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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조심스러워 잠시 보류했던...
서태후는 조대비 홍대비의 조합이란 제 주장에 하나를 덛붙이겠습니다.
서태후란 인물여...
아무리 봐도 역사외곡세력들이 구한말 청구조선의 태후들을 조합한 실존인물이자 가공의 인물일까 합니다.
서태후의 탄생과 초기 간택과 정비가 아닌 계비다...아니 후궁이다의 내용은...홍계비와 경빈김씨를 조합한 것...
서태후가 이미 죽은 동태후를 시샘하는건...효현황후 김씨를 효정황후 홍씨가 시샘하는 것...
서태후가 동태후와 같이 사이좋게 손주 황제들을 주물딱 거리며 수렴청점하는 건...조대비와 그 며느리인 홍대비&경빈김씨의 구한말 역할...
서태후가 결혼 초년엔 사랑받지 못했다 함은...홍대비의 독수공방...그러면서도...
동태후는 독수공방...서태후는 사랑 독차지 했다함은...홍대비의 독수공방...헌종의 강력한 의지로 맞은 후궁 경빈김씨의 사랑독차지...
서태후의 애주중지하던 유일한 아들이...후사없이 후궁들에 둘러쌓여 빌빌하다 병사한 건...
조대비의 금지옥옆 유일한 아들인 헌종의 그것...
그러함에도 서태후가 아들이 맘에 안들어 독살하여 죽였을 지 모른단 상반됀 설은...
조대비의 외척세력을 견제한 순원황후 김씨가 헌종을 주지육림에 빠지게 많들어 독살 또는 병사시켰을 거란 설 ...
서태후가 경친왕(경록?)과 야합하여...청나라 거의 최초로 턱없이 먼 방계혈통의 경친왕(경록?) 아들을 양자로 들여 황제를 만든 건...
조대비가 대원군(경록대부?)과 야합하여...조선 거의 최초로 턱없이 먼 방계혈통인 대원군 아들 고종을 양자로 들여 황제로 만든 것...
그게 고마워 경친왕(영록?)과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이화원에 거대 궁궐을 지어 준건...
그게 고마워 대원군(영록대부?)과 고종이...조대비에게 경복궁에 대비전을 크게 지어 준것...
그 무리한 토목공사로 청나라가 경재가 파탄에 빠져 청조가 망했다는 비판...
경복궁 재건등의 그 무리한 토목공사로 당백전을 발행해 조선경재를 파탄으로 몰아넣어 망국의 초석을 다졌단 비판...
반면,
서태후를 이뻐한 황제가 이화원에 낙수당 등 거대 건축물을 지어 주었단 소문은...
경빈을 이뻐해 헌종이 500간 짜리 낙선재를 지어 주었단 것...(현재는 6간 만 남았다나...500간 짜리 터는 어디고?...^. .^)
그래, 항간엔 서태후와 영록의 로멘스 소문이 자자했었고...
그래, 조선엔 조대비와 대원군의 미묘한 관계가 조심스레 회자됐었고...
서태후의 양아들격인 광서제의 황후는 서태후의 동생이라 함은...
조대비의 양아들격인 고종의 황후는...부대부인 여흥민씨(대원군 부인)의 동생 민황후(자영)라서...이모와 결혼한 격임을 말한것...
광서황제가 자금성을 버리고...별궁인 이화원에서 정무를 보거나 말년엔 반 납치감금 되는 건...
고종황제가 경복궁을 버리고...별궁인 창덕궁에서 정사를 의론하고...말년엔 고종과 순종이 반 납치감금되는 것...
서태후 사망일시와... 사망후 선대 황릉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하는 건...
경빈 김씨 사망 일시와(서태후와 1년차?)... 사망후 엄연히 비빈의 신분이기에 경릉의 헌종옆에 못 묻힌 것...
그러면서도 서태후는 청황제의 동쪽에 묻혔단 상반됀 얘기가 나옴은...
홍대비가 헌종비의 동쪽에 묻힌 것...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 너무 같은게 많은... 구한말 망국시기의 청조와 청구국(조선)의 권력층과 대비(태후)들 이야깁니다.
위키백과의 서태후의 초상화란 건...
뺨이 홀쭉허고 턱이 길던데...
그건 다른 태후(명헌태후=효정황후=홍대비)나 비빈(경빈김씨?) 초상화로 보입니다.
차라리 서태후의 여러 사진들을 보건데...
조대비(신정황후)가 딱 서태후의 얼굴과 유사합니다.
밑에 ...
근래에 단 한 개 발견됐다는... 신정황후(조대비)의 초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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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 조 대비(趙大妃)의 초상화로 전해지는 그림 한점이 처음 실체를 드러냈다.
※ 신정왕후 (神貞王后, 조대비 조선 왕비) 1808(순조 8)~1890(고종 27).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 풍양조씨로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만영(萬永)이다. 1819년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827년 헌종(憲宗)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고종이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1866년까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수릉(綏陵)이다.

▲ 문화재청의 도록과 이태호 교수의 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전(傳) 조 대비 초상’. 조선시대 문신(文臣)
초상화의 격식을 갖춘 유일한 여성 초상화로 부산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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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하신 조대비 초상화를 서태후의 사진들과 대조해 보겠습니다.
서태후 사진 늙었을 때.jpg (29kb) 다운로드

서태후 초상화 3.jpg (93kb) 다운로드
1. 서태후 조대비 모두...긴 얼굴상이나...상대적으로 짧은 아랫턱.
2. 서태후 조대비 모두...귀는 큰데...돌출형이 아닌 ...머리에 바짝 붙은(누운)귀.
3. 서태후 조대비 모두...넓은 이마.
4. 서태후 조대비 모두...길지만 상당히 옅은 눈섶.
5. 서태후 조대비 모두...눈과 눈섶사이 눈두덩이 푹 꺼진 주름이 잡힌 서양인형 눈두덩.
6. 서태후 조대비 모두...좁고 길고 오똑한 서구형 콧날.
7. 서태후 조대비 모두...유난히 통통한 뺨과 ...갸름한 얼굴과 상반되게 짧은 아랫턱.
8. 서태후 조대비 모두...얇은 입술.
9. 서태후 조대비 모두...다소 옆으로 큰 입술을 작게 오므리려 애쓴 습관이 몸에 밴... 엄발란스한 입술.
10. 서태후 조대비 모두...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균형잡힌 미인상.
이정도면...동일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여...?
복장이 왜 다르냐고여...?
상당수의 초상화들은...그 복식이 후대에 맘대로 수정됀 흔적들이 부지기수며...
정곤수의 초상화에서 보듯...완연한 청나라 복식을 지우고 명나라 복식으로 고친 초상화를 참고하건데...
후대 한반도에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대륙에서 망명한 친일대한떼국 기득권들과 ...섬 원숭이들이 요정도의 손장난도 않 했다 보시는건 ...
너무 천진난만한 발상들이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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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니오는 서태후 초상화는 좀 이상합니다.
서태후는 노년까지 젊음을 유지했단 설을 뒷바침하듯...노년기 사진에도 검은 머리에 통통한 볼을 지녔던데...
밑의 초상화엔...
전체적으론 닮은것 같으나...
백발이 허옇고...결정적으로 뺨이 푹 꺼지고...아랫턱이 작지않은 초상화 이고 보니...
당대의 다른 태후(홍대비?...경빈김씨?)의 노년기 초상화가 아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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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광서제가 1898년 6월부터 캉유웨이(강유위)의 의견을 수용하여 일으킨 일련의 개혁운동을 배은망덕이라고 여겼다. 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은 서태후 자신이었다. 황제로 만들어주고 친자식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친정까지 허락하였더니 믿는 도끼도 못 되는 것이 발등을 찍는다고 서태후는 생각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너무 허약한 도끼였다. | |
그는 서태후의 발등을 찍기는커녕 자신의 발등을 내려찍고 말았다.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원세개)의 군사력을 움직이려 했던 광서제는 배신당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계획을 그대로 서태후에게 고해바쳤다. 기회를 노리던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자금성의 영대에 유폐시키고,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무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술정변이다)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 다시 나서 청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 |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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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서태후 | |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


서태후의 아들 통치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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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내주어야만 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 |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 |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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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가 황제로 고른 광서제 | |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 |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 |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한 서태후. 손톱에는 비취보호판을 달아 매우 길고 뾰족해 보인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 |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

서태후가 지은 이화원. 앞에 보이는 호수가 사람이 직접 파낸 인공호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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