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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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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용미리 석불-가시버시 미륵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95 08.08.25 17: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08-08-06일 휴가 여섯 째 날

 

공순영릉을 나와 보광사 앞에서 산채비빔밥을 든 다음 용미리 석불을 보러 갔다.

 

 사진: 이 날의 행로

 

 

용암사 입구 간판을 보고 들어와 차 세우고 몇 발자국 걸으면 절이다.

 

 

 사진: 용암사 표지판

 

 

용암사에서 계단을 잠시 올라가면 숲 사이로 미륵불이 보인다.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을 보니 안동 제비원 석불이 생각난다.

안동 제비원 석불은 30 여 년 전 지나가던 길에 잠깐 보아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그 보다 잘 생긴 것 같다.

 

 

 

사진: 안동 제비원 석불-인터넷에서

 

 

 

 

사진: 용미리 석불 전경

얼굴과 몸에 곰보 같이 구멍이 뻥뻥 나 있다.

6.25 때 총알 자국이라니 탈레반이 바미얀 석불 훼손한 것도 남의 일이 아니다.

 

자연석 바위 위에 얼굴 부분을 조각하여 올려 놓았다.

 

 

가시버시 미륵

 

 

사진 상 왼쪽 둥근 갓(圓笠)을 쓴 부처가  신랑

오른 쪽 네모 난 갓 (方笠)을 쓴 부처가 각시라는 민간 전승도 있다.

 

멋 없이 용미리 석불로 할게 아니라 가시버시 미륵으로 애칭을 붙이면 어떨까?

 

 

 

 

사진: 용미리 석불 후면-미륵 사이로 멀리 서울시립공원묘지가 보인다.

위 부분은 목, 얼굴, 이마, 갓 네 조각으로 되어 있다.

 

 

 

미륵불에 얽힌 기자설화(祈子說話)

 

이 미륵불로 자식 낳기를 바라는 부인네들이 빌러 많이 온다고 한다.

 

고려 선종(宣宗)은 자식이 없었다.

3번째 비(妃)로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했지만 역시 태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궁주(宮主) 꿈에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깨어 난 궁주가 임금께 아뢰어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니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선종(宣宗)은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린다.

그러자 그 해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설화는 이렇지만 선종에게는 한산후 말고도 아들 헌종(憲宗)이 또 있었다.

선종이 죽은 뒤 아들-헌종이 나이 열 한 살에  즉위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곧 선종의 동생 계림공에게 양위한다. 계림공은 고려 숙종(肅宗)이다.

이야기 상으로 계림공이 워낙 덕이 있고 중망이 높아 선양(禪讓)했다지만

선양과 찬탈이란 다 말장난이다. 형님이 밀려나고 숙부 계림공-숙종이

즉위하자 한산후 균은 개 밥에 도토리,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귀양까지 간다. 

 

그러니 미륵불에 빌어 겨우 아들 낳았지만 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편 생각하면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필자가 대학입시에 붙었을 때 하늘에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나 보다 어머니 아버지가 더 기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당시 아주 잠깐으로 그 후 계속 별 볼일 없으니

그 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수 없다.

 

아이들 죽어라 교육시켜도 나중에 봉양 받기는 애저녁에 틀린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지만 부모들은 허리가 휘청휘청 하도록 학원비를 댄다.

심지어 공무원 부정부패가 사교육비 때문이라는 소리마저 있다.

그 돈 일부로 노후대책 마련하는 것이 훨씬 똑똑하건만 닥닥 긁어 바친다.

나중에 아들이 화근 덩어리가 되건 말건 부처님 공력으로 점지 받아 볼까

하는 엄마들이 오늘도 줄을 이어 빌고 또 빈다.

 

 

아기부처

 

 

 

사진: 용미리 석불

 

이승만 박사가 1954년 이 용미리 석불을 보러 와서

왼쪽 부처님 어깨 위가 약간 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 한마디 했더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당장 그 위에 아기부처를 만들어 붙였다나?

 

 

 

 

사진: 자유당 때 용미리 석불 사진-인터넷

왼쪽 미륵 어깨 위에 아기 부처가 있다.

 

 

인터넷에 아마추어 문화애호가 박상표 씨가 쓴 글이 있다.

제목은 아기부처 가족과 헤어 진 기구한 사연 인데,

워낙 이 사람 저 사람 퍼 나른 통에 원래 올라 온 사이트를 잘 못 찾겠다.

하여튼 원본 여부에 관계 없이 인터넷 검색창에 용미리 석불, 박상표

치면 내용을 읽을 수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박사는 1953년 10월 11일 용미리 석불을 시찰하며 개수(改修)와

아기부처(동자불)를 추가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파주군수 등은 지시를

따르면서 석조 7층 이대통령 기념탑까지 건립한다.

1954년 10월 28일 이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을 비롯, 이기붕 국회의장,

내무장관, 문교장관, 경기지사, 파주군수에 미국대사 부부, 미 제1사단장까지

참석하여 ‘미륵불 이대통령각하 기념탑 봉안식’ 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그럼 왜 이 박사는 이런 지시를 했을까?

박상표 씨 추론은 다음과 같다.

 

이 박사는 기독교도로 기독교 우대정책을 펼쳤다.

그렇다고 불교를 이용하는데 거리낀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이 박사는 비구-대처 분쟁을 자극하고 확대시켜

마침내 대처승을 몰아내고 비구승이 종단을 차지하게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 용미리 미륵불을 개수하게 하고 또 아기부처도

추가하라는 이상한 지시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이제 자유당 때 비구, 대처 분규상황을 살펴 본다.

1954년 5월 21일 왜색불교인 대처승을 몰아내라는 이박사 1차 담화가 있었다.

같은 해 11월 4일 전국의 불교가 일본식 정신과 습관을 버리라는 이 박사 2차 담화가 나오고

이어 3차, 4차, 5차 담화가 뒤따르면서 문교부가 책임지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문교부와 내무부를 중심으로 정부 권력의 강력한 개입으로

대처승은 절에서 밀려나고 비구승이 종단을 차지한다.

 

 

종교문제에 공권력이 개입한 것은 종교자유에 대한 명백한 헌법위반이다.

또 대처승이 왜색을 띠었다고 하더라도 반민특위를 탄압, 해체해 가면서까지

친일파를 끼고 돈 인물이 바로 이박사인데 왜 유독 불교에만 칼을 들이 댔을까?

 

이 때 정국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重任)제한을 없앤다는

이른 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파동 한 복판에 있었으니,

국민의 관심을 친일 청산에 돌리고 아울러 정권의 우익을 만들려는

계산으로 불교파동을 일으키고 이용했으리란 추측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단 인터넷에는 대처승이 한민당을 편들어 이 박사가 비구승을 키운 것처럼 나오지만

대처승이라고 왜 이 박사를 마다 했겠는가? 이 승만 정권이 비구승을 끼고 돌며

압박하니 갈 데 라고 야당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리라.

 

 

하여튼 이런 과정에서 용미리 석불을 이 박사가 찾아 보고

본 김에 왼쪽 어깨가 허전하니 뭐니 한 마디 하니

아래 것들이 득달같이 아기 부처를 하나 만들어 올려 붙였던 모양이다.

 

 

 

사진: 용암사 경내 한 귀퉁이 있는 아기부처

이 박사 몰락 후 아기 부처는 내려져 용암사 대웅전 뒤 한 구석에 있다.

 

 

비구 대처 이야기 하다 보니 다른 생각이 하나 난다.

요즈음은 어째 뜸한 것 같은데 얼마 전 까지 조계종 분규는 연중행사였다.

몇 년 전 티브이를 보는데 중들이 서로 싸우며 그야말로 대가리-박이 터진다.

그걸 보던 애 엄마가 에이 중놈들이란.. 하며 기독교는 가장 깨끗한 척 한다.

참고로 우리 집은 나 빼고 다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신자다.

그 소리 듣자 마자 내가 한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이봐 서양에서 같은 기독교도끼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렀는지 알기나 해?

1572년 프랑스 성 바돌로뮤 축제일 사건 하나에만 무려 2만 명이 학살 당했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서로 다른 하느님을 믿는가?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인 살인극이었어.

저 중놈들 대가리 깨지고 피 칠갑하는 꼴이 과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죽은 사람 없잖아 !

 

 

 

박박 지운 명문(銘文)

 

 

 

답사 때 보니 석불 왼쪽 바위 면에 뭔가 글씨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데 자연마모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박박 지운 것이 분명하다.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바로 저기가 석불 개수에 관한 명문-보나마나

이 박사에 대한 아첨이 한참 들어 있었을 것이고-을 새겼던 자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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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8.26 16:08

    첫댓글 이 박사 몰락 후 아기 부처는 내려져 용암사 대웅전 뒤 한 구석에 있다. 참 알고 보니 웃기는 이야기 군요 지금도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백성의 아픔은 아량곳 없이 그럴수도 있겠죠 좋은글 잘 읽고 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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