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혼을 증명하는 단계는 지났다. 탄력 받은 기관차처럼 영혼 증명 사례들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영혼과 교류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법당에도 영혼을 굳게 믿고 구명시식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 사람 뿐 아니라 구명시식에는 고정팬 영가도 있다. 그들은 구명시식을 삶과 죽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한 편의 리얼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2년 전 A씨는 우여곡절 끝에 건축허가를 받은 뒤 상가를 시공하던 중 실종됐다. 사건을 맡은 서울 M경찰서 강력반 형사들은 그가 면식범에게 살해됐으리라 보고 철저하게 수사를 펼쳐나갔지만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사건은 미궁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담당 형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사망을 좁혀 나갔다.
드디어 용의자가 두 명으로 압축됐고 체포를 코앞에 두고 있던 시점에서 갑자기 둘 중 한 명이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사라진 A씨의 시신은 남은 한 사람이 순순히 범행을 자백함으로써 밝혀졌는데 형사들은 암매장한 장소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A씨는 두 명의 살인범에게 은인과도 같았다. 평소 호탕하고 인정 많은 그는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마음을 다해 도왔다. 그런데 살인범은 A씨만 없어지면 상가를 차지할 수 있다고 착각해 흉악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부친의 시신은 콘크리트 바닥 밑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들은 시신을 땅에 묻은 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믿던 회사 직원들이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아들은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구명시식에 초혼된 A씨 영가는 버럭 화를 냈다. "어떻게 이 자리에 나를 죽인 사람을 부를 수 있느냐. 당장 살인자의 이름을 빼라!" 알고 보니, 심성이 착한 아들은 자살한 범인 영가를 옛 정을 생각해 몰래 영가 명단에 적어놨었던 것. 이를 안 부친 영가는 절대로 자신을 죽인 원수와는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완강히 구명시식을 거부했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그 영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주위를 둘러보다 겨우 그를 찾아냈다. 살해된 A씨 영가는 영단 앞에 떳떳하게 서 있는 반면, 자살한 범인 영가는 뒤쪽 병풍 구석에서 몸을 움추리고 서 있었다. 영가의 격이 확연히 달랐다고나 할까.
A씨 영가의 항의로 범인 영가를 영가 명단에서 지운 뒤에야 정상적으로 의식이 진행됐다. 영가는 그동안 못했던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털어놓으며 "세상이 험악해져서 미제사건이 많다. 내 사건만 해도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M경찰서 강력반 형사님들 덕분에 사건도 해결됐고 내 시신도 수습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콘크리트 바닥에 묻힌 내 시신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겠니. 해마다 명절날이면 반드시 인사하고 항상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도록 해라"라고 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동물은 아마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나 보은(報恩)한 동물 설화가 많듯 고의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동물은 없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배신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경제적으로 곤궁하지 않게 항시 보살폈던 A씨를 죽인 뒤 시신마저 콘크리트에 묻어버렸던 그들을 영가도 용서하지 않았다. 자살한 범인 영가는 고통스러운 무간지옥으로 떨어졌고 나머지 한 명은 현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구명시식 후, A씨 영가는 크게 한숨 쉬며 자신을 죽인 영가도 천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것도 다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범 영가는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며 통곡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