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동부인하여 경주 일박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누님의 일흔아홉 번째 생신을 겸하여 모처럼 형제간의 나들이였다. 해거름에 숙소 한옥 호텔 ‘춘추관’에 여장을 풀고, 저녁 7시 예약에 맞춰 육훈六訓으로 유명한 ‘최부잣집’ 한정식 ‘요석궁’에 도착했다. 시간에 맞춰 주문한 꽃바구니와 케이크가 먼저 와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한옥의 고태미는 300년 12대를 이어 만석萬石의 부를 지켜 온 가문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최부잣집의 내림 음식이 주가 되는데, 생소한 음식은 건강식이었다. 마치 보약을 한 사발 마신 기분이었고, 1시간 30여 분의 식사가 끝나자 일행은 월정교, 동궁과 월지月池의 야경을 구경하고 춘추관으로 돌아와 잘 정돈된 잔디에서 뒤풀이는 시작되었다.
언제나 만나면 이야기보따리는 형제들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부산 좌천동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곤 한다. 젊은 부모와 4형제가 살던 그곳은 요즘으로 치면 역세권이었다. 전차·버스정류소가 있어 내왕객들의 통행에 편리했고, ‘부산진역’은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었다. 사람이 밀리면서 시장이 형성되었고, 6.25사변으로 외지 사람들이 또한 몰려왔다. 서민적이고 정감이 어린 골목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에 그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장소지만 발걸음은 쉽지 않았으며, 서슬이 시퍼런 그때의 경찰서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능풍장’이 생겼을 당시 조선의 부산지역은 일본·청나라 등 국제적 교류의 중심지였다. 특히 근처 고관은 한일 교류의 상징적 공간이었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군사적·경제적 침략의 근거지가 되었다. 1932년 부산부 좌천정佐川町에 속했다가 해방 후 1946년 일본식 동명洞名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좌천동이 되었고, 1957년 구제區制의 편성으로 동구 좌천동이 되었다.
능풍장陵風莊은 일본인 실업가 오이카와 지로의 별장이다. 인근 적산가옥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니 이곳을 통틀어 능풍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이카와의 집은 해방과 동시에 그들이 떠나가고 내국인이 매입하였으며, 내가 살았던 그곳, 능풍장은 높은 담을 경계로 내왕은 없었지만 그렇게 유년기를 보냈다.
우린 당시 이층집이 드물던 시절, 이 층에서 지대가 낮은 그 적산가옥을 내려다보곤 했다. 블록 담 안은 키 큰 동백나무가 울이 되었고, 계절에 맞춰 피는 꽃이라 그러지 앙상한 겨울이지만 푸른 잎과 붉은 꽃잎은 시절을 잊고 상상을 흔들었다. 동네 위쪽엔 ‘연등사’란 오래된 사찰이 있었고, 신작로 옆엔 ‘동명목재’의 시작인 동명제재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동명목재 사주인 강석진 씨의 규모가 큰 저택이 자리했다.
아련함이 남아있는 그곳, 길가엔 술도가가 있었다. 즉 탁주 양조장을 말한다. 그때 주인은 지 모 씨라는 할아버지였다. 아이들이 몰래 고두밥을 훔쳐 먹으러 들어와도 못 본 체하였으며, 항상 넉넉한 마음으로 술지게미를 나누어 주었으나, 아이들이 허기를 면하려고 먹었다가 취해 한동안 비틀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때 정계 진출의 뜻을 품고 민의원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웃 간 오고 가는 따뜻한 정이 살아 있었고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듯, 골목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곳이 좌천동이다.
골목은 아파트로 치면 엘리베이터 같은 진입구이자 공유 공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골목길에 면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을 거쳐야만 집으로 가기 때문에 평상을 놓고 앉아서 누가 오가는지 보고, 아낙들은 수다를 나누고, 남정네들은 술 추렴을 했던 골목길은, 아침이 되면 아무라도 나와서 빗자루로 쓸고 하던 길이었다. 아직 이곳은 골목이 형성되어 있고, 재개발·재건축과는 거리가 먼 동네에 살고 있다. 한마디로 서민의 애환이 녹아 있는 동네라 할 수 있으며, 이런 동네를 지우고 새로 짓는 재건축·재개발이 아니라, 골목을 유지하면서 집을 고치는 ‘재생’의 방식으로 남겼으면 한 게 바람이다.
첫댓글 아직도 저는 그러한곳에 살고는 있어나, 옛날 요즘에 표현 라뗀, 그모습은 찾기 힘들고 힘든 생활고에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민초들의 고통은 다를바 없는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