ‘오랑캐(바르바로이)’는 마케도니아였으며 페르시아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수준이 마케도니아를 훨씬 능가할 정도였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동방세계의 전제주의가 되기 시작했다’(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결코 선진국이 아니었다. 감화되고 영향을 받은 것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이었으며 그의 최대 업적이라 일컬어지는 동방세계의 그리스화를 의미하는 문화 전파, 이른바 헬레니즘은 오히려 그리스,마케도니아의 문화가 동방화된 것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포악한 일면이 도사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고결한 인품으로 부하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던 그였지만 술을 마시면 성격이 돌변했다. 그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한 죽마고우이자 기병친위대장이었던 클레이토스를 술자리의 사소한 다툼 때문에 창으로 찔러 죽였다. 마케도니아의 기병을 지휘하며 중요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필로타스도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돼 고문 끝에 투석형에 처해졌다. 필로타스는 부관 파르메니오의 아들이다. 파르메니오는 마케도니아군 좌측 부대 지휘를 맡았던 노장군으로 그의 아들들은 모두 동방 원정 중에 죽었다. 파르메니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간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장이었으나, 그도 결국 70세에 처형을 당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철학자인 칼리스테네스도 처형됐다. 알렉산드로스의 숭배자였던 그는 대왕의 정사를 기록하기 위해 원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식 의식을 거부하다 목숨을 잃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술자리에서 처형한 측근과 부하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V. D. 한센, <고대 그리스의 전투>).
이처럼 광기로 가득한 잔혹함 때문에 역사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이중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세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웠는데, 이는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결과라는 설이 유력하다.
충동설은 페르세폴리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 도중에 마케도니아군과 함께 다니던 창부 타이스가 꼬드겨 방화했다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실존 인물인 타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이집트의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으로, 아티카 태생”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것은 페르세폴리스 점령 직후인 기원전 330년 1월이 아니라 그로부터 4개월이나 지난 5월이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그런 점에서 충동적인 방화가 아니라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장대하고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를 보고 처음에는 놀랐을 것이며, 그 놀라움은 점차 질투로 변했을 것이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움으로써 그는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페르시아 왕’임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궁전에 불을 붙인 후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후회하고 불을 끄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하고 있다. 어째 됐든 ‘그리스인의 복수’를 위해 이 같은 세계 유산을 파괴한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며 역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됐다.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죽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연회가 끝난 후 열이 나기 시작햇고, 6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고열에 시달렸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슨ㄴ 28일 초저녁 끝내 숨을 거뒀다”고 기록했다. 짧고도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