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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황해도에서 서울로 이사 올 때 살았던 곳
남산의 기우제를 지내던 우수현 남쪽 이라는
뜻으로 호를 우남 이라 지었다
세종(世宗)의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10 살 때
사서삼경 [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과거를 칠 수 없게 되자,
1895년 4월 , 20살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화이팅 선교사의 조선어 가정 교사로 일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서양 문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배재 학당에서 서재필도 만났다.
미국의 정치적 자유를 배웠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1년 16 살에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되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 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였고,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였고,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1900년생)를
만났고,
1934년 10월 프란체스카 35살, 이승만 나이 60살에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두 달이 지난 10월 16일
이승만은 70살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만나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해, 투표 없이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05년 한일 합방이 되던 때
이승만은 30살의 나이로
배재학당의 학력을 초급대학으로 인정 받아서
워싱턴 대학의 콜롬비안 학부에 2 학년 2 학기로 편입되었다.
박용만을 통해서 조선에서 데리고 온 그의 아들 봉수(태산)을
돌보는 것도 큰 문제였다.
아들을 돌 볼 수 없어서
필라델피아 한 가정집에 맡겼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1905년 12 살의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 (1906 ~ 1910)
▲ 개화기(開化期)에 미국유학을 했던
한국 지식인중 발군(拔群)의 학력을 쌓았은 이승만는
동시대의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좀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따냈기 때문에
군계일학(群鷄一鶴)격이 되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일설에 의하는 그는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이 통과된 후 2년 뒤인 1912년에 출간된다.[1]
개화기(開化期)에 미국유학을 했던 조선지식인은
모두 합쳐 70명 미만이다.
그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유길준(兪吉濬),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김규식(金奎植), 신흥우(申興雨)등이다.
이승만은 이들 선구자보다 뒤늦게 도미,
유학했지만 발군(拔群)의 학력을 쌓았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좀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따냈기 때문에
군계일학(群鷄一鶴)격이 되었다.
이승만은 1905년초부터 1910년 중반까지
약 5년6개월동안 미국에서 세군데의 대학을 다녔는데
제일 먼저 다닌 대학이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大였다.
이 대학은 세계정치의 중심지인 미국 수도(首都)의 한복판,
특히 백악관(白堊館)바로 옆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정치지망생에게는인기높은 대학이었다.
이 대학에서 2년6개월동안 공부함으로써
그는 미국정치의 내막을 훤히 파악할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가어떻게 이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가?
1904년 말 이승만이 조국을 떠날 때
그의 흉중에는 밀사의사명 이외에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야심이 숨겨져 있었고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게일과 언더우드등 서울의 저명한
미국선교사들로부터 미국 교계(敎界) 지도자들 앞으로의
추천서와 정보를 받아갔으리가 추측된다.
이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조선의「정치범」으로 7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40여명의 동료 죄수들을 크리스토교로 개종시킨 사실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데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코베넌트 장로교회(The Covenant Presbyterian Church)의 햄린(T.S. Hamlin) 목사를 찾아가 유학지도를 부탁했고,
햄린목사는 그당시 주미 한국공사관의 법률고문이었던 조지 워싱턴 대학의 총장 니덤(Charles Willis Needham)에게 소개했고
니덤총장은 배재학당(당시의 영어명칭:『Pai Jai College』)의
학력을 감안하여 학부(學部)의 2학년으로편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무일푼의 이승만의 장례성을 보고
그에게 장학금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1905년 2월부터 1907년 6월까지 2년6개월동안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창생활을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30~32세.
만학도(晩學徒) 이승만이 여기서 무슨 과목을 택하였고
또 그의 성적은 어떠했던가 하는 기사가 있는데...
우선 그의 학점에 대한 구제적인 사실 열거는 있느나 전혀 그 정보의 쏘스는 없다.
그러므로 확인 되지 않은 정보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논문과 불후의 명작
Japan Inside-out 을 보면
어떻게 그 옛날에 저렇게 영어를 잘 할 수 있는가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 대학의 문턱에도 못 가본 기자들이나
좌빨애들이 입 댈 처지가 못된다. 기가 차지 않을 정도로 불손한 의도와 건국 대통령을 음해 하려는 악질적이고 불손한 의도를 보면 더 읽을 글이 아님을 배우고
이 글의 독자는 좌빨의 선전 선동의 거짓말에 대처 하는 좌세를
굳히기 바란다.
이승만 대톧령은 학부를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마치고
세계적 명문중에 명문인
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서 2년반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대학에서 2년 남짓한 기간에
인문.사회과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쾌거였음은 물론
미국의 대학교육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먼저 많은 유학생을 서양에 파견했지만
그들중 李박사의 학력에 필적(匹敵)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이 하버드大 대학원에 입학한 비결부터 파헤쳐 보자.
그는 조지 워싱턴大에서 4학기를 마친 1906년 겨울,
자기의 옛 은사 서재필(徐載弼)에게 편지로
하버드大 대학원에 진학할 의사를 밝히고 조언을 구했다한다.
서재필은 하버드大에 진학하려는 그의 꿈을 칭찬하고
하버드大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것과 1년이내에석사과정을 끝내고 귀국할 것을 충고했다.
이승만은 1907년 초 하버드大 인문대학원 원장 앞으로 보낸
입학요청서에서,
자기는 다년간 동양적 학문에 공업을 쌓은 인물이며
한국에서 할 일이 많고 또 자기의 귀국을 고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하버드大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한다.
미국 대학에서는 특히 유명한 대학에서는 외국의 지도자의 자녀들을 특별 입학을 시키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나 지금이나 장상적인 절차로 석사학위를 끝내면서
곧 바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려 했을 것이다.
영리한 이승만은 하바드 대학에서 이수한 과목과 성적표를 배경으로 프린스톤 대학 박사 과정의 입학을 따 낸다.
탁월한 전법이다. 그
리하여 이승만은 하바드 대학에서 요구하는 석사학위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고 1910년 (즉,프린스턴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 2월23일에 하버드大의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하버드大에서 1년간 고전(苦戰)했지만 2년안에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08년 겨울 뉴욕으로 가서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머무르면서 콜럼비아大 박사과정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요행히 그는 여기서 몇해전 서울에서 사귀었던 선교사 홀(E F Hall)을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프린스턴大를 방문,대학원장 웨스트(A F West)박사를 면접했다.면접후 웨스트 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다시 2년안에 박사학위를 끝내야 되겠다고 강조했다.
만약 프린스턴大측이 이 점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면 자기는 차라리 뉴욕에 머무르면서 조건이 더 유리한 콜럼비아大에 입학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드디어 프린스턴大측은 이승만에게 2년 안에 박사과정을 끝내 주겠다는 보장아래 그를 입학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프린스턴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받아주어 신학교 학사에서 무료로 기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학도(만33~35세)이승만이
뉴저지州의 아름다운 프린스턴大캠퍼스에서 공부한 기간은
1908년 9월부터 1910년 6월14일까지 2년 미만이다.
이때 그는 신학교 학장 어드먼,대학원 원장 웨스트,그리고 대학교 총장 윌슨등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교적 즐거운 학구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과목을 청강하면서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선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역사와 철학사 를 부전공으로 택했다.마지막 학기에 그는 엘리엇교수의 지도아래『미국의 영향을 받은「국제법상의」중립』이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썼 다.그의 학위논문은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우수」평점을 부여받았으며 졸업후1912년 1월 프린스턴大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승만은 1910년 7월18일의 졸업식에서
-나중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된-윌슨총장으로부터
손수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승만은 서양사(특히 미국사).정치학.철학 등을 폭넓게배운 기초위에 국제법을 전공한,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국제정치학자였다.
19세기 중엽이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받아온 우리민족은 드디어 당당한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대가(大家)를 배출한 셈이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이승만은 유학 하는 사이에도 정치 종교적인 행사게 열심히 참석한거 같다. 한국 실정에 부모가 학비 다 대주고 편안히 공부 하는 것과는 달리 격동기에 단신 미국와서 공부하며 당시의 재미 한인 사이에 최고의 엘리트인 이승만을 여러 모임에서 초대 하였을 것이다.
그 한 예로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