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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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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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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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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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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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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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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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년 1월 7일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