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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타격대는 광주의 보루
증 언 자 : 나일성(남)
생년월일 : 1961.(당시 나이 19세)
직 업 : 가구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1980년 5월, 서울에서 뉴스를 통해 광주의 시위상황을 접하고, 22일 전주, 벌교, 화순 등지를 거쳐 광주로 들어왔다.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26일 기동순찰대에 편재, 다시 기동타격대에 편성되어 계엄군의 동태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다 붙잡혀 계엄군에 의해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1980년 5월을 몸소 체험한 나일성 씨는 실천가로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겪고 현재는 직업운동가로 살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
스승의 금품요구에 회의를 느껴
나는 1961년 광주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랐다. 비교적 형제가 많았으나 전남매일신문사에 근무하시는 아버님 덕분에 별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1960년대부터 신문사에 근무하셨는데, 1980년 이전에 사내의 부조리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만두신 것으로 안다. 그 후 화물차 몇 대를 사서 운수업에 뛰어 들었다. 운수업이 별로 수지에 맞지 않아 현재는 목장을 하신다.
나는 광주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해 3학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전학갔다. 부모님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커 서울로 유학을 보내신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노골적인 금품요구에 접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물론, 어른들에 대한 믿음까지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공부도 팽개치고 성격 또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국민학교 때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공부도 하기 싫고 학교 다니는 것도 흥미가 없었다. 점차 결석하는 날이 많아지다 결국 중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학교를 그만두자 할일이 없어서 서울과 광주를 왕래하여 1979년까지 빈둥거리는 생활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을 때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고 또래 친구들보다는 냉담한 편이었다. 언론인이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약간의 사회비판 의식이 싹텄을 때였다.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내 입장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다만 아버님이 박정희를 좋지 않게 평가했던 것이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정도였다.
교회에 가스를 쏘다니
1980년 5월 14일 서울에 있으면서 동국대생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어 구경갔다. 시위대열에는 합류하지 않고 거리에서 구경하면서 학생들의 요구를 관심있게 지켜봤다. 그날 오후 광주로 내려와 집에는 가지 않고 한미쇼핑 부근에 있는 사촌형 집으로 갔다.
18일 12-2시 사이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전경을 향해 돌을 던지던 학생들이 전경한테 쫓겨 금남로에 있는 중앙교회로 몰려갔다. 뒤쫓아온 전경이 페퍼포그차를 교회 앞에 세워놓고 교회를 향해 가스를 쏘아댔다. '세상에 신성한 교회에다 가스를 퍼붓다니.' 나는 그때 전경들의 몰상식함에 충격을 받았다.
오후 3시경 금남로 태평양화학 앞에 정렬해 있던 공수들이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돌을 던지던 시위대는 대부분 광주제일고 쪽으로 도망쳤다. 얼떨결에 그 쪽으로 달려간 나는 광주일고 앞 분식집으로 뛰어들었다. 겁에 질린 나는 분식집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그때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녀가 지나갔다. 그들을 본 공수들이 달려들어 남자를 때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여자가 공수들을 붙잡고 말리자 여자에게도 발길질을 했다. 심한 욕지거리와 함께 두들겨패자 여자가 쓰러졌다. 공수들은 여자를 버려둔 채 남자를 끌고 갔다.
나는 분식집 한쪽 구석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는데 그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아마도 내가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데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골목으로 쫓기던 학생이 민가로 들어가자 집안까지 쫓아가 끌고 나왔다. 주변은 공수들의 구타로 인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매에 못 이겨 내지르던 학생들의 고함소리를 뒤로 한 채 전남여고를 거쳐 사촌형 집으로 갔다.
형의 강요로 다시 서울로
19일 오전 계림동 동문다리로 나가보니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 얘기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정오쯤 되었을 때 공수들이(혹은 전경) 원각사에서 동문다리까지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사촌형 집으로 갔다. 그날 오후 사촌형의 강요에 못 이겨 광주를 빠져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경양식집에서 우연히 TV를 보게 되었다. 광주의 시위가 몹시 격렬화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궁금하던 차에 뉴스를 보게 되자 도저히 서울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촌형한테 말하고 다음날 광주에 가기로 했다.
다시 광주로
다음날(22일) 아침 강남고속터미널에 갔으나 광주로 가는 차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전주에 도착해 순천 가는 열차를 갈아타고 순천에서 다시 벌교까지 갔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벌교까지 피난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계엄군이 벌교까지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계속 그곳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 고흥으로 옮긴 뒤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23일 오전 고흥에서 버스를 타고 화순까지 왔다. 화순은 광주에서 피난온 행렬이 줄을 이었다. 광주에서 나오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섬뜩했으나 이미 나선 길이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릿재터널 조금 못 미친 곳에 트럭 1대가 전복돼 있었다. 터널에도 불타다 남은 차량의 잔해가 있어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로를 따라 걸으면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숲속으로 피해가다 공수와 부딪혔다. 여러 명의 공수 중 1명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신분증을 받아쥔 채 그가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오?"
"가족들이 걱정돼서 광주에 갑니다."
"오늘은 굉장히 위험하니까 빨리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나오시오."
"알겠습니다."
그에게서 신분증을 받아들고 잰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나는 광주에 가면서 '오늘 위험하단 말이 무슨 뜻일까'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 공수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말한 것 같았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지원동 석천다리에 이르렀을 때 지저분한 거리하며 총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로소 광주상황이 짐작되었다. 나는 도청, 상무관 등을 기웃거린 후 서석고를 거쳐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가 왔다는 인사만 하고 곧바로 시내로 나갔다. 우연히 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동창생을 만났다. 그 친구는 뭔지 모르지만 조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부터 26일까지 사촌형 집에 기거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
계엄군 생포
26일 오후 18일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 친구의 권유로 나는 기동순찰대에 편성되었다. 도청으로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간단한 면접을 치룬 후 순찰대원이 된 것이었다. 순찰대에 들어가게 된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는 없었고, 다만 광주를 나 같은 젊은이가 지켜야 된다는 생각과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내가 순찰대원에 합류한 뒤 맡겨진 첫 임무는 광천동에 있는 동화석유의 기름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동화석유는 광주시내의 모든 주유소에 기름을 대주는 곳으로 기름이 굉장히 많았다. 싸움이 장기화되면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과 연료였기 때문에 지금부터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량 2대에 8, 9명의 대원이 나눠 타고 동화석유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앞서 출발한 승용차에 탔는데, 우리 뒤에서는 지프차에 탄 대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 중 일부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이었다. 내가 탄 승용차가 광천동 사거리를 막 통과했는데, 무등경기장 쪽에서 4.5톤 여수수협 소속 냉동차가 우리 차와 뒤따르던 지프차 사이에 뛰어들었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예감이 들어 차를 멈추게 하고 무장한 청년들과 함께 냉동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차문이 확 열리더니 사복군인 3명과 정복군인 2명이 튀어나 왔다. 그들이 도망가자 쫓아갔다. 막다른 골목으로 1명이 뛰어갔다.
"손을 들고 나와.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러자 손을 들고 벌벌 떨며 걸어나왔다. 다른 3명은 모두 놓치고 1명만 붙잡은 것이었다. 그를 끌고 광천동 사거리로 나오자 시민들이 달려들어 죽여버리라고 아우성쳤 다. 우리 대원들도 군인을 몇 대 쥐어박더니 화가 치밀어오르는지 쏴버리자고 했다. 나는 그들을 만류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순서일 것 같았다.
"소속이 어디야?"
"우리는 상무대 군인입니다."
"왜 시내에 잠입했나?"
"본대에서 낙오되어 급히 귀대중입니다."
내가 탄 차에 군인을 태워 도청에 인계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군인은 두려운 나머지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었다. 어찌나 떨든지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담배 한 대를 권했다. 도청에 도착하여 상황실로 군인을 넘겨줬다. 상황실에서 몇 가지를 조사한 뒤 밥 한끼 먹여서 계엄사로 보냈다고 한다.
기동타격대에 편재
포로를 상황실에 인계한 직후 나는 기동순찰대에서 기동타격대로 소속이 바뀌어졌다. 이날 오후 2시경에 기동순찰대 조직을 개편하여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는데, 나도 그 조직에 편성된 것이었다. 나는 6소대에 소속되었는데 우리 소대장은 내 친구인 박인수였다. 기동타격대장은 윤석루 씨였고, 부대장은 이재호 씨가 맡았다. 부대장이던 이재호 씨가 대원들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그때 내 생각으로도 이재호 씨의 활동이 돋보였고 존경스러웠다.
기동타격대원의 임무는 외곽지역을 순찰하면서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시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 소대원 6명이 맡은 구역은 백운동, 화정동, 신안동 등이었고 지프를 타고 다녔다. 소대원 모두 무장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나는 무장하지 않았다.외곽지역 순찰을 돌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된 남자를 발견하여 병원에 실어다주기도 했다. 밤 9시경 도청에 들어갔더니 어떤 남자가 "오늘 밤 놈들이 쳐들어올 것 같으니까 목숨이 아깝거나 두려운 사람은 지금 돌아가시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웁시다."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노약자를 귀가조치시켰다.
아마 도청내에서는 조금 전까지 통화했던 행정전화가 끊긴 사실이라든가, 계엄사가 수습위원회에 광주 재진입 입장을 통보한 사실, 시민들의 제보 등을 종합해 볼 때 오늘 밤 쳐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불을 뿜는 적들의 총신
자정쯤 되어 외곽순찰을 나갔을 때였다. 백운동과 화정동에서 정규군이 시내를 향해 진입하는 것을 목격했다. 도청에 급히 알리기 위해 양동을 지나 쏜살같이 달리는 차 속에서 순간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비애감에 젖었다. 도청에 들어가 계엄군의 외곽지역 진입 사실을 보고했다. 곧바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비상이 걸리고 도청에서 총기를 지급했다. 순식간에 도청에 긴장감이 돌았다. 나도 카빈과 실탄 2클립을 지급받았다. 즉석에서 총 쏘는 법을 배웠다.
우리 소대는 도청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치지역으로 가려는데, 소대원 한 명이 우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우리를 지프차 안으로 데려갔다. 그가 소주 1병을 지프차에 감춰 놓았다며 모두 나눠 마시자고 했다. 더 털어보니 담배도 2개피 있었다. 우리는 마치 '죽음의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깡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돌려 피웠다.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막상 광주를 침입하는 계엄군을 직면하게 되자 '그들은 분명 나의 적이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꽉찼다.
정전된 상태라 온 시가지가 캄캄했다. 도청 후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충장로 입구 쪽에서 불을 뿜어대는 계엄군의 총구를 봤다. 총을 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엄폐물에 의지해 있는데 고등학생 2명이 보였다.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고 했다. 그애들은 총을 받기는 했으나 쏠지를 모른다면서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조금 전 도청에서 배운 그대로 가르쳐주었다. 계속되던 총성이 뜸해진 순간 우리는 재빨리 후문으로 이동했다. 도청 후문에 미처 도착하지 못했을 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이 보였다.
"누구요?"
" "
"누구요?"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둘 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손들어!"
"앗!"
계엄군이었던 것이다. 피차 서로의 신분을 모른 채 접근하고 있을 때 등뒤에서 덮친 것이었다.
"야! 빨갱이 새끼들아"
잡힌 순간부터 우리는 계엄군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내가 충장로 입구로 끌려갔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온 후였다. 경상도말을 쓰는 군인이 나에게 달려들어 구타를 시작했다. "야! 빨갱이 새끼들아!"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척추를 찍어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동료 중 한 명이 총에 맞았는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 쪽으로 왔다. 계엄군에게 얻어터지는 것이 너무 징해서 동료를 보고도 아는 척하지 못했다. 잠시 후 버스에 가득 실린 사람들과 함께 상무대로 끌려갔다.
고통에 못 이겨 자살기도
상무대에 5개월 동안 있으면서 맞지 않은 날은 이틀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오기로 했다며 정리하라던 날과 추석날이든가 설날 중 하루였다. 처음 조사받을 때 나는 아무런 조직에도 가입한 사실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어느 정도까지는 통하는 것 같았으나 시일이 지난 후 들통나고 말았다. 기동타격 대장을 불러다 고문하면서 26일 군인을 잡은 놈을 대라고 하자 고문에 못 이겨 말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남다른 고통의 날들이 시작됐다.
"제대를 며칠 앞둔 내 고참을 니가 잡어?"
그 사병은 곡괭이 자루로 험하게 두들겨팼다. 우리한테 잡혔던 군인은 죽을 고생했다고 포상휴가 받고 나갔다고 했다. 순간 나는 그가 우리에게 붙잡혀 벌벌 떨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루이틀 사이에 입장이 이렇게 정반대로 바뀔 줄이야! 짜여진 각본에 따라 조사를 받게 됐는데 재미있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본이 점차 변했다는 사실이다. 4가지 정도로 바뀌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맨 마지막에 '김대중 내란음모'로 수사방향이 급선회했다.
수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이 인쇄까지 해온 종이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거부하다 엄청나게 얻어터졌다. 결국 그들의 매에 못 이겨 서명하고 말았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놓고 내가 서명하자 미안했던지 나를 장교식당에 데리고 가 백반을 사줬다. 생각 같아서는 절대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나 굶주렸든지 나는 그 밥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추석날이라고 예외로 떡 2개와 음료수 반 병씩을 줬다. 허기진 상태라 그것도 부족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식사량이 적어서 위장이 쭈드러들었는지 그것을 못다 먹고 남겨놓았다.
이렇듯 상무대 영창에 있으면서 겪은 구타와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은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다는 극한적인 사고로 나를 내몰았다. 나는 '이렇게 짐승처럼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결심하고 열심히 약을 모았다. 약이라고 해봐야 두통제, 해열제, 지사제 밖에 없었고,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군의관이 왔을 때에만 받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는데도 거짓 핑계를 대고 바깥 바람도 쐬고 약도 모을 겸 들락거리면서 1개월간 약을 모았다. 약이 두 주먹에 가득 찰 정도로 모아지자 약효를 배가시키기 위해 하루를 굶었다. 약을 먹기 전 내 생각으로는 '죽지 않으면 후송이라도 시키겠지'라는 허황된 꿈을 꿨던 것이다.
9개월쯤 되었을까, 나는 그동안 모았던 약을 한꺼번에 먹었다. 물론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통합병원으로 후송되리라는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헌병의 반대로 나는 상무대 영창에 그대로 방치된 것이었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선배들
언제인지 모르겠다. 나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현장검증을 한다"면서 수갑을 채우고, 고무신, 군복 바지, 메리야스를 입혀 데리고 나갔다. 5·18 당시 내가 활동했던 곳을 가자는 것이겠지 하고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뜻밖에도 나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아버님은 뵙지 못하고 어머님만 만났다. 어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으나 꾹 참았다. "어머니, 이렇게 만났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나는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헌병대 영창생활을 하면서 대학생들에게 대해 많은 실망을 했다. 말로는 함께 하고 어쩌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동체의식이나 생활을 파기하는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보고 학생들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생겼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워낙 통제된 생활이었고, 그 때문에 더욱 깊이 뿌리박혔으니까.
석방
10월 26일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았다. 나는 1심에서 장기 7년에 단기 5년을 선고받고 곧바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교도소로 옮긴 지 4일 만에 석방되었다. 상무대에서 생활할 때 자기의 신념을 갖고 의연하게 버티는 김양래 선배가 무척 존경스러워 나는 그를 믿고 따랐다. 교도소에서 석방되면서 김양래 선배의 연락처를 적어가지고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나 생각처럼 즐겁지 않았다. 우리가 전쟁에서 졌다는 느낌이 계속적으로 떠나지 않아 집에조차 들어가기 싫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사촌형 집으로 갔다. 어디든 가려고 결심하고 형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님이 오셨다. 어느 틈에 형이 연락한 모양이었다. 아버님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여유를 달라"고 했다. 뜻밖에도 아버님이 승낙을 하셔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로 갔다. 하는 일 없이 몇 달을 보내고 1981년 봄 광주로 왔다.
음독자살 기도
석방 이후 상무대 영창에서의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계속 고통스런 날을 보냈다. 비가 오려고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벌써 척추가 쑤시고 아팠다. 내가 육체적인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1981년 3월 3일자로 명시된 사면, 복권장이 날아들었다. 난 여느 때와 달리 심한 반발심과 적개심이 생겼다. 저놈들 마음대로 잡아다가 재판, 구타, 구속하더니 이제 와서 사면이라니, 생각할수록 적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 한편, 살고 싶다는 의욕이 사라졌다. 그날부터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샀다. 50알 정도 모아지자 그것을 먹고 죽으려고 결심했다. 가족들에게는 피곤해서 푹 자야겠으니 깨우지 말라고 얘기하고 수면제를 먹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나는 이틀 만에 깨어나버렸다. 온몸에 두드러기, 피부병 등이 생긴 것 외에는 말짱했다. 나의 두번째 자살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존경하는 선배를 만나고 싶어서 나주로 양래형을 찾아갔다. 그 후 양래형을 자주 만나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82년 양래형을 통해서 남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에 참가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는 인권, 시국에 관한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다. 남동성당에서 월요기도회가 진행되고 있는데 박관현 열사에 관한 급보가 들어 왔다. 위급하다는 소식이었다. 성당문을 박차고 전남대병원으로 가보니 심장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그 후 1시간도 못 되어 운명했다. 휠체어에 싣고 영안실로 옮기면서 자세히 보니 어찌나 말랐던지 뼈만 앙상했다.
학생운동권 출신에 대한 불신
오월항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영역을 찾고, 나아가서 오월항쟁을 올바르게 규명하는 데서 내 할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의 오월분과에서 열심히 일했다. 나는 기동타격대원들을 다시 모아서 오월분과 차원에서 회를 조직하려 했다. 조그만 가게를 하여 벌어들인 수익금을 다 써가면서 연락처를 찾고 며칠씩 찾아 다니는 열성을 보이며 함께 모임을 갖자고 설득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쉽게 모임이 결성되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대원들 대부분 1980년 상무대 영창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슨 활동을 하다 구속될까봐 두려워했고, 둘째 전남사회문제연구소내에 묶이게 되면 학생 출신과 함께 일해야 되는데 기본적으로 학생들에 대한 불신이 컸다. 이러한 불신은 5·18 항쟁기간에 학생들은 거의 피신하고 어차피 끝까지 싸운 계층은 자기들뿐이었다는 배신감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영창생활에서 보여줬던 개인주의와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태도 등이다.
기동타격대원의 모임
1985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기동타격대의 모임을 갖기 위해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의 대원들끼리 완전한 친목계를 만들면 참가자가 많을 것 같아 그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회원들을 찾아다녔다. 갖은 노력 끝에 이재춘, 구성회, 안성옥, 박인수, 김두전, 양동남, 임성택 등 11명의 회원을 모았다.
회원들과 함께 회칙도 마련하고 나자 이제 좀 뭔가 되는가 싶었다. 그 무렵, 회원 중 한 명이 명단, 회칙 등이 적힌 문서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잃어버린 문서가 서부경찰서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회원들이 잡혀가 각서를 쓰고 나오는 곤혹을 치뤘다. 나는 주동자라고 하여 이틀 동안 조사를 받은 뒤 각서를 쓰고 풀려 났다. 이 모임 역시 정식으로 모임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요즘도 11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가끔 모여서 술자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만나 담소도 즐기고 친목을 돈독히 한다"는 목적으로 만나지만 회원들의 참석률은 굉장히 낮다. 모임 때마다 참석하는 숫자는 평균 4-6명밖에 되지 않아 무척 힘이 든다.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는 그렇게 사정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동료들이 이번에 기동타격대 모임을 만들자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났다. 6·29 선언이다, 청문회다 하여 유화국면일 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동지애를 키우고 친목을 도모하자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무장시민군 조직은 시민들이 인정해
1980년 당시 시민들은 기동타격대를 '계엄군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즉 시민군 조직'으로 인정했으리라고 믿는다. 그 당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러 다니다 만나게 되는 시민들은 우리를 환영하면서 밥이나, 빵, 담배 등을 줬고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을 수없이 했다. 또 민생치안에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에게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태도는 무장시민군에 대한 믿음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27일 계엄군의 시내난입 때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은 우리 소대원 6명과 나중에 합류하게 된 고등학생 2명을 포함하여 8명이었다. 그중 소대장 박인수는 목에 총상을 당했고, 세 사람은 상무대 헌병대에서 만났다. 그런데 나머지 3명은 행방이 묘연하다. 부상을 당했으면 부상자 명단에 있어야 하고 사망했으면 망월동에 묻혔어야 하는데 기를 쓰고 찾아봐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바로 이런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고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은 명백히 규명되어야 한다.(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민주화를 위해 산화하신 열사님들의 명복을 .......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