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고츠키를 볼 때마다 물질과 기억과의 접점이 샘솟듯 한다.
오래 전에 쓴 일기를 보듯이 다시 보니 또 새롭다.
물질과 기억 4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제 암송의 수준이 되어버리면서,
끊임없이 번역어를 고르며 곱씹고 있다.
"과거는 '물질'에 의해 까불려지고(jouee), 정신에 의해 이미지화(imaginee)된다."
비유하자면,
물질의 리듬이 과거의 반복이자 매순간 초기조건에 무관한 주사위 던지기라면,
정신과 생명의 리듬은 기억의 삽입으로 초기조건에 무한히 의존적이다.
볼츠만이 다윈을 존경했던 것은,
물리학의 저 순수한 시행에서
다윈이 바로 생명체의 비가역적 돌연변이 진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프리고진의 말대로,
볼츠만이 종국에 열사로 풀어헤쳐버리는 물리적 역사의 종말을 본 지점에서,
다윈은 희박한 확률이 세대를 잇달아 안정적으로 자연 선택되어가는 과정을 느낀다.
느낀다고 한 것은 아직 다윈의 공간화된 진화의 법칙에는,
Deus ex Machina(신의 작용)에 해당하는 멘델과 더프리스의 유전법칙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게 에둘러 말했기 때문이다.
신다윈주의는 바로 이런 불확실한 생물학을 분자생물학에 기초한 유전학과 결합함으로써 구축된다.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는 공간화된 진화법칙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전자가 진화로 성립한 현재 생존한 종들을 영화 필름의 공간화된 프레임들로 구축하듯이,
후자는 유전학과 발생학에서 유사한 시도를 통해 계통발생과 세대유전을 정식화 한다.
그런데 매클린 톡, 그녀는 그런 목적론적 도식은 유전법칙에서 끊임없이 안정성을 침해당한다고 본다.
사실 유전은 그것자체가 이른바 오류코드에서 새로움이 산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깡귀엠의 건강, 정상성, 오류, 질병에 대한 관점과 접점을 이루는 듯 보인다.
건강이란 새로운 정상성으로 몸이 질병으로부터 회복될 때의 동적 상황이며,
형태적 오류는 정상성이라는 규범적 틀에서 본다면 얼마든지 질병화할 수 있다는 것.
기형이란 병리적으로는 늘 질병 개념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유전적 질환은 기형과 어떤 관계일까?
요즘 들어 자꾸 앙브루와즈 파레의 '괴물성과 기이한 것들에 관하여'를 번역하고 싶어 죽겠다.
키클롭스가 외눈박이라고 사는 데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오디세우스의 신화적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항적 생명체로서 언급될 때 괴물로서 규정된다.
키클롭스들은 신화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오디세우스의 규범적 문법을 삶의 척도로서 갖지 않는다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월 8일 신입 부모와 차담회 후
육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 인류가 살아온 온 이래로 숱한 시행착오와 ‘썰’들이 난무했을 텐데 아직도 명확한 답은 오리무중이다. 사실 대부분의 문제들이 확실한 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정해진 답을 찾지 말고 다양한 지역과 시대에 따라 어떻게 육아가 변화되어 가는지를 추적해보자.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뭔가 얻을 게 없을 지에 대해 물어보는 거다. 사립과 공립, 공동육아든 일반육아든 가정보육이든 형태는 다양한데 오히려 육아에 대한 생각들은 덜 하게 되고 국가나 제도 시스템에 맡겨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많이 떠들게 되고 상대적으로 부모들은 소외감을 느끼거나 공감할 수 없는 ‘썰’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게 아닐까? 사실 우리가 살아온 것 자체가 육아의 결과이니, 어떻게 굴러가든 이 시기만 버티면 된다고 여겨도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꾸 남들 하듯이,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모난 돌 정 맞듯이 살고 싶지 않고, 그저 묻어가고 싶어진다. 이럴 땐 괜찮은 전문가들의 얘기들을 조금 귀담아 듣는 것도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맹신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비고츠키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비고츠키는 자신의 얘기를 풀어 놓을 때마다 늘 남의 얘기를 먼저 제시한다. 대화 상대자로서 남의 얘기를 먼저 경청한다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그래도 그가 전하는 얘기가 다른 이들의 얘기를 날 것 그대로 전달한다고 여기지는 말자. 날 것 그대로란 것 자체가 환상이라면?(10월의 단상 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기 마련이 아닌가! 지금 이렇게 비고츠키를 나름대로 헤쳐 보려고 하는 나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책은 여럿이 같이 읽어야 맛이 나는 것 같다. 혼자 골방에 쳐 박혀서 도 닦는 수도승처럼 읽다 보면, 자기 생각에 옴팡 빠져서 막다른 길에 빠질 지도 모른다. 읽고 사색하라는 얘기는 맞지만, 다른 독자들과 얘기를 해보는 게 혼자 골머리 썩히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불현듯 ‘어느 새 벌써’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젖꼭지 빨던 때가 엊그제 같고, 지난 달까지만해도 같이 계단 오르내릴 때면, 손 붙잡으라거나 안아달라고 보채기 일쑤였다. 이젠 넘어질까 옷이라도 잡거나 자기보다 앞장서 걸을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난리다. 이렇게 둘째 성연이 비위를 맞추다 보니 어지간한 성인들과의 트러블은 무덤덤해지기도 하지만 더러는 욱한 감정으로 튀어나올 때도 있다. 아이의 성장이 미끄럼틀처럼 일정한 경사로 스르륵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낀다. 불과 2, 3주 전만 해도, 1년 가까이 잘 다니던 어린이집 등원 할 때마다 울던 아이였다. 정작 작년 초 신입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적응기 2달 동안에도 울지도 않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비고츠키는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아이들의 발달이 시계 바늘로 측정되는 시간 순서로 짜여져 있다고 보는 것에 반대한다. 아이들의 발달에는 리듬이 있고, 그 리듬은 일정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기 보다는 오르고 내리는 파도 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뒤로 가는 듯한 느낌도 준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리듬에 대해 진즉에 관심을 기울였던 들루즈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음악성은 유희 속에서 뿐만 아니라 실재의 양상이기도 하다-10월 단상)
“발달 과정은 결코 같은 템포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라지고 느려지거나 강화되고 느슨해지며, 진보하고 퇴보하는 움직임의 시기들의 교체를 끊임없이 드러낸다.”(32쪽)
처음에 저 문구를 읽었을 때가 아마 둘째 성연이가 이제 막 태어났을 때였을 것이다. 나름 첫째도 4살이고 둘째는 뭔가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육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근래 서너 달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분명 더 오래 전에도 이런 느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육아는 망각이 그 본질 아니던가!(지각은 기억의 삽입에 의한 선택이 본질이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이미지들은 불가피하다-10월 단상) 아이들은 훌쩍 크는데 그 시간의 구비구비를 모두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게 육아다. 오히려 육아의 시간들은 머리 속에 기억되기 보다는 몸 안에 새겨진다는 말에 보다 더 공감이 갈지도 모른다. 최근에 다시 비고츠키 책을 보니 전에는 이해를 하려해도, 번역이 이상한 건지 이해도가 딸린 건지 알쏭달쏭 긴가민가했던 글귀들이 ‘아하~’하는 혼자만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소위 학자입네 하는 사람들의 글은 사실 너무 옴팡 빠져서 읽기 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스윽 한 번 둘러 볼 때 촌철살인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다.
피아제를 비롯한 많은 발달심리학의 기본 태도는 아이가 구닥다리 진화론처럼 지속적인 발달을 계속한다고 본다. 요즘 진화론은 피아제 때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유해진 편이지만, 어쨌든 19세기 말 20세기 초 비고츠키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진보와 진화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던 말들이다. 퇴행하는 것은 어떤 비정상적 상태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고츠키는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유아 시기의 실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지극히 정상적 발달의 모습이라고 본다.(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는 것은 한시적 개념틀로서 유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심지어 비고츠키에서조차도. 도식이란 결국 무너지기위해서 필요하다는 끌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에 대한 관점을 기억하자. 벡송은 진즉에 이 점에 집중했다. 관념론과 유물론에 포획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벡송의 몸부림이 읽힌다.-10월 단상) 그렇다면, 비정상은 아이들의 발달에서 있기는 한 걸까? 비고츠키는 아이들의 발달에서 비정상보다는 ‘위기’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그 시점에 아이는 발달의 새로운 단계로의 변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비정상이 싫어서 위기라는 말 바꾸기만 한 것인지는 앞으로 훑어가면서 음미해 봐야겠다. 학자들의 버릇 중 하나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기존의 학설과 굉장히 다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아직까지는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연령과 위기는 일정부분 대립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한 살 두 살 수치화되고 틀에 박힌 ‘연령’과 아이들의 발달 속에서 불현듯 등장하는 듯 싶은 ‘위기’, 이 두 가지 말로 한 권의 책을 풀어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백일에 배밀이, 돌이면 걷고 세살이면 문장을 만들고 미운 두 살이니 세 살이니 식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일단, 비고츠키가 연령과 위기라는 말들로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얘기들을 던지는지 따라가 보자. 너무 심각하고 집요하게 뒤쫓지 말고, 되도록이면 나의 아이들, 나 자신의 육아를 먼저 돌이켜 보면서 가벼운 산책 나갈 때 말동무 삼아 가면 좋을 것 같다. 비고츠키를 읽어보면서 놓쳤거나 스쳐 지나갔던 육아의 시간들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면, 가끔은 ‘어느 새 벌써’ 품안의 자식에서 훌쩍 커 버린 아이들에 대한 새로운 기억들이 산출될 지도 모른다.
피아제와 비고츠키는 과연 닮았는지?
3월 25일 비고츠키 연령과 위기 단상기록
21
원시적 걷기와 원시적 의지에서 원시적이란 어떤 의미이며, 엘리아스버그의 자율적 말은 비고츠키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가? 아이의 분노폭발은 활동의 공유는 인지하나 기저 또는 심층에서 의식이 공유되지 않느다는 깨달음에 대한 어린이의 반응이다?
원시적 말 또는 자율적 말의 등장은 어린이가 느끼는 10개월 무렵의 어떤 모순과 괴리에서 비롯된다. 성인의 언어생활이 자신과 다르다는 점을 지각할 때 그것을 단순히 모방하려 애쓰기 보다는 크레올어처럼 자신만의 언어를 형성해 나가는 유아의 말이다.
23 감각적 운동활동이 전면에 등장하는 1세와 비교해 볼 때, 유년기 초기에는 원시적 말의 바다 속의 섬같은 어른의 말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어린이와 환경의 모순은 필연적인가?
새들에게 날개가 본능의 토대라면, 어린이에게 미분화된 뇌의 토대는 고도의 사회적 상황이다. 본능과 환경의 문제에서 인간은 고도의 사회적 상황과 신체의 잠재성을 토대로 한다.
34 유기체적 주기는 원이나 타원보다 나선에 가깝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이 흘러도 발달에 위치하는 지점은 일단 달라진다. 그리고 동일한 지점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어린이의 연령이 높아질 수록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연령에 따라 발달 속도는 다르고 연령이 높을 수록 속도는 느려진다-> 그런데 왜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사람들은 말할까? 느림을 측정하는 외부적 계기인 시계 초침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그 양적인 증가에 압도당하는 것일까? 느린 발달을 나이가 든 노년에도 지속으로서 체험하는 것은 가능할까?
35 다섯 살에서 어른까지가 한 걸음의 시간 폭이라면, 태어나서 다섯 살은 상상 못할 존재의 속도감을 체험하는 시기이다.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은 내재하는 본능인가? 특수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교육된 것일까? 배아에서 신생아가 되기까지는 심연이다. 무에서 배아까지는 불가사의만이 남는다. 결국 존재와 무에서, 무한정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질수록 속도는 무한에서 탈주한다고 볼 수 있나? 첫째 인희는 둘째 성연이에게 얼마나 놀라운 생명체일까? 비슷한 듯 하면서도 존재의 수준이 다름을 절실히 인식할 것이다. 인희에게 엄마와 아빠는 이제 그리 넘사벽의 존재가 아닐 것이다.
1-6발달의 내적 구분과 연대기적 연령 구분은 일치하지 않으며, 동일한 연대기적 1년이 어떤 발달 지점에 놓이는가에 따라 발달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유클리드적 접속이 1.리만 다양체에서 발현되는 방식과 유사할까?
36 1-9인격의 각 측면들은 불균등하고 불균형하게 발달된다. 비주류에 속해 있던 발달기능이 전면에 등장해 튀어나온다는 점에서 균등한 전진에 대한 위반이 바로 발달의 참모습이다. (매클린 톡의 유전적 오류가 진정 유전을 추동한다. 깡귀엠도 질병이 건강성에 대한 담론을 새롭게 규정한다고 보듯이.-10월 단상)
1-9의 비고츠키가 스턴 학설에 대한 요약에서 서구 철학이 어떻게 시간에 앞서 공간적인 논의들을 우선시 하는가를 보여주는 듯 하다. 기초적 기능이 성립해야 고등 기능이 가능하다는 선형적 순차적 발달론이란 결국 어떤 특정한 공간론을 전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순서와 배치가 자유롭다 못해 임의적인 논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발달론이 바로 스턴의 균형적, 선형적 발달 이론의 토대일 것이다.
어린이의 문법적 언어사용은 외국인으로서 성인이 분석적 방식으로 배우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어린이는 자신만의 문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창조성을 서서히 고사시키는 환경으로 공교육과 사교육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10월 단상)
38 1-11 연령 단계 간의 이행은 발달 과정 자체를 수정하고 재구조화하면서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성을 일으킨다. 생성의 문제는 결국 발달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나?
39 실제 아동학적 연령과 여권적 또는 연대기적 연령을 구분하는 것이 첫 단계라면, 정상성에 대한 전제가 있는 것인가? 게젤에 대한 인용에서 비고츠키는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는가? 아니면, 전적인 수용을 인정하는가?
42 비고츠키를 보는 번역자들의 생각: 발달의 규칙성에 대한 토대로 통계적 상관성을 과연 비고츠키가 옹호할까? 통계는 토대가 아니라 상관성의 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고유성, 개별성에 대한 이해가 왜 통계를 고리 삼아 보편성과 규칙성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1-12의 논의를 검토해 본다면, 비고츠키가 말한 규칙성이란 일종의 제한적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성으로 확장되기보다는 담론을 위한 한시적 정거장으로서의 규칙성.(또 다시 실험의학에 대한 베르나르를 떠올리게 된다!-10월 단상) 통계적 상관성 보다는 아동학적 연령이 연대기적으로 규정된 경계 내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연결하는 규칙성이 있다고 본다. 이 경계는 역사적 시기, 사회적 조건, 어린이의 개별성에 따라 유동적이다. 1-11에서 인간 발달의 역사적 단계를 생물학과 지질학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생물학에 뛰어든 다윈이 탐독했다던 지질학자 라이엘과의 상관성은 오늘날의 세분화된 분과 학문의 잣대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10월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