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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13 - 이즈하라를 걸어서 덕혜옹주비를 보고는 가네이시 성터를 구경하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比田勝) 에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에서 차를 빌려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올라 아소만을 보고 만제키세토(万関瀬戸)
운하를 구경하고 만제키바시로 운하를 건너서 산속에 자리한 가네다성터에 오릅니다.
렌터카에 올라 면세점인 다이렉스 미쓰시마에 도착해 쇼핑을 하고는 다시 5분쯤 달리니 도시가
나타나니 쓰시마시의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嚴原 엄원) 으로 식당가 근처
운히 옆에 지온(祈園) 호텔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일본풍 냄새가 물씬 나지만
한국인이 주인으로 건물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이며 5층은 민슈쿠(民宿, 민숙) 입니다.
배낭과 가방을 푼 후 지온 호텔을 나와 이즈하라 시내를 보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서쪽 운하에
이르러 가네이시 성터로 방향을 잡으니 비석이 있으니 문화8(1811)년도 朝鮮通信使 幕府
接偶の地(조선통신사 막부 .... 그럼 1811년에 막부의 관리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였나 봅니다.
왼쪽으로 가면 서산사(西山寺) 가 있으니 조선 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소로 1589년
통신사 때 부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시비도 있다지만 우리는 시간도
없으니 직진하니 저만치 현대적인 건물이 나타나고 그 옆에 오래된 성벽이 보입니다.
바로 가네이시성(金石城) 자리 인가 본데..... 그러고는 현대적 건물인 대마역사민속자료관
건물을 지나는데.... 산악이 많은 대마도는 특성상 논이 아주 귀하니 자급자족은
전혀 불가능하고 일본보다 가까운 조선과 의 교류는 대마도 생존의 필수사항 이었습니다.
때문에 여기 민속박물관에는 번주 일가가 제작한, 대마도의 편의를 위해 조선관의 교류때
사용한 에도(도쿄) 도쿠가와 막부의 위조 국새, 그러니까 가짜를 보관
전시 중인데 이는 대마도의 지정학적 생존을 위한 역사 현실임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시간이 늦은지라 문이 닫혔기로 한반도 양식의 세형 동검과 청동거울에 무려 17미터에
달하는 조선통신사 행열도가 있다는 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을 그냥 지나쳐 조금
걸으니 근사하게 생긴 문이 보이는데.... 바로 옛 성터인 가네이시 성의 누문인가 봅니다?
3층짜리 근사하게 생긴 누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金石城跡(금석성적) 이라고 적혀
있으니..... 이미 가네이시성은 무느진지 오래라 그럼 그 성터 라는 뜻인가 봅니다.
여긴 엄청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엣날에 성 안으로 여기는 번의 행정 사무소와
가신과 고급 사무라이들이 머무는 건물등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비석이 보이고 꽃이 많이 바쳐져 있으며 옆에 안내문이 보이는데,
바로 이씨왕조- 소우케(宗家) 결혼 봉축 기념비 (李王宗家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
인데 2001년 11월 10일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복원된 것인데
결혼식은 도쿄에서 올렸고 여기 대마도는 그해 인사차 방문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로 덕수궁에서 태어나 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
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으며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해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 부터 조울증, 우울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 증세를 보였으며, 결혼후 병세
가 악화되었으며... 1946년 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했는데, 대한
제국의 멸망후인 1912년에 태어났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황족은 아니며 일본의 왕공족 신분이었습니다.
1962년 기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의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습니다.
1912년 7월 13일 고종은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 왔으니 고종은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했으니 덕혜옹주가
유일한 딸이 되었으니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 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될 것을
염려해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고는 1920년 어머니인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21년 4월 1일 경성의 일본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으니
일본 복식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통학할때 몬쓰키와 하카마를 착용하였으며 유학 이전에 일본어
를 능숙하게 구사하였고..... 1921년 5 월‘덕혜’ 라는 호를 정식으로 하사받고 옹주의 존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옹주는 왕족다운 기품을 갖추고,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머리는 한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뒤에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하게 늘이고, 일본 옷에 하카마를 입고 학교를
다녔으며 상궁이 항상 마차를 같이 타고 와 수업 중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1925년 덕혜옹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3월 28일에 경성을 출발해 이틀후 도쿄에 도착하였고, 4월 14일
여자 가쿠슈인(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였는데, 1926년 3월 3일 영친왕 내외와 같이
귀국하여 순종을 알현하였으며 1929년 어머니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
가 《왕공가궤범》 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1931년 증세는 호전되었고, 같은 해 3월 27일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졸업합니다.
덕혜옹주의 결혼전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 귀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는데, 소(宗)는 옛 쓰시마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和族) 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왕공족의 혼사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라 1931년 4월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
하는 쇼와 일왕(천황)의 칙허가 내려졌고, 같은 해 5월 도쿄에서 결혼식이 일본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옹주의 혼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고 그녀의 혼인이 확정되자 옹주의 신하와 옛 친척들은 반대를 보였습니다.
옹주는 결혼 당초 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으니
당시의 모습을 본 이에 따르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이후 옹주는 1932년 8월 14일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습니다.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 과 봉호(封號) 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로 일가를 창립합니다.
이혼 후에 소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고,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 문화학원의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의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 전 후작에게 기증
했으며,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되자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하였으며 1956년 8월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됩니다.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한 김을한 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였고,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렀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를 만나서는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습니다.
덕혜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는데, 김포공항에
유치원과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 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卞福童) 이 마중을
나왔고,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합니다.
1962년 2월‘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하여 〈구황실재산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며 1967년 5월 4일 병세
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합니다.
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나 덕혜 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창덕궁 낙선재를 방문해 지배인 이공재
에게 전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지배인은 “고종의 딸하고 원치도 않는 정략결혼을 강행하고,
끝내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이혼한 그를 도저히 용서할수 없다. 만나봤자 할 얘기도 없고,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옛 생각이 나서 병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라며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壽康齋)에서 77세를 일기로 영면하니 장조카이자 둘째 오빠 의친왕의 종손인
이준 황손이 상주가 되어 영결식을 치뤘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습니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년 MBC 광복절 특집 드라마 《마지막 황녀 덕혜》 등에서 남편 소는
꼽추나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낭설이 유포됐지만, 소가 쓴 시집에 옹주를
대상으로 쓴 작품에 그녀를 '사랑하는 아내' 로 묘사하고 있고, 곤궁할 정도는 아니어서 아내를 고귀한
존재로 살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그의 생애동안 한국에 대한 비판이나 나쁜 말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런 소문은.... 덕혜 옹주를 도운 영친왕과 비 이방자 여사는 첫 아들을 낳고는 둘째는 9년이나 터울이
지나서야 얻은 이유가 있으니, 1922년 5월 9개월된 아들 진을 안고 창덕궁을 방문해 할아버지 순종을
알현하고 덕수궁에서 머무는중 건강하던 아이가 밤에 자다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초콜릿
색을 띈 덩어리를 계속 토해내다가.... 다음날인 5월 11일 새벽에 죽고 말은 것도 같은 이유라 여겨집니다.
도쿄문화학원에 조선 왕가로부터 기증받은 옹주의 유물로 그녀가 입었던 당의나 딸 마사에가 사용한 유아복
과 나막신 등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중 복식 7점 (당의, 홍색 스란치마, 치마, 송화색 숙고사 반회장
저고리, 진분홍 저고리, 풍차바지, 단속곳) 이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관장의 노력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덕혜옹주는 196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한 비운의 여인으로 2015년 6월 24일 오누마 스나오(大沼淳) 문화학원
이사장은 그녀가 입었던 조선 궁정의 의복을 한국에 기증했으니 이후 고궁박물관에 보관 되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원두막처럼 생긴 작은 집이 한 채 나오고 거기에 입장료를 받고 있는
데, 이게 뭔가 싶어 읽어보니 여기 성터에 정원이 있으니 가네이시성
かねいしじょう 정원인데...... 지도를 보니 보는 것과는 달리 제법 규모가 큽니다.
산기슭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배수시키는 구조로 가운데에 인공 섬이 있고 주위에
연못을 만들었다는데 뒷문으로 나가면 반쇼인이라지만..... 시간이 늦은
관계로 문이 닫혀 있기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옆 길로 해서 반쇼인 쪽으로 걸어갑니다.
반쇼인(万松院 만송원)은 일본 3대 묘소의 하나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수령 천년의 삼나무가
지켜보는 그런 고즈녁한 분위기로 다 오르면 역대 도주(島主)들의 묘석이 줄지어 있습니다.
반쇼인은 쓰시마번 번주인 소우케(宗家 종가)의 묘소로 소씨의 보리사인데,
햐쿠간기(百匯木) 라고 불리는 돌 계단이 한적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및 도쿠가와 역대 쇼군들의 위패도 있습니다.
종가(宗家) 19대(代) 요시토시(義智 의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20대 요시나리가 1615년에 창건한 송음사
(松音寺)를 1622년 義智(의지)의 법호를 따서 반쇼인(万松院 만송원)이라 개칭했다고 합니다.
수령 수백년짜리 굵직굵직한 삼나무도 많고 인조가 하사한 법구인 세 발 향로, 에도 시대의
쇼군 가문이었던 도쿠가와 가문의 위패의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소 요시토시의 후손으로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의 묘도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벚꽃나무야 철이 아니니 황량하지만 매화 나무는 홍매화와 백매화 모두 꽃이 피려는
것으로 보이니....... 여기가 위도가 낮아 봄이 일찍오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옆에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면서 지도자가 스피커로 크게 외치는걸 보니 무슨 학교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체육관으로 실내체육관 말고도 운동장이 있어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연습하는 것을 봅니다!
운동부는 한국의 고등학교는 한 학교당 1~2개가 있는 프로를 지향하는 에이스 체육인데 비해,
일본의 고등학교는 한 학교당 30개 가까운 운동부가 있으니 생활체육으로...
한국학생들이 방과 후에 교실에서“야자”를 할 때, 일본은 방과후 체육활동을 하는 것이 다릅니다.
고등학교 야구부는 한국의 80개에 비해 일본은 4,030개 이고, 축구는 한국 145개에 비해 일본은 4,174개
에 달하며, 일본 여자중학교 농구부 는 5,649개교에 7만5423명이 선수로 등록한 데 비해, 한국
여자 농구부는 "23개교에 선수도 184명" 이 전부이니..... 선수 기준으로 400분지 1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일본의 학생들은 학교를 마친후 클럽활동을 하는데 클럽 중에 절반이 운동부이니 그럼 일본 학생들의 40%
정도는 학교에서 매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운동부 활동을 하는 셈이니 저변은 실력으로 이어지는지라,
2021년 도쿄 올림픽 참가팀 가운데 평균 키(175.6㎝) 가 가장 작았던 일본이 은메달을 차지한게 우연이
아니니 같은 대회서 한국은 3전 전패로 탈락했으며,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에서도 3:0 으로 지는 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