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보리 잎이 누렇게 익어가면, 6.25에 대한 행사가 여기 저기에서 열리
어 웅변 대회며, 나라를 사랑하는 글짓기 백일장에 장원은 누구요, 차상과 장려
는 어느 집 아들. 딸 하며 잔디 가운데 풀이 무성한 동산을 오르내리시던 옛 스
승님들과 부모님이 생각난다.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가로수를 흰 눈 덮인 양, 곱게 내려 앉은 꽃 잎을 보면
서 6월의 감자 떡 생각이 나서 멍하니 돌 계단에 엉덩이 대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셔 장례를 치루고 얼마 간은 가슴 미어지는 그리움으로
저 하늘에도 휴대폰이 있다면 엄마와 통화를 좀 할 수 있을 터인데 하고 한숨을
푹~푹 쉬던 때가 벌써 7년이 되어 온다.
요즈음 남자들이 여자에게 해 주는 것처럼 엄마도 부인 대접, 여자 대접을 해
드렸으면, 어머님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실 지 모르는데, 평생을 하녀도 아니시
면서, 일꾼도 아니시면서, 공경, 복종, 훈육, 섬김 등이 몸에 배이시어 그 좋으신
옷 한벌, 맛있는 음식을 가까이 하셨던 기억이 없다.
아침 해가 돋기 전 무쇠 솥 걸린 아궁이에 불을 피워 우리 형제들 도시락에 정
성을 쏟으셨고, 어둠이 땅에 깔리어야 밭에서 집으로 향 하셨던 불쌍하신 분 !
어디선가 새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방앗간에서 고추 방아를 찧는지, 떡을 만
드는지는 몰라도 기계가 맞 닿으면서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찌걱 찌걱 디딜 방아 시절 44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나를 몸에 배이시고 나의 귀가 나오는 날 까지 어머님께선 씨앗을 뿌리시고,
열 식구 넘는 가족들의 양식을 위하여 호미를 놓지 않으셨다.
지금도 나 살던 시골에 가면 옛 모습 그대로 있는 디딜 방아.
어머님께선 나를 낳으실 준비로 보리 방아를 찧으셨다 한다.
작은 어머님과 큰 고모님께서 양쪽 맞추어 디디시고, 어머님은 방아쇠 쿵, 쿵
찌어지는 절구통 같이 깊은 쇠 속에서 보리를 뒤 섞으시고, 꺼내시어 체로 돌리
시어 껍질을 골라 내셨다는데 나 낳으시기 열흘 전이셨다.
아야 !
쇠와 쇠가 맞 닿으면서 엄마의 손가락이 찧어지신 것이다.
그 때 시골에 비상 약품이 무엇이 있었을까 ?
아무 천이나 둘둘 동여 매고 버스도 없던 시절, 산 넘고 지름길을 택하여 삼십
리 길을 뛰시다, 걸으시다 읍내 까지도 못 나가시고, 급한 대로 가까우신 곳 병
원에 가시는 것도 또 중간에 버스를 타시고......
피는 얼마나 철철 흐르셨을까 ? 아프긴 얼마나 아프셨을까 ?
의술이 지금 같지 않아서 결국 손가락을 자르셨다.
어렸을 때 아니, 성장해서도 난 엄마의 손가락을 보고도 무심코 지나쳤다.
왜 그러시냐고 여쭈어 보지도 않았고, 궁금 하지도 않았었다.
학교에서 어머님 은혜에 대하여 배우고, 엄마 손이라는 소재를 주며 시를 써 보
라 하셨어도 전혀 그 잘라져 나간 엄마의 손에 대하여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줄만 알았다.
세월이 흘러서 내가 시집을 가고, 아이도 낳고 친정을 드나 들 적에 어느 여름
밤 모기장 속에서 옛날 이야기 하던 참에 그 가슴 찡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말씀을 들었다.
그 때, 내 나이 서른 둘.
두 아이의 엄마로 아침에 애들 돌보아 주시는 집에 맡기고 출근 하려면 정신
없이 바빴던 90년대 초반 엄마의 인생을 대신 살아 드릴 수도 없었고, 생활에
얽매이어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머님에 대한 고마우심과 아픈 역경을 딛고 오신 위대
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좀 약한 것이 그 때 손 그러는 바람에 젖도 못 먹이고, 암죽을 끓여 먹여
서 그렇다 하신다.
새까만 얼굴에 죽었으면 했는데 병 없이 이만큼 자라 대견하다고 하실 때 난 슬
며시 뒷 칸에 가서 숨 죽여 흑흑 울었다.
부모님은 항상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라도 잘 해 드렸으면 지금 이토록 가슴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효도하려는 자식을 기다려 주지 않으신다는 성현들의 깨우침.
군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절규하는 저 부모들의 외침이나, 이러신 어머님
께 효도 못하고 후회하는 딸의 심정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고 ?
지금은 벼 뿐만이 아니라, 떡 까지도 방앗간에 가면 원하는 대로 모양도 만들
어 지고 현미부터 흰 쌀이 되기 까지 너무도 쉽다.
허리 띠 조를 줄 모르고, 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다.
어이할까 ?
옛날 나의 어머니 시절에는 카드도 없었고, 대월도 몰랐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부끄럽지 않게 도리를
다한다 할 수 있을까 ?
디딜 방아는 옛 모습을 보존 시킨답시고 박물관에 재현이 되고, 저기 돌아가는
떡 방앗간에선 온갖 맛있는 떡이 내일의 무슨 행사에 쓰이려고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님에 대한 생각을 방아 소리에 귀 기울이다 어머님의
손가락 생각이 나서 돌이켜 보다가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붉게 물들이자 자리
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당장 어머님께서 " 얘야, 잘 있었니 ? " 하시며 현관 문으로 들어
오실 것만 같다.
카페 게시글
♡ 시
떡 방앗간 홍천농업협동조합 원 명화
박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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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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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모에 대한 연민은 언제나 그리움과 후회가 교차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