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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金堤 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노령산맥의 서단부 모악산(해발 792m)의 서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고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여 대사구, 봉천원구, 광교원구 등 세구역의 삼원체제 가람으로 125동의 건물을 갖추기도 하였으며, 2007년 발굴조사에서 봉천원구인 왕사각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섭불: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로 전 부처님 즉 과거칠불 가운데 제 6불에 해당한다. 또 현재 현겁에 일천불이 출현한다고 하는데 그 중 세 번째 출현한 부처님이 바로 가섭불이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창건이 아닌 중창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에서 순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동안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참회하는 망신참(亡身懺)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가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고,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1598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 대공전(大恭殿), 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으나, 선조 34년(1601)에 시작하여 인조 13년(1635)에 재건이 되었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 대적광전(보물 476),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 5층석탑(보물 215), 6각다층석탑(보물 27), 석련대(石蓮臺:보물 23), 석종(石鐘:보물 26),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이 있다.
금산사 일주문
일주문 편액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선생이 쓴 글이다.
모악산에도 가을이 찾아오고..
당간지주(幢竿支柱)
금강문 바로 옆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기단석과 간대(間帶)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고 있다.
금산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앞 마당
대적광전(大寂光殿)
금산사 가람의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시는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으로도 불린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대적광전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조선 중기 건물로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어 보호하다가 화재로 소실되자 1987년 1월 1일 지정을 해제하였다.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그런데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편액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썼다.
그 밖에도 황욱의 글씨로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大華嚴寺)’와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중앙의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비로나자불
금산사 미륵전(彌勒殿), (국보 제62호)
대적광전 앞마당 왼쪽에는 국내에 유일하게 보존된 3층법당인 미륵전이 보인다. 이 미륵전은 겉으로는 3층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한 것이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많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주존불로 모셨고,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된 후 복원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높이가 11.82m나 되는 미륵 본존불
금산사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827호)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는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에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 상을 모시고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지었는데, 미륵전을 지은 후 정팔각 원당형의 목탑(木塔) 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조 13년(1635)에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바꾸고 대장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지붕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신라시대 목탑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내부 3면의 벽에는 모두 10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이야기들을 표현했다.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 그것이다. 또한 외벽의 좌우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지붕 꼭대기, 탑의 상륜부 장식이 있는데
원래 이 건물은 목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석등(石燈), (보물 제828호)
대장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석등은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석등은 오랜 세월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 역할을 하고 있다.
석등의 지붕돌 일부가 파손된 모습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인데, 높이 1.67m, 둘레 10.3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하대(下臺), 중대(中臺), 상대(上臺)의 양식을 정연하게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지름은 1.9m이다.
지대석은 매몰되어 보이지 않고, 하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있으며 그 안에 사자상이나 화문이 새겨져 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하대석의 윗부분에는 12면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에도 안상이 있고 그 안에 꽃봉오리가 들어 있다.
상대석의 둘레에는 12변씩 이중으로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윗면의 중앙에는 2개의 사다리꼴 구멍이 파여 있다. 이 구멍의 크기는 윗변 20㎝, 아랫변 24㎝, 빗변 26㎝이며, 깊이는 52㎝이다. 이 공혈로 보아 금산사 석련대는 거대한 석불 입상을 세워 두었던 좌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자리인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워낙 커서 이동시키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여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후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있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있던 불상은 새로 지은 다른 전각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련대는 8세기 말~10세기 초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대석 둘레에 조각된 연꽃무늬
육각 다층석탑(六角 多層石塔), (보물 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한 이 탑은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의 석탑이다.
본래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광명전(대적광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추정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아름답고, 옥개석의 섬세한 조각기법 등 고려시대 공예탑의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 이 탑에는 층마다 탑신이 있었으며 육각의 모서리마다 풍경(風磬)이 달려 있었으나 지금은 맨 위의 2개 층의 탑신과 11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노주(露柱), (보물 제22호)
대적광전의 오른쪽,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 그 용도를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는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 초기의 조성 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사 나한전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오층석탑, 사리탑(舍利塔 : 석종형 부도)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는데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그 앞에는 오층석탑이 서 있다.
방등계단은 원래 계를 주는 수계법회(受戒法會) 때나, 계를 설할 때 사용하는 단(壇)으로 수계받는 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김제 금산사,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 이 계의 정신이 어디에나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형태는 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돌로 만든 2단의 기단 위에 넓은 사각형의 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세워 놓고 있다.
방등계단에 있는 오층석탑과 뒤편의 석가모니 사라탑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방등계단 위에는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이 오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하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협소하고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의 추녀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등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 부분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다.
사리탑(舍利塔 : 석종형 부도)
석가모니 사리탑인 석종형 부도 꼭대기에는 용두(龍頭) 아홉 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구룡 출현을 표현한 것이다.
용머리 위에는 앙련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복발과 보주를 얹었다.
부도의 기단 모서리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자의 머리를 조각하였다.
기단의 각 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부도탑 옆에 있는 적멸보궁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해지고 있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招提,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첫댓글 역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