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표현한 어휘/전 성훈
우리말에는 비 내리는 모양이나 상태를 보고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멋진 어휘가 상당하다. 비를 표현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보고, 몇 년 전 글쓰기에 도움이 될까하여 사놓은 ‘우리말 풀이사전’을 꺼내어 훑어본다. 어떤 단어를 설명할 때 갑자기 말이 막히거나 입안에서 빙빙 돌고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나는 대로 비와 관련된 단어를 떠올려본다.
계절을 나타내는 ‘나를 울려주는 봄비’, ‘가을비 우산 속에’ 같은 어휘는 제외하고 가장 먼저 떠오는 게 소나기 또는 소낙비이다. 이어서 가랑비, 이슬비, 보슬비, 여우비 등이다. 소나기는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로 흔히 번개, 천둥, 강풍 등을 동반하며 여름에 잦은 비이다. 지역에 따라 소낙비라고도 한다. 소나기하면 황순원 선생의 주옥같은 단편 ‘소나기’가 생각난다. 경기도 양평지역을 배경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병약한 윤초시네 손녀딸과 가난하지만 건강한 이웃집 소년의 소꿉장난 같은 애틋한 이야기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소나기 주인공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 묻는 시험문제가 출제 되어 당연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여겼는데 정답은 우정이란다. 왜 그게 사랑이지 우정이냐고 국어선생님께 여쭈어보았다가 쪼그만 녀석이 되바라지고 까졌다고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가랑비와 이슬비 그리고 보슬비는 의미를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그 차이를 구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가랑비는 조금씩 내리는 비를 뜻한다. ‘가라고 가랑비 오고, 있으라고 이슬비 온다’라는 옛말도 있다. 가랑비의 ‘가랑’은 매우 작은 상태를 뜻 한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도 자꾸 거듭되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라고 한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라는 동요는 우산을 쓰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정감 있게 표현한 노래이다. 이슬비는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또는 나뭇잎에 겨우 이슬이 맺히게 할 정도로 내리는 비를 표현하는 말로 ‘가루 팔러 가니 바람이 불고 소금 팔러 가니 이슬비 온다’라고 말하듯이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고 빗나가기 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보슬비는 바람 없이 조용히 내리는 가랑비를 뜻한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이란 노래가사처럼 보슬비는 소리 없이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의 한 가지 표현이다. 보슬비의 큰말은 ‘부슬비’로 비가 내려서 축축하면서도 한적한 분위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어휘이다. 결국 가랑비, 이슬비, 보슬비, 부슬비 등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나 강수량을 보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나 느낌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우비는 ‘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비’를 말한다. 행동이 무척 민첩한 여우처럼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비를 나타내는 재미있는 표현을 보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가벼운 모래흙, 황사를 일컬어 ‘흙비’라고 하고,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단비’라고 하는데 모내기 할 무렵에 한꺼번에 내리는 비는 단비 중에서도 으뜸으로 쳐서 ‘목비’라고 부른다. 가을에 비가 오면 떡을 해 먹는다고 해서 가을비를 ‘떡비’라고 하고, 여름철에 비가 내리면 일을 못하고 낮잠을 잔다는 뜻에서 여름에 내리는 비를 ‘잠비’라고 한다. 보슬비나 소나기에 비하여 세찬 바람을 타고 ‘두들기듯’ 내리는 비가 얼굴을 내리칠 때는 뺨이 얼얼하여 마치 채찍을 맞은 것 같다 해서 ‘채찍비’라고 하며, 봄철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꽃잎을 보며 꽃비가 내린다고 하듯이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비꽃’이라고 부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라고 할 때 ‘억수’는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말한다. 비와 함께 쓰는 말 중에 잠시 비를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비가 그친 상태는 ‘비를 긋다’라고 한다. 비와 관련된 아름답고 정감 있는 우리말을 찾아보니, 여름철 지긋지긋한 장맛비에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