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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교회의 명칭과 본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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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에 관한 진리들과 은혜의 수단들에 관한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다. 에베소서--교회의 본질, 속성들 고린도전서--교회의 문제들, 성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유다서--이단 배격 사도행전--교회의 사명인 전도 고린도후서--사도직, 목사직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목사, 장로, 집사의 자격과 임무
'교회'(敎會)라는 우리 말은 '교(敎)를 믿는 자들의 모임(會)'이라는 뜻일 것이다. '교회'라는 영어 춰취(church)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인 헬라어 퀴리아케에서 나왔다고 한다. '교회'라는 뜻을 가지는 구약성경의 용어는 카할과 에다인데, 이 두 말의 차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말들은 흩어져 살고 있든지 모여 있든지 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한글 성경에는 '회중, 총회'로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서는 컹그리게이션(congregation) 혹은 어셈블리(assembly)로 번역되었다. 카할은 구약성경에 123회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부르다, 소집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출애굽기 12:6에서는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켰고('회중'), 신명기 5:22에서는 출애굽하여 시내산 아래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다('총회'). 에다는 구약성경에 149회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약속하여 모이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에는 역시 '회중'으로 번역되었다. 출애굽기 12:3, "이스라엘 회중." 이 두 말은 구약의 70인 헬라어역에서 에클레시아와 쉰아고게로 번역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주로 카할의 번역어이며, 쉰아고게는 카할 혹은 에다의 번역어이다. 에클레시아(단지 60여회 사용됨)보다 쉰아고게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교회'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에클레시아이며 11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부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구약의 카할과 에다와 같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낸 무리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주로 '교회'라고 번역했으나 때로는 세속적 모임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9:30에서는 '민회'로, 19:41에서는 단순히 '모임'으로 번역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몇 구절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내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의미한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 사본)--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렸던 120명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3천명의 신자들을 교회라고 부른 것이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전통 사본)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교회에는 어떤 명칭도, 심지어 특별한 예배당도 없었다. 단순히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 혹은 교회들이라고 불렀다.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이와 같이 초대 시대에 교회는 흔히 집에서 모인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켰다. 또한,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적 명칭들이 나온다. 첫째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1:22,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그리고 성도 상호 간의 친밀한 생명적 관계를 보인다. 머리와 몸은 나뉠 수 없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면 그 몸은 즉시 죽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떠난 교회는 즉시 죽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또한 머리와 몸의 비유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성을 보인다. 머리는 몸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며 몸은 머리의 그 명령과 지시를 따라야 한다. 또한 부수적으로, 이 명칭은 교회가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인다. 에베소서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둘째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부른다. 아가 1-8장, 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 솔로몬과 신부 술람미의 사랑의 관계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 에베소서 5:22-33,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요한계시록 19:7,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으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친밀한 사랑과 연합의 관계를 보인다. 또한 이 명칭은 성도 편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가져야 할 순결한 사랑과 순종의 의무도 암시한다. 셋째로,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성전, 성령의 전'이라고 부른다. 고린도전서 3:9, "너희는 하나님의 집."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 명칭은 교회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보인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는 처소이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거룩하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다. 여기에서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물론 성도들이 모인 장소와 건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또한 이 명칭은 교회가 지금 건축중에 있음을 나타낸다. 에베소서 2:21, 22,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넷째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 디모데전서 3: 15,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 명칭은 교회가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다. 교회는 이 진리를 보존, 보수(保守)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제출하고 그것을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진리는 교회의 권위 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진리의 기초는 하나님 자신뿐이시다. 교회는 이런 저런 오류에 떨어질 수 있고 또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탁받았으므로 사탄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오늘도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 개혁파 신앙고백들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벨직 신앙고백 27조, "(하나의 공동적 혹은 보편적[세계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케 되고 인침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요 모임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7장,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으신 신실한 자들의 무리이다. . . .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교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무형적(無形的)인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혹은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1절). "이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복음 아래서 역시 공동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有形的) 교회는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2절) 이상의 진술들과 같이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외적 조직을 의미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 혹은 연합을 가리킨다. 전통적 개혁신학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교통'이라고 번역한 라틴어 콤무니오라는 말은 '연합, 참여, 나눔' 등을 의미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통이라는 말은 교회가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며 그를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교회 생활에서 나타난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신약성경에 제일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나온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 사본)--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이라기보다 단순히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카할과 에다의 뜻과 같다. 즉 교회는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전통 사본)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영적 성격을 아주 잘 보인다. 교회는 외적 형식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는 것 자체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성도들이다. 만일 성도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인가? 성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인치심을 받은 자이다(엡 1:4-14; 벧전 1:2).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인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교회는 기본적으로 교인들, 특히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교회 목사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기본적인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부패는 부분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불성실하기 때문에 왔다. 신명기 23:2, 3,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 .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교회에 외적 조직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이다. 천주교회는 교황과 주교 회의를 중심한 소위 '가르치는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조직체를 떠나서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외적 조직이란 본질적이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된 외적 조직체는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다. 교회가 단순히 외적 조직체가 아니므로,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예배당 건축이나 교인수의 증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예배당 건축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예배당은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해서 건축하는 것뿐이다. 교인수와 헌금 액수 등도 비록 복음의 결실을 측정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교회 건립은 일차적으로 영적 건립이어야 한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 영혼의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참된 교회 건립이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결신자들을 얻고 그들을 신구약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의 계승은 외적 조직의 계승과 비교할 수 없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교회에서 바른 교훈의 계승이 없는 단순한 조직의 계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교회 혹은 교단이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며 진정한 교회의 계승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바른 신학의 교육과 전수(傳授)는 생명같이 중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체계적 바른 지식이다. 우리는 역사적 개혁신학이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파악하며 또 후대에게 성실히 가르치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