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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차별은 죄악이다
1. 바울의 여성관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여성을 매우 비하하는 바울의 여성관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자들의 글이
심심찮게 카페에 올라오는데 그 때마다 여성들은 당황합니다.
이를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다시 그런 인간의 연민같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오직 성서 기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비하는 성경적으로 마땅하다는 생각하에 그에 대해 여성들과
사이버 공개석상에서 변론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충분히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인가 봅니다만, 그렇다면 우선 그들은
"여자는 회중(공개석상)에서 일절 잠잠하라" 는
바울의 명령을 범하도록 부추키는 꼴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바울의 여성관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도 지키지 못할
고약한 율법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율법적 여성비하는 남녀 모두를 구속하는
악법으로서, 이제는 철폐되어야 함을 스스로
입증시켜 주고 있는 셈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여자는 회중에서 일절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무슨 알고싶은 것이
있을지라도 회중에서는 묻지도 말고 집에 가서 그 남편에게나 알아보도록
명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일이 생명을 얻는 일일진데, 여자의 생명권을
오직 그 남편이 주장하도록 가르쳤는데, 그나마 남편이 없거나 불신자일
경우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여성비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고, 천사의 권세아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자는 반드시 그 머리에 무슨 수건같은 것을 써야만 하는데,
만일 그리하지 아니할 때는 여자들 스스로 그 마음에 부끄러운 줄
알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여자가 남자와 평등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양심법을
어기는 죄악이라는 말이 되고, 여자들은 천성적으로 타고나기를 남자앞에
절대 부복하지 않으면 못배기는 성도착증적 감정을 가진 자들임을
천명한 것이 되는데 과연 그럴까요?
바울의 이러한 여성비하가 성경적으로 반드시 옳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의 가까운 혈육과 가족들인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매와
딸 등에게 과연 그러한 성도착증적 감정이 여자들에게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녀들의 대답이 "예스" 이면 바울과 그들의
여성비하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대답이 만일 "아니오"
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매와 딸들을 하나님의
재판에 먼저 회부해서 처벌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인터넷시장에 바울의 여성비하가 옳다는 글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성서적이지도 않고, 오직 영감받은 성경인
바울의 여성비하 기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서에 기록해 주시기를 안식일에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말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 즉 안식일을
범하여 사경에 있는 짐승 한마리를 불쌍히 여겨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짐승 한 마리에게도 연민을 느끼시고 불쌍히 여겨 하나님이
금하신 안식일을 범하시면서까지 구해주셨는데, 그들은 극단적으로
여성을 비하한 바울의 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어머니요, 아내요,
자매요, 딸들인 여성들에게 연민을 느껴서 수수천년 그들이 흘려온
슬픈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인가요? 성서자구를
충실히 지켜 그들의 몸 하나 구원받기 위해 그 많은 여성들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아도 좋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또 묻고 싶습니다.
인류의 절반인 지구상의 여자들은 짐승 한마리 보다 못하고 바울의
여성비하를 주장하는 그들은 짐승 한마리를 구해주신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들인가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짐승 한마리보다 이 땅의 수많은 여자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어주신 십자가란
곧 이러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성서자구를 지키는 것이 구원인 줄 알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즉 나를 낮추고, 서로 사랑하는 정신과
마음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지 말라는 성서자구를
지키기 보다는 안식일에 고통을 당하는 짐승 한 마리를 구해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본을 보여주셨다면, 우리도 그 본을 받아
진정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될 때에, 오히려 난해한
성경자구의 의미가 낱낱이 풀려지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될것입니다.
성서자구에 갇힌 교만한 지금까지의 내 율법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성경문자 속의 하나님의 참 뜻은 드러나서 구원을 받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여성비하도 십자가에 못박아 보십시요.
그러면 오히려 성경을 깨닫게 되고 구원을 깨닫게 될것입니다.
2. 바울의 여성비하를 십자가에 못박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창조하시니),
나도 일(창조)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과거에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이 나라와 저 나라,
성경과 과학, 너와 나, 서양과 동양 등의 상대적 음양의 창조입니다.
이러한 음양의 창조란, 그 시작은 음은 가장 낮고 양은 가장 높게 음양이
최대로 벌어져 있는 양극으로서 가장 나쁜 모습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음양이 창조완성으로 달려갈수록 음과 양은 점점 가까워져서
결국은 하나로 조화롭게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먼저 지어지고
음은 후에 지어지므로 창조진행 중에는 억음존양이 되는 흉한 모습이었으나,
창조 완성의 오메가 포인트는 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이러한 음양론의 원리에서
생명의 시작이 있고 완성으로 마감하는데, 완성이 될 때에는 완전히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러한 음양론의 만남을 알지 못하고, 즉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진행될 하나님의 창조론을 알지 못하고 여자 위에
남자 있다고 못박아 잘못 가르쳤습니다. 이는 영원히 음양이 하나로
만나지 못하는 주종관계라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오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오류를 믿는 동안은 성경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가 이처럼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창조를 알지 못한 결과 전체적인
성경도 풀리지 않았지만, 그가 저질은 여성학대는 삼대출처 공자의
칠거지악을 능가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공자의 칠거지악을 능가할 정도로 여성학대를 자초한
자가 되었을까요? 바울은 구약의 유대당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유대당에 아주 열심이 극해서 그는 복음 초에는 예수 믿는 신도들을
박해하여 잡아죽이는 앞잡이로 악명을 날렸습니다.
그런 그가 또 신도들을 핍박하고 잡아죽이러 다멕섹 언덕을 지나는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복음전파의 대부로 급전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수퍼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그의 여성관은
여전히 과거 유대당의 여성차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당의 남존여비 사상은 극에 달해서 항상 여자는 그 남편을 주라고
호칭할 만큼, 남과 여의 양극은 심화되어 있어 주종관계적이었는데
바울이 바로 이러한 유대당의 전통적인 주종관계의 남녀차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14:34)"
이처럼 "율법에 이른것 같이" 라고 한점을 보십시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유대당의 율법을 폐하고 만민을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는 그가 유독 여성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율법은 부활시켰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폐했다고 하는 그가 그 율법의 족쇄를 여자들에게만은 채워주고
그 율법의 눈물을 여자들에게만은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울의 그러한 율법을 적용한 여성비하에 누구 한사람
의문을 제기하기는 커녕 박수를 보내며 장장 이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저 중세 때는 바울의 여성억압의 율법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똑똑한 여성들은 사로잡아서
화형시키는 끔찍한 마냥사냥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성을 이등인간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이 있다면 이제
여자는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남자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바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자신이 여자가 되어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끌려갔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그래도 바울의 여성비하의 그 끔찍한 율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사례라고 일축하려 들겠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가볍게 여기거나 외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교의 구약성경의 주제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서로 죽이고 죽는 얼마나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졌던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밀어라" 로
바뀌었습니다. 이 두개의 상반된 주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는 음양이 최대로 벌어져 있는 대결구도이지
완성을 향해 있는 창조는 아닙니다.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밀 수 있는 "서로 사랑하라" 로
바뀌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여전히 음양이 최대로 벌어져 다투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였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창조는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빛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했나요?
복음전파의 거보를 내딛는 창조는 있었지만,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여전히 여자 위에 남자 있다고 못박으므로써, 남과 여가 함께 이루어야할
공존의 발전과 음양조화의 창조를 가로막고 "이는 이로"의 대결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유대교의 관습에서 조차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여성비하였습니다.
시대의 흐름속에 남자의 위상과 여자의 위상이 점점 가까히 하나로 만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히 역행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인지 잘 몰라 저 옛적 유대교시대에서 조차 없었던 극단적 여성비하와
여성차별의 죄악을 저질렀는데(사실 바울은 선악과를 준 옛뱀임)
이제라도 그 죄악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3. 남존여비(男尊女卑)시대는 지나고 여상남하(女上男下)시대가 열린다.
어느날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남자가 여자와 살다가 살기 싫어지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어버리라는
유대교의 교리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나 너희의 완악함을 인하여 허락된 것 뿐(마19:3)"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 (잠정적으로) 허락된 것"
이라는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는 곧 여성비하나 여성차별은
남성들의 완악한 죄악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여성차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남성들의 완악함을 한꺼번에
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잠정적으로) 허락된 죄악이라고 예수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여성비하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척 하고 여전히
여성비하의 오류를 범했는가 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두 왜 이천년동안
예수님의 가르침 보다는 바울의 여성비하의 기록에 더 치중하여
지켜왔는가 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바울의 말을 지키기가 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고
쉽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그렇게 가르치고 양떼들은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남녀문제 만이 아니고 모든 부면에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열심으로 지키고, 불리한 것은 애써 외면하면서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성경을 가감하는 불의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있는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같은 성경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못들은 척 뒤로 숨겨놓고(바울이 그러했듯이),
바울이 사사로이 명한 율법의 여성비하의 기록을 애지중지 중요시 하며
신주단지 모시듯이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새말씀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까? 바울이
편지글에서 사사로이 명한 과거 유대당의 율법을 부할시켜 지키는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바울이 명한 사악한 율법을 지켰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완악함 때문임이 여실히 입증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인간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이
여성비하를 신약시대에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남성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본성이 있고 여성은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데 하나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남성의
본성을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구약에도 신약에도
여성비하기록은 즐비하게 있는 것이지 그것이 옳아서 하나님이 기쁨으로
허락한 선의 기록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이 할 수없이 허락한 죄악이
여성비하이고 여성들은 슬프게도 수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앞으로도 계속 여성비하의 죄악을 허락하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인류는 창조미완의 어린아이 시절이므로
그 우매무지함의 완악함을 한꺼번에 꺾을 수 없어서 할 수없이
구약 때도 신약 때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었으나 앞으로는 창조완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창조완성이란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어떠한 죄악이라도 티끌만치도
끼어들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여성비하는 수치스러운 죄악입니다.
그 수치스러운 죄악을 미련을 갖고 더 이상 남겨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속히 청산해야 합니다.
호리라도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남성들은 여성들을 비하하고 자기들을 높였던
과거의 그 빚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뉘우치며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성과 남성은 근본적으로 동등합니다. 아니, 동등하되 오히려 창조
완성시에는 약간의 여상남하(女上男下)가 예상된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창조란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이 되었을 때만, 비로소 창조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창조의 시작과 과정에서는 미완이기 때문에 본모습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바로 이 왜곡된 미완성의
모습을 완성인양, 여자위에 남자 있다고 못박고 절대복종을 강요했던
것입니다만 이제는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선 창조의 프로그램인 창세기의 창조순서를 보면
열등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점점 고등한 피조물을 창조했고
맨 마지막으로 남녀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먼저 창조된
것보다 후에 창조된 것이 완성도가 높은 피조물임을 잘 알 수 있는데
여자는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창조시에도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후에 여자가
창조되는데 남자는 흙으로 지어진 반면,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집니다. 이 때 하나님은 남자에게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라고 했음을 볼 때 완성도가 높은 쪽은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를 "돕는자"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돕는자가 된다고 했음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는 시작이자 마침이므로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때 그 오메가가
돕는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돕는자란 궁극적으로 미완성의 상대(남성)를 완성시킨다는 의미의
오메가 포인트가 되기 때문에, 돕는자로 지어진 여자가
남자보다 결코 낮은 자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처럼 돕는자란 낮은 자를 의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거나 성경을 자세히 살피지 아니했으며 돕는자라는
단어마저 비하합니다만 옳지 않습니다. 돕는자라는 여성에 대한 단어를
비하한다면 오메가이신 하나님까지 비하하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남종과 여종이 되는데, 신명기 15장에
여종은 남종보다 일을 두배나 더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신15:18).
일을 두배나 더한 여종이 그 품삯의 상급을 받을 때, 즉 창조완성 시에
남종보다 여종이 더 적게 받을 리는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일한대로 갚아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다 기대가
큰 자식에겐 더욱 매를 들어 엄히 양육하시는 법이고, 그리하여 여종은
남종에 비해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도바울의 명령대로 오로지
남자에게 복종하면서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특히 교회에서도 여성들은 절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차별 받으며
교회를 말없이 섬겨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주실 큰 상급이 영원히 남자의 독점물
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는 지금까지와는 판도가 달라짐을
이렇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라고 했습니다.
안는 자는 안기는 자보다 결코 아래가 아닙니다. 처음 창조에는 비록
여자가 남자를 안지 못하는 하위였지만, 새 창조에는 여자가 남자를
안게 되는 우위임을 알려주는 명백한 기록입니다.
처음 창조란 창조의 시작과 미완성을 말하고 새 창조란 창조의 완성을
말하는데, 이처럼 새롭게 창조하는 창조완성시의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안게 되는 약간의 여상남하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성경 맨 끝장 계시록 22장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을 지칭하고, 신부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시는 육체 재림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표현했지만 마지막
창조완성의 때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신부로 상징했던 것입니다.
재림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다스리실
분이신데, 그 분이 신부라는 여성명사로 지칭된다면 어떤 추론을
해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남성명사 "하나님 아버지" 라고 했으나, 새 하늘
새 땅에서는 확언하건대 "하나님 어머니"로 불리워질 것입니다.
이는 곧 옛적 남성시대는 가고 새로운 여성시대가 도래함을 단적으로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남자는 하늘이요 시작이라면, 여자는 땅이요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기록대로 세상도 확실히 남성시대를 지나 여성시대가 오고 있는 조짐을
보이고 있고, 여성시대가 오면 상술했듯이 약간은 여상남하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간의 여상남하의 여성시대야말로 여자와 남자가
완전히 동등해지는 하나된 위상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는 본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본성으로 지어졌고 여자는 스스로
낮아지려고 하는 본성으로 지어졌습니다.
따라서 높은 자는 낮추고 낮은 자는 높이신다고 말씀하신대로,
낮아지려는 여자의 위상은 높이고
높아지려는 남자의 위상은 낮추게 되면 여자와 남자는 정확히 같은
위상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에 가장 동등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새 창조며 지상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향후 지상천국에서는 남성이 아무리 그 본성으로 여성위에 높이
오르려고 해도 하나님이 조금 높이신 여성을 뚫고 그 위를 오를 수
없습니다. 그 때 다만 남성은 여성과 정확히 하나의 위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성이 그 본성으로 아무리 남성 아래로 내려가려고
한다 해도 하나님이 조금 낮추신 남성을 뚫고 그 아래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 때 다만 여성은 남성과 정확히 하나의 위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명실공히 하나의 위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남녀의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가 전혀 없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남자의 위상이 높아있고, 스스로 낮아지려는 여자의
위상이 낮아 있었던 과거 창조미완성의 때는 남자와 여자의 위상이
한없이 양극으로 벌어져 있게 되니 가장 나쁜 음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자의 위상이 남자보다 약간 높아지는 여성시대가 오면
그 게 가장 좋은 남녀동권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완성이 되며
가장 아름다운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새하늘 새땅 지상천국이 됩니다.
남녀의 위상문제 만이 아닙니다. 너와 나의 모든 상대적인 음양
관계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은 낮추고 낮아지고자 하는
겸손한 자들은 높이는 그리스도의 천국통치야말로 가장 의롭고
영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