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1장 8-20
설교제목 : 샘은 거기에 있다
증오의 힘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언제 날이 더웠을까 잊을 정도로 쌀쌀해진 날씨를 체감합니다. 요즘 본격적으로 가을을 맞이하여 축제들이 앞다투어 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한강 불꽃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축제의 분위기와는 상받되게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면전의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아름다운 계절을 만끽하다가도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은 마음 속에 ‘불온한 즐거움’이란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중동의 전쟁은 그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뿌리에게서 나온 비극적인 가족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른 형제의 갈등은 세월이 흘러 서로를 원수삼아 증오하며 전쟁을 불사하고 있습니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증오’라는 시에서 노래합니다.
보라, 시대에 증오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가꾸고 관리하는지,/
높은 장애물을 얼마나 사뿐히 뛰어넘는지,/
도약하며, 덮치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수월한지./(중략)
민족 때문이건, 밖의 다른 이유 탓이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뛰쳐나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 정의의 손을 뿌리치고 결국 앞서 나가는 것은
증오 혼자뿐./증오, 증오. /사랑의 황홀경으로 그 얼굴은,/ 일그러지고 만다./ (중략)/ 오직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증오만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
영리하며, 재기가 넘치는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하구나./
증오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만들었는지 꼭 헤아려 보아야 할까?/
두꺼운 역사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장이 할애되었는지, 셈을 해보자./ (중략)
증오는 대비의 명수,/ 소란과 정적./ 새하얀 눈 위에 붉게 물든 발자국./
구겨진 희생자 위에 단정한 살인자의 무표정한 안면은,/
증오가 결코 싫증 내지 않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증오는 새로운 임무에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다면 끝까지 끈질기게 기다린다./
사람들은 증오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증오가 장님이라고? 천만의 말씀./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 오로지/ 증오뿐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최성은 옮김, <끝과 시작>, 오마이뉴스, ‘우리 모두가 패배자다’ 2024년 5월 8일, 재인용]
전쟁의 동력이 탐욕이라면, 전쟁의 연료는 증오로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선동하며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합니다. 이 전쟁이 고상한 명분과 성전을 앞세워 많은 이들을 희생시킵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땅의 전쟁이 종식되고,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기도합니다.
잔치 날의 그림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보셨고, 약속하신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약속하신지 25년의 세월이 흘러, 백세의 노년의 나이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백이라는 숫자는 모든 완성과 개성화의 목표가 완성된 의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결국 어떤 삶의 정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목표가 완성됨을 시사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웃게 하시고 기쁨을 주었다는 의미로 이삭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삶의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과 미래를 열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자아의 계획과 능력이 아니라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개입이 새로운 변환과 미래를 초래함을 마음을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이가 젖먹이의 삶을 청산하며 다가올 삶을 축복한다는 의미와 그간 아이가 죽지 않고 성장한 것에 대한 감사를 담아 큰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날의 기쁨도 잠시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목격합니다. 사라는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몸종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감히 자신의 아이를 놀리며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아브라함에 말합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10).”
흥겹고 즐거운 날의 이면에 드러난 갈등입니다. 위기와 갈등은 축복과 번영, 성공에 도취된 상태에서 곧바로 본색이 드러납니다. 잔치 날에 싸움이 더 벌어질 위험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한껏 잔치상이 벌어질 때 배다른 형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사라는 지배욕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몸종에 대한 그림자 투사가 시작되고 집안 전체를 조정하려는 지배욕과 아들의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탐욕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로부터 가족의 갈등은 첨예화 되었습니다. 잔치날의 기쁨과 큰 성취와 자랑은 무의식 속에 있는 지배욕을 가중시켜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의식이 고양될수록 아래로부터의 무의식적 힘이 배열됩니다. 잔치날의 이면에 위험한 무의식적인 힘이 더 큰 세력을 얻을 수 있는 위험한 순간임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
아브라함은 이 일로 몹시 괴로워합니다. 이스마엘로 엄연한 아들인데, 그 어머니와 그를 내쫓는다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내보내도록 하고 여종의 아들로 네 아들이니 그 아들로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먹을거리와 물 한가죽 부대를 챙겨주고 떠나보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빈들)에서 정처없이 헤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몹시 괴로운 중에 떠나보낼 수는 있었겠다 싶지만, 과연 그런 선택이 최선이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가엾은 모자는 꼼짝없이 죽음으로 내몰리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간청대로 모든 일이 처리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나 비정함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스위스에 블랙마돈나가 모셔 있는 성 마인라트 채플이 있습니다. 그 채플의 천장 벽화에는 아브라함의 발 아래로 연결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제시합니다. 한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너무나 다른 길로 발전하여 오히려 큰 갈등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팔레스틴 지역에 헤즈볼라 기지를 폭격하여 가엾은 아이들까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하나였지만, 미워하고 점유하려는 가족사의 비극은 세대를 걸쳐 고통은 멈추지 않고, 무자비함으로 서로를 제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비정함이 낳은 비극적 역사일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정처없이 광야을 배회하면서 물도 떨어지고 이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아이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습니다. 들어주는 이 하나도 없지만 설움과 비탄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울음을 듣고 깨어났는지 이스마엘도 함께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울음이 아이에게 전염된 것이죠! 빈들에게 처절하게 울던 모자의 울음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의 이름을 부르며 말합니다.
“하갈아, 어찌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17-18).”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물밖에 남지 않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낭떠러지의 순간에 하나님은 가장 큰 희망으로 다가오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라고 일러주십니다. 자신의 미래를 보듬고 달래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내일의 희망마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눈물 속에 통곡하며 자포 자기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아이만큼은 내려놓아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희망을 안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의 희망을 안아 일으키라는 그 말씀을 우리안에 품고 고단함 속에서도 명랑함을 가지고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샘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은 이어서 하갈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때 하갈은 샘을 발견합니다. 마실 물조차 없이 모든 생명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하갈의 눈을 뜨게 하자 하갈 곁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없던 샘물이 마술처럼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샘은 거기에 있었지만 하갈의 눈에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늘 곁에 거기에 있어도 무의식성에 빠지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절망과 상황에 한탄하며 원망 속에서 주저 앉아있으면 곁에 생명의 물이 있음에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미 샘은 가까이 거기에 있음에도 목마름에 신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려는 이유는 눈뜨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과 접촉이 일어나면, 내가 누군지가 발견되고, 흐릿하게 모든 것이 안개처럼 가리웠던 문제의 해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끔 내담자들을 만나면, 어떤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극적으로 무언가 달라지길 기대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환경을 원망하고, 삶의 비루함을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 모두 닫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 자신의 삶의 근저와 자신 안에 샘물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샘이 자신 안에, 곁에 있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설움에만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감옥에 갇히면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샘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눈을 다시 뜨고 샘이 곁에 가까이 있음을 발견하여 다시 목마름이 해갈되어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 샘이 되어줄 수 있는 복된 인생길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