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왕산(仁王山)산행
오늘은 대전 친구 들과 인왕산(仁王山0)산행을 한다.간밤에 비가 오락 가락 해서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파란 하늘이 열려 안심이 된다.날씨가 춥다니 단단히 챙겨 출발 하자.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338m산으로서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 중 하나 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산이 연결된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된후 무학(無學)대사를 왕사(王師)로 삼아 도읍을 어디에 정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
(無學)대사가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북악산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삼으라 청 하였으나
건국 초기 국가 기틀의 뼈대를 마련한 정도전 (鄭道傳)이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옛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 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한양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백악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남산(南山)을 안산(案山),낙산(駱山)을 좌청룡
(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수축할 당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한다.
그런데 한양 천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대응하여 인왕산 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되었다 한다.
그리고 도읍을 건설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인왕산 기슭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인왕산을 주산
으로 하여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백악산(북악산)의 서쪽에 있어 조선초 태조~·세종 까지는 서봉(西峰)·
서산(西山)이라 불러 왔다.일명 '필운산(弼雲山)'이라 고도 했는데 필운은 서산(西山)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는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으로 운룡이란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을 보필할 때 오른쪽에서 한다는 뜻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이 오른쪽(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인왕(仁王)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전면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
(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는 금강굴이 있었으며, 또 세조 때에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임금이 된후 무학대사(無學大tk師)를 왕사(王師)로 삼게 된 사유는 이성계가 젊은 무장(武將)
으로 활약할 때,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무너져가는 큰 기와집에 들어갔는데 붕괴가 불안하여 기와집에서
나오는데,이상하게도 자신의 등에 석가래 셋을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흉조(凶兆)인지, 길조(吉兆)인지 알기 위해 근처의 유명하다는 여무(女巫)를 찾았으나 .....
자신은 도저히 그 꿈 해몽을 할수 없다며 가까운 설봉산 토굴에 한 고승이 혼자 수행하고 있으니 찾아가면 해몽을
들을 수 있다고 권하였다.이성계는 혼자 토굴의 고승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대면했다. 그 고승이 바로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관상을 살핀 후, 꿈 이야기를 듣고 누가 엿들을것을 두려워 하는 듯 나직히 말했다.
“낡아 붕괴되는 큰 기와집은 망해가는 고려국(高麗國)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집에서 나오면서 등에 석가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는 것은 왕(王)을 의미하는 것이니, 장군은 장차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천기를 미리
깨닫게 해주는 길몽 이라는 꿈해몽후 깊은 인연을 맺어 오다가 임금이 된후 무학 대사를 왕사(王師)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경계로 인왕산 쪽은 종로구 이고 아래 사진 안산쪽은 서대문구로 나뉘인다
우리 일행은 10:00정각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에서 만나 인왕산 I' Park 옆길 따라 무악 공원
인왕사(仁王寺)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 한다
인왕사(仁王寺)는 서울 중심가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고찰로서 5개 종단의
여러 개의 작은 암자들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형성하고 있는 특이한 사찰이다.
인왕사(仁王寺)는 조선 초기에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의 조생(祖生)
스님을 주지로 보내어 호국도량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대부분 태고종ㆍ조계종 스님들로 4년에 한번 씩
각 암자의 암주들이 주지를 맡고 있으며, 인왕사 대웅전 등의 대표적 전각 외에 염불암, 송림사, 기원정사,
관음암, 용해사, 미타정사, 서래암, 보덕암, 용천암, 대원암, 성불암 등이 인왕사 가람을 외호하고 있다.
인왕사는 1918년에 창건되었고 이곳은 우국지사들의 은신처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조금 오르니 국사당 이다.국사당(國師堂)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원래는 남산 정상에 목멱신사로
있었는데 태조 5년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를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으며 매년 봄·가을로 초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
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사(神士)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 하여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 한다.지금은 무당들이 굿 하는 곳으로 변 했다.
국사당을 지나 가파른 계단길 밟아 오르니 선(禪)바위 이다.두 개의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선(禪)바위 라고 명명 되었단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린다.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付巖)'라고도
한다.
태조 이성계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안으로 포함시키는 문제로 이견을 보였으나,
정도전이 "도성 안에 선바위가 있으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있으면 유교가 흥한다"라고 주장 하여 성박에 두었다고
전 한다.
선바위를 돌아 나와 조금 오르니 산신각과 서대전 형무,무악 여고가 한눈에 들고 ......
해골 바위를 돌아 오르니 멀리 모자 바위가 눈에 든다.커다란 바위에 삼각형 삿갓 모자처럼 생긴 기암이
모자 바위 이고..그 옆으로 검은색의 바위는 성곽 밖에서 보면 달팽이처럼 보이기도 하여 달팽이 바위
라고도 한다.
정상 부근 군부대 철조망 옆으로 높게 솟아 있는 바위는 앉아 있는 부처와 같아 부처님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머리부분이 곧 떨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하다여,아슬 바위,보는곳에 따라 얼굴바위 라고도 한다.
이처럼 인왕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며 높고 우람하다. 곳곳에 보는이에
따라 돼지를 닮은 돼지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달팽이바위 호랑이바위, 치마바위, 해골바위, 기차바위,
부처님바위 등......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바위산의 신기한 볼거리 흥미로운 바위가 많다.
우리 일행은 정상 능선부 군부대가 자리 하고 있어 출입 통제 지역 으로 모자바위 달팽이 바위 옆길 따라
샘터를 지나 성벽을 넘는 문을 통과 성벽 안길 따라 오른다.
오름길 성 북쪽에는 북한산이 넓게 펼져있고 서울 시가지와 경복궁 남산과 북악산, 청아대가 보이고
마치 인왕산과 북악산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인왕산 등선 철사다리를 오르니 정상부 능선 범 바위 이다.아무리 보아도 범 모양은 아니라서 산객 에게
물어보니 하늘 에서 봐야 범모양 이란다.옛날에는 범바위 밑에 호랑이 굴이 있었다고 한다.범바위에서
서서 내려 보니 굴은 보이지 않고 절벽 이다.범바위는 조망이 너무도 좋다.사방 팔방 안보이는 곳이 없다.
범바위 바로 옆 코끼리 바위 이다.우리일행은 코끼바위를 지나 데크길 에서 인왕산 정상봉을 배경 으로 인증 샷을 한다.
조금 내리니 인왕천 으로 내리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인왕천(仁王泉)은 완경사의 길을 10분 정도 가면 바위에 '인왕천(仁王泉)'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샘터가 나온다.
인왕천은 화강암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로, 흘러내려가지 않도록 저수시설을 만들어 수도꼭지를 틀어
받아마실 수 있다.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철문까지 내려와 조금 더 가면 석굴암 약수터로 가는 길이 나온다.
우리 일행은 인왕천 가는 길을 버리고 정상을 향해 오른다.
성곽 따라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인왕산 정상 이다. 북한산이 한눈에 들고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 또한 장관이다. 북악산, 청와대, 경복궁, 세종로가 직선으로 이어지고 세종로와 직각으로 만나는
종로거리와 남산까지 이어지는 옛 한양 도성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을 뒤로 하고 창의문 방향 으로 하산을 한다 한참을 내리니 기차바위 가는길과 창의문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창의문 방향 하산길 에서 정상을 뒤돌아 보니 치마 바위가 한눈에 든다.치마 바위는 조선의11대 중종의 첫째 부인
단경왕후가 쫓겨난 후 자신을 그리워하는 중종을 위해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널어 답례 했다는 전설이 담겨진 바위
이기도 하다
.
성을 넘는 문을 넘어 기차 바위를 향해 내린다.기차바위를 배경으로 한컷 ! 계속 내리면 홍제동으로
내리게 된단다.뒤돌아 창의문 내림 삼거리 에서 창의문 방향 으로 하산을 한다.
.
기차바위 창의문 방향 삼거리에서 성곽길 따라 창의문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하산길 화사한 박대 나무 꽃,
왕겹벗꽃이 눈길을 끌고 서시정을 지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넘어 창의문에 도착 한다.
창의문(彰義門)은 서쪽으로는 인왕산과 만나고 동쪽으로는 북악산과 이어지는 문이 바로 창의문(彰義門)이다.
자하동에 있어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했다. 장의동은 세검정 부근 마을로,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있다. 창의문이 있어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장의동이라 하였고, 또 주변에
장의사(藏義寺)란 절이 있어 동네 이름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숙정문이 닫힌 성문이라면 창의문은 서민들의 북행 길목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4대문 중 북 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창의문을 날 머리로 산행을 모두 마치고 시내 버스로 경복궁 주변 식당에 들려 하산주겨 식사를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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