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한 분이 현판을 물끄러미 보더니
작은 천으로 안경알을 닦는다
세상을 저렇게 깨끗한 안경알로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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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대로에 119나 앰뷸런스가 저렇게 자주 다닐 줄이야
어디선가 사고가 나고 어디선가 죽어가는 이 나라,
일본대사관 정문 앞, 건널목에서 현판을 든다
들자마자 경찰이 다가와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네, 시민모임 독립이에요."
"같은 단체에서 오면 칠십 미터 떨어지는 거 아시죠?"
"네, 알아요. 날씨가 많이 풀려서 선선해요."
"네, 고맙습니다."라며 나를 경무관이나 치안관쯤으로 대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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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좋은 일 한다며 말을 건다.
"글씨 그때 안철수가 윤씨에게 붙어서 0.7%가 갔잖아요. 그날 심상정이 이재명에게 갔다면, 이런 고생들 안 할텐...... 아, 예, 수고하세요."
신호등이 바뀌자 혼잣말 하고 절뚝이며 건너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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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불 켜지고 경복궁 쪽에서
외국 관광객이 올 때마다, 영어로 쓰여 있는 현판을 높이든다.
현판을 높이 드는 까닭은, 높이 들면
건널목을 건너오는 사람들이 주목하기 때문이다.
가끔 몸을 좌우를 흔들면서 현판을 흔들면,
따라서 춤추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다.
국적을 모르는 동행이 나와 춤추는 동료를 사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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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관광객이 오더니 자기들끼리
"난킹.." 어쩌구라며 난징대학살을 말하는 거 같다.
건널목에서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했던
스웨덴 대원들이 무더기로 다가왔다.
"할머니들에게 명예와 인권을" 손팻말을 들며
일본군 성노예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던 아이들이다
역시 그레타 툰베리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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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서는 비구니 스님이
일본의 핵폐수 방류를 항의하는 일인시위를 해서 경찰에게 물었다.
"이렇게 함께 곁에서 일인시위 해도 되는지요?"
"아, 예, 같은 단체가 아니면 함께하셔도 됩니다."
경찰이 경찰청장쯤으로 배려해준다
실은 홀로 발원하셨다는 비구니 혜원 스님과 같은 마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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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현판 들었을 때는
멋진 여성이 아이스커피를 살짝 내게 전해주고 갔다
고맙스므니다, 라고 하고 갔다
자기네 나라의 문제를 아는 멋쟁이 여성이시다
일본 관광객이 한복에 삿갓을 빌려 입고
건널목을 건너 온다. 저 옷을 입은 채 귀국하시라
진실을 삭제하는 자, 핵폐수를 투기하는 자를 잡아내기를
나는 일본 시민의 힘을 끝까지 믿고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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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작은 여성 경찰이 다가와 묻는다
"몇 시까지 하세요? 매일 나오시나요?"
"9월 1일 간토대학살이 있던 날까지 일인시위해요."
간토대학살이 무언지 잘 모르는 듯 갸우뚱 한다.
내 수업을 들었을 학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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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다, 이 일이 내게 얼마나 손해일지
다시는 일본 문부성의 국가연구비를 받기 어렵고
번역상 심사 한번에 우리돈으로 호텔 제공에
왕복비행기표에 오백 만원을 받던 일도 모두 끝인 줄 안다
이런 호사는 간토대학살 때 학살당한 조선인, 중국인, 사회주의자,
15엔 50전을 제대로 발음 못해 토비구치(とび口)에 찍혀 죽은
오키나와, 오사카 사람 등을 생각하면 저주 받을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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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을 다시 높이 든다
높이 들어야 지나가는 버스에서도 본다
높이 들면서 기지개도 하고 햇살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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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앰뷸란스가 삐뽀삐뽀 지나간다
저 앰뷸란스 안에 정작 실려가야 할 정신병자가 있다
빨간불로 멈춰 있는 이 나라에 파랑불이 켜지기를,
저 앨뷸란스 안에 나의 게으름도 실려가기를 (2023.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