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대북 강경 언행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일부 언론과 정치인의 행태에 우려하며 발표한 선언문입니다.]
남북 화해와 평화를 바라는 경북 교사선언
- 비록 험난하지만 평화의 길로 가야합니다 -
월드컵의 뜨거운 함성이 민족의 이름을 한껏 드높이던 순간, 우리는 두 소녀와 네 병사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녀들은 의정부에서 미군의 장갑차에, 병사들은 서해바다에서 동족의 총탄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싸늘한 주검 앞에 우리는 삼가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며, 명복을 빕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을 고인들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드릴 마땅한 위로의 말씀을 찾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죄가 무엇입니까? 다만 그들은 힘없어 분단되고 나라의 수도와 그 주변에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그리고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서글픈 조국에 태어난 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떳떳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교사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들의 희망찬 미래에 대한 가르침이 엄혹한 분단 현실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 젊은이들의 하나로 뭉쳐진 힘은 위대했습니다. 그들의 역동성과 민족애는 이전 선배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밝고 희망찬 세상을 열어갈 자격이 충분합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그들에게 분단된 조국, 동족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애꿎은 죽음이 되풀이되는 절망의 조국을 물려주어서는 안됩니다.
소녀들과 병사들은 온몸으로 분단의 현실을 고발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가정의 행복이 얼마나 쉽게 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우리의 다가올 삶이 평화와 전쟁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불행한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 한 쪽에서는 북한에 대한 무력증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넘어 응징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쌓아 왔던 남북화해의 흐름을 거스르자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단호히 반대합니다. 응징과 적개심은 상대의 응징과 적개심을 불러올 것이며, 결국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에게 남북간의 전쟁이란 승패를 가르기 이전에 이미 민족의 공멸을 불러올 뿐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포용은 북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월드컵 기간 중에 휴전선에서 남북의 병사들이 한 목소리로 응원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북한 텔레비전의 해설자가 남한을 응원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들도 남쪽 동포의 승리를 민족의 승리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하나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린 소녀와 젊은 병사들의 죄 없는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머뭇거리는 어른들에게 화해와 평화의 길로 가라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달라고 울부짖는 몸부림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북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합니다. 평화의 길로 가야 합니다. 물론 평화로 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지키고 남북이 화해로 가는 길목에는 수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를 원망하며 때로는 배신감에 노여워할 때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길 이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어코 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 겨레의 미래를 보장받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천진한 그들의 얼굴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증오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갈 내일의 조국은 통일된 조국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어야 합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물려줄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서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오늘은 남북이 공동으로 자주적 통일을 이루자고 선언했던 7.4 남북공동선언이 30돌 되는 날입니다.
2002년 7월 4일
선언 교사 대표
김윤근 (경주공업고등학교. 55세)
김창환 (용궁중상업고등학교. 54세)
배용한 (안동중학교, 51세)
조영옥 (춘양중학교, 50세) 등 서명 교사 75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