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는 간간이 비를 뿌리더니 낮에는 습도만 높지 비는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점심 후에 도선사계곡을 조금 오르다. 수량이 불어난 관계로 평소 말랐던 물길이 제법 작은 폭포로 변해 물이 쏟아진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1986년 태풍 베라호가 올 때 기상예보도 안 듣고 지리산 칠선계곡을 오르던 일이 생각난다. 지리산은 물론이고 그때까지 등산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마티아 수사와 함께 갔었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칠선계곡은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도 드물어 매표소도 없던 곳이었다.
계곡의 초입에 텐트를 치고 1박을 한 후 다음날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날씨가 심상찮았다. 우리는 태풍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산에 든 것이다. 점심을 해먹고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산행을 포기하고 계곡을 따라 나있는 등산로 옆에 텐트를 쳤다. 그날 밤부터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는 폭우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마다 계곡의 물이 어느 정도 불었는지 체크하면서 밤을 새웠다. 급류에 바위가 굴러가는 소리가 마치 탱크가 곁을 지나는 것처럼 땅을 울렸다. 결국 다음날 아침 더 높은 데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고 배낭을 메고 텐트는 그대로 든 채 산기슭을 올랐다. 등산로 앞뒤로 새로운 물길이 생겨나 폭포처럼 물이 흘러 산기슭으로 오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피하여 비가 그치고 계곡의 물이 줄어들기까지 사흘을 텐트 속에서 지났다. 나는 항상 읽을 책을 갖고 다녔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마티아는 몸이 근질거려 고생이 많았다. 나중에 산에서 내려와보니 추성마을의 도로는 다 유실되고 없었고 떠내려간 다리도 많았다. 칠선계곡 옆의 한신계곡에서는 대학생 11명이 계곡의 급류에 휩쓸려 희생되었고…….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제주도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인 칠선계곡을 마티아 수사에게 제대로 보여주긴 했다.
모든 게 때가 있어 이제는 산을 멀리서 호젓이 바라보기만 할 때이다. 기껏해야 둘레길 을 조금 걷던가! 그래도 아쉬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