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 환호 · 눈물 … 90만 모인 광화문 시복 미사 |
| 함께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90만 모인 광화문서 시복 미사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 구름인파가 모여들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개차로 갈아타고 모습을 드러내자 이들은 환호와 눈물로 맞이했다. 세월호 유가족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We want the truth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기다렸고, 교황은 차에서 내려 그들의 손을 맞잡았다. - 중앙일보 [Wide Shot] 최정동 기자 2014.08.16 |
교황, '평화·화해' 남기고 출국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5일간의 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18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대한항공 특별기를 타고 출국했다. 이날 오후 1시쯤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약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한국시각으로 19일 0시45분(현지시각 오후 5시45분)쯤 이탈리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환송식에는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희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리, 조태용 외교부 1차관 등 정부인사들과 강우일 주교, 염수정 추기경 등 천주교 인사들이 참석해 교황을 배웅했다. 교황은 비행기로 이어지는 트랩에 들어서기 전, 정 총리와 정 신부와 포옹을 하기도 했다. 이어 '파파'(교황)를 외치는 취재진을 향해 뒤돌아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든 뒤 비행기로 향했다. 앞서 교황은 이날 오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국내 12대 종단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가진 뒤 박근혜 대통령과 천주교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와 화해의 미사'를 집전했다.
천주교 신자와 시민들은 교황을 보기 위해 서울공항으로도 모였다.
오전 10시쯤 서울공항 주변에는 250여명(경찰 추산)이 모여 교황을 기다렸다. 한 어린이는 '교황님 사랑해요'라는 문구와 교황을 직접 그린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교황을 기다리던 이상호(63)씨는 "'명량'이 인기를 끄는 등 우리 사회가 진정한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에 맞서 99%의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는 교황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떠난 뒤 만난 김수진(32·여)씨는 "항상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돌보라는 교황님의 가르침을 아이에게 직접 느끼게 하고자 교황님을 뵈러 왔다" 며 "11시부터 기다렸는데 교황님이 손을 흔들며 순식간에 지나가셨다" 고 아쉬워했다. 한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 신부는 "이번 교황 방문 행사가 무리 없이 잘 진행돼 교단 내부에서도 상당히 고무돼 있다" 며 "교황 출국 이후 평가작업 및 교단의 방향에 대해서도 점검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 중앙일보 2014.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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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교황 떠나시고 맞는 아침은
교황이 우리 곁에 머무신 요 며칠은 행복했다. 아늑했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 험한 세상을 바라보듯 해맑고 안온했다. 마음의 의탁이란 이런 것인가. 이성의 촛대만 붙들고 있는 식자나 신은 만들어진 것이라 애써 믿는 무신론자는 초월적 존재에게 마음을 의탁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자신을 책망하고 이성의 결핍을 탓한다. 하루가 멀게 터지는 새로운 사건에 넋이 나가고 온갖 일들이 서로 엉켜 지독한 분쟁에 휘말리는 우리들 한국인의 삶이기에 더욱 그렇다. 굳이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필자에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달랐다.
빈자의 대부, 힘들고 아픈 사람에게 우선 다가서는 그분은 본질과 멀어진 이 시대에 그 잊힌 고향으로 귀환하는 성자였다. 세상과 등진 채 나 홀로 수양하는 여느 종교인들과는 달리 세상사의 한복판에서 소탈한 행보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자본주의의 탐욕에 거침없이 일침을 가하는 일상적 현인(賢人)이었다. 사회적 주변인들에게서 예언자적 증거를 찾는 그분의 영성에 역사와 정치를 가르는 경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세계 12억 교도들을 은총의 약속으로 이끄는 성자의 자세와 동선(動線)은 지극히 소박했다. 그 동선을 따라 인간 중심의 신천지로 진입했던 요 며칠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의 우환을 그분이 대리한 탓이다.
오늘 밝아온 아침이 어제와 다를 리 없건만 그분이 떠난 빈자리가 유독 큰 것은 이제 남은 자의 의무가 절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혼자 가시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세월호 유족들, 강정마을 주민, 쌍용차 해고 노동자, 밀양 송전탑 주민,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받은 위안과 감동의 메시지에 보답할 아주 각별한 각오를 다질 시간인 것이다. 박해, 전쟁, 시련으로 얼룩진 한반도의 어둠이 ‘불멸의 희망을 품고 있는 아침의 고요함에 자리를 내주었듯’ 이제 두려운 고통의 통로에서 서로를 지켜나갈 불멸의 등불을 켜라는 교황의 준엄한 훈령을 새기는 아침이다.
교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배인 풍요로운 문화와 비장한 미학에 관한 찬사로 방문기를 시작했지만 한국이 더 이상 고요한 나라가 아님을 안다. 로마교황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극동의 작은 나라를 방문지로 내디딘 것은 한반도가 품고 있는 역사적 경험의 보편적 의미 때문이다. 지난 150년 동안 인류 역사를 들끓게 한 이종(異種)의 격류들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친 곳, 많은 사람이 그 와류를 헤쳐나갈 용기와 마음의 안식처를 천주에게서 구했다는 사실은 한반도가 갖고 있는 각별한 위상일 것이다.
조선은 유례없는 ‘박해의 땅’이었다. 2만 명의 신자가 참수됐다. 조선은 ‘고난의 땅’이었다. 제국통치에 36년을 신음했다. 한국은 ‘분단의 땅’이다.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민족은 갈라섰다. 한국은 ‘기적의 땅’이다. 잿더미에서 최고의 경제 기적을 일궜다. 박해, 고난, 분단, 기적의 격류를 모조리 겪은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는가. 19세기 말, 고요했던 아침의 나라가 세계 현대사를 수놓은 모든 종류의 격변을 통렬하게 겪을 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그런 땅에서 수백 년 살아온 한국의 선남선녀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교황이 발한 단어들이 더 가슴 깊숙이 와 박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말이 향기롭고 글이 아름다운 것은 위대한 문학 이상이었다. 절망의 해독제는 교황 자신이었고 교황의 손짓, 표정, 걸음, 그리고 온화한 미소 그것이었다. 세월호 유족들의 울음이 교황의 품 안에서 비로소 승화됐다. 실업자, 미취업 청년, 노약자, 병자와 장애인의 아픔이 그의 손길로 소리 없이 스러졌다.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현존을 성모께 의탁하는 그 순간 교황과 서민들은 은총의 세계에서 얼싸안았다. 축복이 따로 없었다. 축복의 화신이 우리 곁에 계셨던 요 며칠은 그래서 행복했고 아늑했다.
그런데, 꼭 이랬어야 했는가.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분에게 우리 내부 문제까지 의탁 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는가. 꼭 그의 말과 품을 빌려 우리의 분노를 잠재워야 했는가. 사회를 끌어가는 정치인, 종교인, 명망가, 지성인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말을 그에게서 듣고 싶어 할 만큼 우리의 정신세계는 빈곤했나. 그는 분단의 땅, 갈등하는 현실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세계화로 조각난 분열의 상처를 연대의 실천으로 치유하라는 전언을 남기고 떠났다. 영원한 치유는 우리의 것으로 남는다. 요 며칠 교황께 의탁했던 마음을 되돌려 받는 아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내게 묻는다. 불명확했던 그 숙제가 이제 조금 형체를 드러내는 것도 같다.
-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2014.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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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교황의 메시지, 이 땅에 실천하려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일정 중 가장 큰 행사인 시복 미사가 16일 성대히 치러졌다. 행사가 진행된 광화문 일대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다. 교황의 강론에 귀 기울이며 기도하는 가톨릭 신자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슬픔과 비통을 치유받으려는 이, 풀리지 않는 억울함과 고통을 호소하려는 이도 많았다. 특히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이 교황에게 직접 아픔을 호소한 것은 정상적인 절차로선 도저히 해결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 아닌가 싶다. 교황의 축복에 감동하면서도 내부의 갈등과 고통을 좀처럼 풀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자정 능력의 부재를 실감케 한 현장이었다.
교황은 강론에서 평화, 화합, 정의, 인간가치 등을 강조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 대해선 매우 강한 표현을 썼다. “막대한 부요(富饒)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라는 표현이 그렇다. 이미 전날의 강론에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며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 촉구한 바 있다.
이제 우리에겐 교황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 남았다.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달래주는 일, 우리 사회에 평화와 화해가 자리 잡도록 하는 일 말이다. 물론 교황이 며칠 머물렀다고 뿌리 깊은 갈등과 상처가 단숨에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교황을 전지전능한 구원의 메시아로 보는 것도 적절치 않다. 우리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도층과 정치권이 이 점을 통렬하게 인식해야 한다. 당장의 정략적 구도에서 벗어나 고통받고 있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국민 개개인 역시 저마다의 위치에서 본분을 충실히 다할 필요가 있다. 교황은 그런 노력에 대해 조언하고, 격려하고, 축복해 주는 존재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교황에게 크게 의지하는 셈이다.
문제는 일각에서 교황 방한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점이다. 교황의 방한과 말씀이 누구에게 유리하다느니, 누구에게 불리하다느니 하며 정치적 계산을 하는 행위야말로 교황의 메시지에 어긋난다. 교황은 어느 한 편만 들어주는 분이 아니다. ‘나만을 위한 교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 위, 좌우가 모두 교황의 관심사다. 사적이고 편향적인 이익의 잣대로 교황의 뜻을 해석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요, 아전인수(我田引水)다. 역사적인 교황 방한의 의미를 이 땅에 살리려면 모두들 자성해 공동체적 가치 실현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교황이 촉구한 ‘연대의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 중앙일보 [사설] 2014.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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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주교단과의 만남 · "대화가 독백 안 되려면 다른 사람 받아들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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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내 마음속으로 오라는 것 … 그래야 듣게 되고 마음도 보게 돼""대화가 독백 안 되려면 다른 사람 받아들여야" … 연단 내려와 즉석 연설
프란치스코 교황은 17일 충남 해미순교성지 소성당에서 열린 아시아주교단과의 만남에서 ‘공감’에 방점을 찍었다. 교황은 “진정한 대화는 공감(empathy)하는 능력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소통 방식도 제시했다. “공감하고 진지한 자세로 수용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의식하고 다른 이와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대화의 출발점이다.” 이어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 피력했다.
아시아주교단과 만나는 첫 장면부터 그는 ‘소통’을 향했다. 교황은 제단 아래로 성큼 내려왔다. 주교들과 같은 눈높이가 되자 비로소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 도중 연설대가 ‘쿵’하고 무너졌다. 그는 “내 연설이 무너졌다”고 농담했다. 주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공감의 순간이었다. 분위기는 부드럽고 메시지는 묵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상대방이 하는 말만 들어선 안 된다. 말로 하지는 않지만 전해오는 그들의 경험·희망·소망·고난과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둔 걱정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교황이 주교들에게 주문하는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이었다. 소통이 목마른 대한민국에는 공감하고, 공감하고, 또 공감하라는 교황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여기서부터 교황은 원고 없이 즉석 연설을 이어갔다. 15일 아시아 청년들과 만날 때도 원고를 치우고 즉석 연설을 했었다. “마음을 닫으면 대화를 할 수 없다. 대화는 ‘우리 집에 오라. 내게 오라’는 거다.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듣기 위해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걸 열어서 볼 수 있다.” 교황은 이 말을 하며 심장이 있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아시아 주교들을 향해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모든 양 하나 하나를 사랑하는 목자”가 돼 달라고 기도했다.
앞서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100만 인파를 향해 교황은 시복미사 강론에서 ‘사랑의 힘’을 강조했다. “순교자들의 승리, 그건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 이라며 “당대의 엄격한 사회구조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시켰는데 (순교자들은) 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해미읍성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대통령 전용 열차를 타고 귀가했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강한 바람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안전을 생각해 기차를 택했다” 며 “짧은 기차였지만 매우 편안하게 돌아왔다”고 했다.
- 중앙일보 교황수행기자단=고정애 특파원 2014.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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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오늘 방한 · "내 탓이오" 대한민국의 고해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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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오늘 방한 · 상처 다 드러내고 기도합니다
세월호 참사, 윤 일병 사건…갈라진 진보·보수, 분단 상처큰 병 앓는 이 땅에 오신 교황 치유는 우리 자신의 몫
25년(요한 바오로 2세 방한 이후) 만의 고해(告解)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오전 10시 30분 한국 땅을 밟는다. 염수정 추기경은 13일 교황 방한 축복식 강론에서 “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큰 기쁨이자 축복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어깨는 그 앞에서 출렁인다. 고해성사는 자신을 토해내는 일이다. 내 안에 박힌 상처와 아픔, 온갖 싸움의 파편을 드러낸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세월호 참사 때 우리 모두 울었다. 아직 울음은 솟아난다. 광화문광장의 유가족 농성은 시복식 와중에도 계속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가슴은 지금도 피를 흘린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남북 분단의 상처에는 딱지가 앉을 줄 모른다. 보수와 진보로 쩍 갈라진 두 진영은 끊임없이 딱지를 떼내며 싸움을 재생산한다.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쌍용차 해고자 등 이런저런 해법을 둘러싼 갈등의 골은 아득하기만 하다.
최근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으로 군대 문화의 야만성이 드러났다. 하나가 되기보다 둘이 되고, 이웃이 되기보다 적이 되기를 바라는 게 우리의 민얼굴인가. 그 앞에서 대한민국의 어깨가 들썩이는 이유다.
사람들은 말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서로 멱살을 잡고 죽기 살기로 싸운다고. 여와 야가 그렇고, 보수와 진보가 그렇고, 낮은 자와 높은 자가 그렇다. 공존의 화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싸움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식이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이 앓는다. 피가 돌지 않고, 기(氣)가 흐르지 않는다. 사회의 동맥경화를 해소할 리더십은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나침반이 필요하고, 이정표가 필요하고, 등대가 필요하다.
하소연하고 싶은 참에, 기대고 싶던 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다. 앞 다투어 손을 내민다. 내 병을 고쳐주시오, 내 상처를 쓰다듬어주시오. 내 문제를 풀어주시오. 애원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만능 열쇠’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대한민국 고질병을 수술대에 올리는 건 교황의 몫이 아니다. 교황은 그 위에 흐르는 메시지를 풀어놓을 뿐이다. 교황에게 우리의 숙제를 대신 풀어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다.
교황 방문 메시지는 대한민국 소통과 화해
2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에서 파격적인 고해성사를 한 적이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교황은 일반 사제에게 달려가 고해성사를 했다. 예전에도 그런 교황은 없었다. 무릎까지 꿇었다. 나의 권위, 나의 입장, 나의 분노, 나의 이해를 내려놓지 않고서 인간은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
국가 개조를 말하며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수술을 하려면 먼저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를 향해 이미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옵니다!” (라틴어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가톨릭 미사 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는 말이다. 가톨릭 신자의 고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고해로 들린다. 취업난과 세대갈등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의 애환에 얼마나 눈을 돌렸던가. 이주 노동자와 미혼모 등 사회적 소수자에게 우리는 얼마나 각박했던가. 나의 입장, 나의 신념, 나의 진영을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상대를 해쳤던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너의 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그건 전체의 눈이다. 그 눈을 통해 대한민국을 보자. 내가 뿜어냈던 독, 내가 휘둘렀던 칼이 결국 어디를 향했을까.
경희대 송재룡(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도 그렇고, 국가나 사회 현안을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도 절충이나 협상보다 갈등에 무게가 실린다. 소통과 화해를 강조하는 교황의 메시지가 반목과 대립 중심의 갈등 패턴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의 몫이다. 대한민국의 몫이다. 4박5일 방한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안겨줄 메시지는 값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교황 방한을 디딤돌 삼아 대한민국이 성숙하기를.
◆ 고해성사(告解聖事) =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가 지은 죄를 뉘우치는 의식. 신부(神父)에게 죄를 고백하고, 신부가 부과한 적절한 보속(補贖·죄를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일)을 행함으로써 용서받는다.
- 중앙일보 백성호 · 이정봉 기자 / 사진=일러스트 박용석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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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 “비바 파파” (Viva Papa · 교황 만세)!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린이의 이마에 다정스레 입을 맞췄다. 미래의 싹을 보듬는 몸짓으로 그는 이 땅에 대한 희망의 기도를 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온 90만 명의 가톨릭 신자와 시민은 따뜻한 사랑을 보여준 그에게 환호로 감사를 표시했다. 이날 충북 음성군 ‘꽃동네’에서 그의 품에 안긴 이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순교자 124위(位)에 대한 시복 미사에서 자유·정의·화해를 강조한 교황은 17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에 대한 세례식으로 치유의 행보를 이어간다.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로 4박5일의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는 교황은 대한항공 전세기 편으로 바티칸 교황청으로 돌아간다. | |
| 우리 곁에 선 프란치스코 … 서소문 성지 방문, 시복 미사 집전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미사에서 윤지충(바오로)을 비롯한 124위의 걸개그림이 공개됐다. 그림 제목은 ‘빛을 여는 사람들’로 복자들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 또는 십자가를 들고 있다. 그림은 김영주(이멜다) 화백이 그렸다. |
순교 성지서 신자 500명과 일일이 악수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려고 모인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90만 명(경찰 추산)에 달했다. 8월 16일 시복식 미사가 치러진 서울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교황은 이날 오전 9시 서울 중림동의 서소문 순교성지 참배를 마치고 광화문에서 2시간 가까이 시복식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직전 사방이 뚫린 차량을 타고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며 30분 동안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울고 웃으며 교황을 맞았다.
“윙크하며 제 손을 꼭 잡아주시는데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너무 기뻐서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뒤편에서 쪽방공동체를 운영하는 김주미(55) 원장은 쪽방 사람들 열댓 명과 함께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앞 첫째 줄에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손을 붙잡는 교황의 미소에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인천에서 온 백발의 이단규(83) 할머니도 “성당에서 날이 더우니 노인들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슴이 쿵쾅거려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항상 낮은 곳을 살피시는 교황을 꼭 뵙고 싶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려운 시대 … 말 없어도 진심 통해”
서소문 순교성지와 124위 시복미사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세월호 침몰과 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으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교황의 미소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온 조계숙(51)씨는 “약한 사람을 다독여주시는 모습에서 깊이 감명받았다”고 했다. 시민 배창섭(54)씨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영웅이 절실한 시점이다. 곧 한국땅을 떠나 시겠지만 긴 여운을 남기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교황의 미소만으로도 위로받은 사람도 많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광화문에서 미사를 올리던 최미순(53)씨는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 아니겠는가. 교황님을 보면 ‘저분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교황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8월 16일 오전 서소문 순교성지에서는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 그들의 손에 입을 맞췄다. 신자 500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셀카’ 촬영에도 응해줬다. 누군가 어린 아이를 들어올리면, 그 말랑말랑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양탑 앞에서 참배를 마친 교황은 검은색 ‘쏘울’ 차량으로 서소문로를 통과한 뒤 시청 앞에서 사방이 뚫린 차로 갈아탔다. 서울시청 앞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1㎞ 구간에 양방향 두 개 차로를 제외하곤 모두 사람이 들어찼다. 교황은 도보 속도로 달리는 차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종종 멈춰 서서 아이들의 이마를 짚어주기도 했다.
광화문광장을 한 바퀴 돌아 세월호 피해자 가족 400명 앞에 다다르자 교황은 차에서 내렸다. 34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영오(57·고 김유민양의 아버지)씨의 손을 맞잡았다. 김씨는 교황의 손에 입을 맞췄다. 이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세월호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교황에게 부탁했다. 교황은 손을 놓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뒤 김씨가 건넨 노란 종이의 편지를 받아 우측 주머니에 넣었다. 김씨는 교황의 옷깃에 꽂힌, 세월호 희생자 추모의 뜻이 담긴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가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세워줬다. 교황 시선 너머로 ‘We want the truth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철저한 진상규명’ 등의 문구가 적힌 노란 수건들이 겹겹이 펼쳐졌다.
차에 오른 교황은 잠시 침묵했다. 차가 출발하자 교황은 다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30분의 퍼레이드를 마치고 붉은색 제의로 갈아입은 교황이 단상에 올랐다. 붉은색 제의는 순교와 피, 성령을 상징한다.
시복 대상 124위도 평신도들
이날 오전 시복식을 통해 복자(福子) · 복녀(福女)로 추대된 124위는 대부분 평신도다. 교황이 직접 순교자의 땅을 찾아가 시복식을 집전하는 경우는 전례가 드문 일이다.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확산된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교황이 기리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시복 강론에서 교황은 “순교자들이 선택한 종교(천주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과 순교자들의 연대 의식”을 언급하며 “순교자들의 유산은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영감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와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중림동 약현성당 이준성 주임신부는 “순교 정신은 자유와 사랑, 평등에 바탕을 하고 있다. 순교에는 양심의 자유와 모든 사람을 품는 나눔의 사랑, 신분제를 뛰어넘는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며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뻐했다. 천주교 선구자인 이승훈(베드로)의 후손 이태석 신부도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터를 찾은 것은 그들의 순교가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천주교라는 큰 숲이 조성되기까지 보통의 평신도들이 씨앗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교황의 사랑에 신자들은 감동으로 화답했다. 광화문에서 새벽 1시부터 교황을 기다렸다는 서지윤(29)씨는 “서민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교황의 모습을 조금 더 앞에서 보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아이 입에 손가락 넣는 장난도
교황은 이날 오후 충북 음성 꽃동네를 찾아갔다. 그는 몸이 불편한 이들을 일일이 끌어 안고 쓰다듬었다. 80명 가까이 됐지만 한 명 한 명을 살폈다. 한 어린이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 어린이의 입에 넣어 보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는 꽉 끌어안아 자신을 만지도록 하고,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는 양 볼을 감싸주기도 했다. 얼굴을 들이밀면 볼을 맞댔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웃던 교황은 시복미사 때에는 엄숙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 누구보다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산 정약용의 직계 종손 정호영(54)씨는 “교황은 유쾌하면서 동시에 진지한 분이다. 원칙을 중시하고 또 그 원칙을 지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교황 방문 꽃동네서 기현상? … "태양 마구 돌아"
한편 이날 저녁 꽃동네에선 태양이 마구 도는 듯한 기현상을 봤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오후 6시10분부터 서쪽 하늘의 태양이 마치 좌우로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가던 신자들은 “태양 테두리의 빛이 20분가량 회전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밝아진 뒤 보랏빛을 띠며 좌우로 돌았다” 며 “교황 방문을 하느님이 축복하고 있다. 기적이다” 라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고 한다. 기상청 관계자는 “태양 테두리가 도는 현상은 기록된 적이 없고 이 같은 문의도 처음” 이라고 답했다.
- 중앙일보 | 유재연 기자, 박종화·차길호·황은하 인턴기자 | 201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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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곁에 선 프란치스코 … 세속과 신성 사이, 교황의 자리
16일 시복미사 제단에 오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에 ‘어부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를 새긴 은반지다. 교황의 오른손은 권력과 힘을, 넷째 손가락은 신앙 수호를 상징하기 때문에 모든 교황은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낀다. 왼손에는 목자를 상징하는 십자가 지팡이를 들었다. |
막강하지만 위험한 ‘직업’ … 암살된 교황 적어도 6명
스탈린은 교황을 깔봤다. 이렇게 물었다. “교황! 그가 거느린 사단은 몇 개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쓴 『제2차 세계대전』(1948)에 나오는 말이다. (교황에겐 사단은커녕 110명 ‘병력’의 스위스 근위대밖에 없다.)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가 오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교황이 통솔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 덕분인지 모르지만 소련은 결국 망했다.
교황은 막강하다. 종교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정치학자들이 인정하는 ‘국제정치 행위자(an actor of international politics)’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손잡고 공산주의를 패망의 길로 몰고 갔다.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 4일 칙서를 반포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기 ‘소유할’ 신세계의 경계선을 나누었다. 성 레오 1세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의 왕 아틸라와 협상해 그를 물러서게 했다. 서부 유럽을 구한 것이다.
중국이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하지 않는 천주교애국회를 만든 배경에도 교황의 이런 세속적 힘에 대한 우려가 있다.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쓰게 된다. 역사 속 가톨릭 교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세속의 여러 세력과 조우했다. 이상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게 교황이 할 일이다.
초기 교황 중 33인은 신앙 위해 순교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의 가톨릭은 민주주의 · 자유주의,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와 ‘싸웠다’. 한국 가톨릭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싸움 과정에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세속 이념이나 체제와 동맹 관계를 맺기도 하고 맞서기도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휴머니즘과 손잡고 물질만능주의와 싸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형식주의 · 관료주의 · 무사안일주의, 마피아와 싸운다. 중국은 교황이라는 존재의 이런 속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면 교황은 왜 강한가. ‘가톨릭 신자가 없는 곳은 없다’는 데서 오는 막강한 정보력, 가톨릭 교회가 세계 최고(最古)의 국제적인 조직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에서 나오는 힘’이 교황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가톨릭 · 정교회 · 성공회 신자들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에 나오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one, saint, catholic, and apostolic)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하나라는 게 제일 먼저 나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단일성’을 상징한다. 한국 ·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더 많다. 하지만 미국에서도(신자 수 7000만) 한국에서도(540만) 최대 기독교 교단은 가톨릭 교회다.
순교의 힘도 중요하다. 가톨릭의 초기 교황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당연지사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자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니까···. 300여 년 동안 33명의 교황이 순교했다. 초기 교황에 대해서는 변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전승에서는 그들이 순교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그노시스파 기독교인들은 ‘순교는 쉽다. 지식을 깨닫는 게 어렵다’라고 했다. 가톨릭 신앙의 선조들은 사자 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 교회 또한 순교자의 교회다. 조선 왕국은 당시 세계적인 문화 · 문명 선진국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죽인 게 아니라 ‘예수 · 마리아’ 신앙만 부정하면 살리려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경우에도 그랬다. 김 신부가 나라 밖 사정에 밝고 외국어를 구사하는 똑똑한 젊은이라는 것을 감안해 조정 일각에서는 그를 살리려 했다. 죽음으로 지키는 신앙의 대선배 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는 전승이 있는 초대 교황 베드로를 비롯해 솔선수범한 교황들이 서있다.
현 교황이 속한 예수회를 창립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에게 교회에 충성한다는 것은 곧 교황에게 충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에겐 적도 많았다. 266명의 교황들은 2000여 년 동안 교회의 ‘제도적 생존’(institutional survival)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교황이라는 직업은 아주 위험하다. 최소 6명이 교살 · 독살 등의 방법으로 암살됐다. 요한 바오로 1세를 비롯해 다른 13명의 교황에 대해서도 암살 의혹이 떠돈다.
가톨릭 교회는 신중하게 싸운다. 답답하리만큼 신중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해방신학 계열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려면 부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총을 들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적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한다는 비판을 듣는다. 비오 11세와 비오 12세는 교황들은 공산주의를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무솔리니 · 히틀러의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했다고 비난하는 역사가가 많다. (사실 교회는 조용히 유대인들을 구했다. 교회는 로마에서 3만 명, 유럽 전역에서 40만 명을 살렸다.)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에 대해서도 교회는 쉬쉬했다. 적당히 무마하려는 정점에는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세계는 이미 탈기독교(post-Christian)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교황 권력의 현재와 미래는 어떠한가. 모든 미래는 리더십에 달렸다. 미래는 리더가 ‘하기 나름’이다. 누가 리더가 되느냐도 중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반공’ 교황이었지만 바오로 6세의 경우엔 지나치게 ‘좌편향’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도 ‘개혁보수다’ ‘사회주의자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속의 보는 관점으로 본다면 교황도 좌파 · 우파 · 중도파가 있는 것이다.
한데 교황의 리더십이 항상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교황은 법과 여론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다. 그도 교회법이나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한다. ‘교황이 정하면 우리 신자들은 따른다’는 식이 아니다.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이 교황으로서 신앙의 진리를 말할 때엔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류성 교리를 선포하자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이 ‘복고 가톨릭 교회(Old Catholic Church)’를 결성해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교황이 영토를 지닌 세속 군주로서 전쟁을 수행한 때도 있었다. 이제 교황에겐 바티칸시국 외에 땅이 없다. 그래서 교황권이 더 강해진 측면도 있다. 동시에 교황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베네딕토 16세는 유럽연합 헌장에 ‘하느님’을 넣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그의 요청은 묵살됐다.
교황의 미래는 산적한 개혁의 성패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교황의 힘은 그가 선도한 개혁에서 나왔다. 만약 교황이 여성 사제 임명, 동성애 인정, 사제의 결혼 허용 등에 대해 전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진보 가톨릭 신자들은 환호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 가톨릭 신자들은 새로운 ‘복고 가톨릭 교회’를 설립할지 모른다.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직을 도입하고 동성연애자 주교까지 나오자 상당수 사제가 가톨릭 교회로 이동했다. 비슷한 일이 가톨릭 교회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교황도 상대적인 좌파 · 우파 존재
미래에도 세속의 힘은 교황을 위협할 것이다. (내부의 적도 있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보다 주교들 모임의 결정 사항에 더 큰 힘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 역사가·신학자·종교학자들도 교황을 위협한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펼친다. ‘베드로는 로마 교회를 창립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로마에 간 적도 없다. 갔더라도 로마 교회가 창립된 지 20년 정도 후에 갔다.’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성경적 근거는 희박하다.’(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도 이 주장에 동조한다.) ‘평균적으로 보면 미국 대통령들이 교황들보다 훨씬 바른 삶을 살았다.’ (『나는 왜 가톨릭 신자인가』를 쓴 게리 윌스의 주장)
교황의 역사에는 착한 교황, 나쁜 교황, 평범한 교황, 위대한 교황이 등장한다. 성인 · 천사 같은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색마(色魔) 같은 교황, 성직을 팔아먹는 돈 밝히는 교황도 있었다. 사기꾼 · 괴물 · 사이코패스 교황도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권력의 화신도 있었다. 그런 나쁜 교황들은 주로 르네상스 시대에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산데르 6세다. 그는 적어도 3명의 여인에게서 8명의 자식을 뒀지만 역사상 최고의 경세가(經世家) 교황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니터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체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리더십이 ‘권위주의적’인지 단지 ‘권위가 있는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나쁜 교황’ ‘무능한 교황’이 나오기 힘든 구조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교황은 가톨릭 교회를 마치 모세처럼 신자들을 인도했다. 레오 13세는 교회를 산업 시대로 이끌었다.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자들을 현대로 안내했다.
언젠가 로봇들이 인간과 똑같은 지성을 지니게 될 때도, 인류가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것 같은 난감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교회를 이끄는 교황들이 나올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만약 외계인이 있다면 교회는 외계인에게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 중앙일보 | 김환영 기자 | 201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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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특집 파노라마 · 〈보통 사람들의 교황, 프란치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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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사람들의 교황, 프란치스코 2014-08-14 |
공고 출신, 골초로 폐수술 … 잘 알려지지 않은 교황 이야기신학교 입학 뒤 미모의 여성 짝사랑까지 … 사제의 길 포기 고민
교황의 아버지 마리오 호세 베르골리오는 1929년 독재자 무솔리니가 싫어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왔다고 한다. 교황의 형제자매 5남매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 베르골리오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 온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장남이다. 교황의 어머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이탈리아 북부 출신이다. 이주노동자의 아들인 교황은 즉위 이후에도 이주노동자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올 초엔 ‘불법체류 혐의로 아빠가 감옥에 가 있다’는 멕시코 출신 열 살 여자아이의 편지를 받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청원해 석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교황은 초등학교 시절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 다니는 살레시오(돈 보스코) 학교를 다녔다. 광주 살레시오고와 같은 재단이다. 요즘엔 세계 각국에 명문대 진학 준비를 위한 살레시오 계열 학교도 많다. 하지만 살레시오회는 본디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취업전선으로 내몰렸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교황 아버지의 고향인 피에몬테 지방의 토리노에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
교황은 공고(工高) 출신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27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화학을 전공한 교황은 졸업 후 흥미롭게도 한 연구소의 식당에 들어가 요리 일을 거들었다. 그래서인지 교황의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교황은 술집 문지기, 환경미화원 등을 전전했다.
골초였던 교황은 21세 때 급성 폐렴을 앓았고, 폐에서 낭종도 발견돼 생사를 넘나 들었다. 당시 오른쪽 폐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 지금도 후유증이 있다고 한다.
1955년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소(小)신학교(대학교 예과 격)에 입학한다. 교황의 어머니는 교황이 신학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교황이 사제품을 받은 69년까지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제품을 받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로부터 강복(降福)을 받았다.
한편 교황은 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삼촌의 결혼식에 갔다가 미모의 여성을 만난 뒤 짝사랑에 빠져 신부가 되는 길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제서품 후 스페인 · 아일랜드 · 독일 등지에서 활동한 교황은 영어 · 불어 · 독어 · 스페인어 · 이탈리아어 · 포르투갈어 그리고 우크라이나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우크라이나어는 살레시오 학교 재학 당시 교황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신부에게 배웠다고 한다. 교황은 사석에서 “외국어 중 영어가 가장 어렵다” 며 영어 울렁증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 중앙일보 | 박성우 기자 | 201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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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방한] 축구 · 탱고에 열광…이웃집 '보통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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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프란치스코의 삶
사춘기 땐 이웃집 소녀 짝사랑 … 공장 청소일 하며 집안 도와화려한 배경도 뛰어난 언변도 없지만 일상에서 묵묵히 '예수의 삶' 실천
프란치스코 교황은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제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되서도 자신의 평범함을 잊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교황의 비범함이다.
“그가 마흔 살이었던 무렵 다른 신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교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뛰어난 언변도 없었다.”
1970년대 후반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산 미겔 관구장이던 시절, 당시 교황보다 열 살쯤 아래였던 토마스 신부는 사제평의회에서 베르고골리오 관구장을 만났다. 토마스 신부는 베르고골리오 관구장이 눈에 띄는 사제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마요광장 인근의 주교좌성당 가까이서 장사를 하는 신문팔이 안드레스 씨는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의 교황 선출 뉴스가 나온 직후 취재를 나온 교황청 일간지 기자에게 “때로는 일반인 옷차림으로 와서 신문을 사갔다. 인사로 두어 마디 말을 건네는 매우 조용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보통사람 중의 한 사람처럼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분이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제266대 교황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이 선출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깜짝 놀랐다. 전통적으로 교황은 로마에서 공부하고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추기경들 가운데 선출됐다. 그러나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로마 유학은 물론 교황청 근무 경력도 없었다. 학문적으로 주목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교황을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한 예수회 출신에 남미 대륙의 추기경이었다.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에는 출생과 성장 모두가 평범함 그 자체였다. 서민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열세 살부터는 공장에서 청소일을 하며 집안을 도왔다. 학창시절부터 신부가 되겠다며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던 것도 아니다. 사춘기 즈음에는 이웃집 동갑내기 소녀를 좋아했고 아르헨티나 청년들이 그랬듯이 탱고와 축구에 열광했다. 10대 후반 영적 체험을 한 후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이 뛰어난 학생 축에는 끼지도 못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면서 교황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검약을 실천하며 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는 행보가 도드라지면서다. 무엇보다 그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교황의 평범함이다.
교황의 일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영웅설화’의 특별한 에피소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교황은 그저 사제로서 지켜야 할 직분과 사제가 따라야 하는 예수의 삶을 묵묵히 실천해 왔다. 범접 못할 공간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공간에서 말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거를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밀착 취재한 교황청 공식 일간지인 오세르바토레 로마노의 크리스티안 마르티니 그리말디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교황은 주변에 볼 수 있는 착한 이웃처럼 평범한 사제였다. 그 모습은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교황에게 배워야 할 비범함이 바로 그 평범함이다.”
▲ “젊은이 여러분! 일상의 본분에, 일에,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십시오! 여러분의 미래는 생애의 이 소중한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아는 데 달려있습니다 (2013년 5월 1일·성 베드로광장 일반인 알현에서)
▲“저는 나가서 걷고 싶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리가 부르는 ‘칼레제로,’ 거리의 사제였습니다”(2013년 7월 28일·기내 기자회견에서)
- 중앙일보 |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일러스트=문승용 기자 |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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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인구 61%지만 신자 12% … 외신들 집중 조명 … 취재진만 70명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순방에는 본지를 포함해 전 세계 유력 언론사 기자 70여 명이 동행했다. 교황의 취임 후 첫 순방이어서 주목을 받았던 지난해 7월 브라질, 그리고 언제나 세계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이 포함됐던 올 5월 중동 방문에 버금가는 규모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0년 영국을 방문할 때 취재진이 1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취재 열기가 뜨겁다. 교황청에선 “지난번 두 차례 방문 때보다 더 많은 120명가량이 지원했으나 70명으로 줄인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 언론들은 교황의 방한 의미를 집중 분석했다. 교황의 인기가 록스타와 비슷하다며 그를 ‘록스타 교황’이라고 칭한 AP통신은 “이번 방한 후 교황이 내년 1월 스리랑카 · 필리핀을 방문할 예정” 이라며 “아시아는 가톨릭의 미래” 라고 전했다. BBC방송은 “교황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아시아가 사실상 가톨릭 불모지인 점을 부각한 것이다. 전 세계 인구 72억 명 중 61%인 44억 명이 아시아에 살지만 가톨릭 신자 중 12%만 아시아인이며, 그나마 대부분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필리핀에 집중된 현실을 지적했다. 반면 한국은 1990년에 비해 가톨릭 신자 수가 두 배로 늘어 현재 540만 명에 달하며 매년 10만 명이 새로 영세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CNN방송은 “한국 교회가 작지만 세계에서도 강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게 이번 교황 방문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교황 순방으로 (한국의) 자생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선교가 가톨릭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에 교훈이 될 것” 이라며 “가톨릭 교회가 아시아에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외신들은 한국 가톨릭의 성장사도 다뤘다. 선교사의 선교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교회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70~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소개했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박근혜 대통령도 명목상으론 율리안나란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라고 전했다.
외신들은 바티칸의 대(對)중국 메시지에도 주목했다. 바티칸과 중국은 공식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다. 중국 공산당이 가톨릭을 포함해 종교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여서다. 이달 초에도 중국 정부가 기존 교회를 박해하고 자체적인 기독교단체를 만들었다는 보도로 가톨릭 교계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요한 바오로 2세가 84년과 89년 두 차례 방한했을 때 중국 영공을 피하고 러시아 영공만 통과했다. 통상 영공을 지날 때 교황이 해당 국가의 지도자에게 인사말을 내놓는 게 관례인 만큼 중국에 대해선 그런 게 없었다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러나 이번엔 중국 영공을 통과한다. 따라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메시지를 전할 가능성이 크다. 교황은 지난해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취임한 시 주석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한 가톨릭 신부의 말을 인용, “교황이 중국을 거쳐 여행함으로써 가톨릭에 호기심을 가진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며 “교황은 또 중국 정부를 향해 가톨릭이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만큼 가톨릭 교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 주려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 중앙일보 | 바티칸=고정애 특파원 |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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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고난 새겨진 · 서소문공원서 … 교황 '화해의 기도' |
[서울, 오늘의 기억 내일의 유산] ② 서울 순례길 28.42㎞ …
세계적 성지 옛 서소문 밖 … 성인 44위, 복자 27인 순교한 땅 16일 시복식 출발점으로 삼아한국 가톨릭 심장 같은 길 … 명동성당서 출발 절두산 성지로 김범우 집터, 시구문 등 유적지서울시 미래유산 곳곳에 … 대교구 교구청, 명동 주교관 별관 걸어서 15시간30분 힐링 코스로
16일 광화문 시복식(諡福式)에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전 8시55분 서소문역사공원을 먼저 찾는다.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행사다. ‘하느님의 종’, 복자로 선포하는 124인 중 27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서울대교구에 따르면 기록이 남은 이들만 따져도 이곳에서 71인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했다. 국내 최대 순교지이고 세계적인 가톨릭 성지다. 조선시대 서소문 밖 칠패시장 인근은 형장으로 많이 쓰였다.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 국사범(國事犯)이 대상이었다. 교황이 광화문으로 바로 가지 않고 서소문공원을 출발점으로 삼은 건 한국 가톨릭에 대한 예우로 풀이된다.
250년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 1784년 이승훈(1756~1801)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때부터 한양 인구의 10분의 1인 1만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했다. 이들은 광화문 앞에 있는 형조와 종로의 포도청, 서대문 형장, 당고개(용산구 신계동), 새남터(이촌동), 절두산 등에서 숨져갔다. 이런 가톨릭의 성지를 이은 길이 ‘서울 순례길’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도들은 어떤 고초를 받고 어떻게 죽어갔을까. 그 단면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84) 주교가 쓴 『나의 서울 감옥 생활』에서 엿볼 수 있다. “(1878년 5월) 13일 월요일, 4시경에 형졸 하나가 목을 매는 데 쓰일 끈을 가져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문에다 걸어 뒀다. 곧 형이 곧 집행될 것이다. 누구 차례일까? 신자들이 끌려갈 때마다 마지막 사죄경(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기도문)을 읊을 준비를 했다. (중략) 만약 내 차례가 온다면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모든 성인들을 만날 수 있고 끝도 없는 영복을 누리리라.” 그는 프랑스로 송환돼 목숨을 건졌지만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교황의 시복식은 가톨릭 박해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담고 있다.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안명옥 주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이자 선포”라고 했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세종로에는 좌포도청(종로3가역 9번 출구 앞)과 우포도청(동아일보 사옥 앞)이 있었다. 천주교 초기 교회 모임을 이끌었던 김범우(?~1786)는 1785년 형조(刑曹·세종문화회관 앞 보도)로 끌려가 신문을 받고 유배돼 숨졌다. 포도청에서 고초를 겪다 죽어간 순교자들의 시신은 광희문(光熙門) 밖에 버려졌다. 광희문은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시구문(屍軀門)으로 쓰인 통로다.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원종현(신부) 부위원장은 “조선 말 광화문 앞은 순교자를 탄압하던 국가시설이 모여 있던 곳으로 124위를 복자로 추대하는 건 종교 탄압에 대한 용서이자 화해”라고 설명했다.
교황이 찾는 서소문역사공원이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갖는 상징성도 크다. 염수정 추기경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서소문 지역, 특히 서소문 밖 네거리는 처형지였지만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순교한 매우 중요한 성지”라며 “실제로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를 배출한 국내 최대이자 세계적 성지”라고 말했다. 이번 시복식에서 복자가 되는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종(1760~1801·천주교 평신도 모임 회장)도 서소문 형장에서 숨을 거뒀다. 조광(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고려대 명예교수는 “교황이 서소문에서 광화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고초를 겪은 순교자들이 사형터로 끌려가던 바로 그 길”이라고 했다. 이 길은 지난해 9월 서울대교구가 지정한 천주교 순례길 중 ‘생명의 길’의 일부다. 서울대교구는 지난해 서울 천주교 순례길을 세 구간(말씀·생명·일치)으로 나눠 지정했다. 명동성당에서 절두산 성지로 이어지는 총 28.42㎞ 코스다.
서울 순례길은 한국 가톨릭의 역사다. 1코스 말씀의 길은 한국 천주교의 심장으로 불리는 명동성당에서 출발한다. 초기 신앙 모임이 시작된 김범우의 집터를 지나 종로성당, 부활절 미사가 최초로 봉헌된 가회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첫 미사를 봉헌한 이는 한국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였다. 2코스는 최초의 성당인 가회동성당에서 시작해 서소문을 지나 약현성당에 이르는 길이다. 생명을 바친, 고초의 길인 셈이다. 세 개 코스 중 가장 길어 고난의 길이라고도 불리는 3코스는 일치의 길로 명명됐다. 새남터·당고개·절두산 성지가 포함돼 있다.
순례길 시작과 끝은 서울시가 선정한 미래유산으로 채워진다. 1코스 시작점에선 1892년 완성된 서울대교구 교구청과 1920년에 지어진 석조 건물인 명동 주교관 별관을 만날 수 있다. 2코스 중간엔 65년 완성된 작은형제회 한국관구가 있다. 3코스 마지막엔 절두산 순례성당이 있다.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67년 완성된 건물로 이태희 건축가의 작품이다. 원종현 부위원장은 “광화문 시복식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언어를 일반화하면 자기희생, 솔선수범, 나눔의 삶으로 바꿀 수 있다”며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순교로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나눔을 통한 풍요야말로 현대 사회가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 순례길 교황청 승인 추진 = 서울대교구는 지난해 지정한 성지 순례길 세 곳에 대한 교황청 승인을 추진 중이다. 교황청 승인을 받으면 세계적인 순례길로 인정을 받는다. 서울시와 중구·종로구는 가톨릭 미래유산에 대한 공원화와 관광벨트로 묶기 위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일종의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국내 최대 순교 성지인 서소문역사공원 순교 성지를 조성하는 사업에도 탄력이 붙고 있다. 서울 중구는 지난 3월 국유지인 서소문공원의 무상사용승인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8월까지 실시설계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해 2017년 9월 완공한다. 총 사업비는 513억원으로 기념전시관, 추모 공간, 순례길이 조성된다.
◆ 서울시 미래유산 = 서울을 대표하는 특색 있는 건물과 기념물, 주요 인물·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와 생활사 등 유·무형의 것들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 중앙일보 | 강기헌 기자 |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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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특별기획 - 서소문, 잃어버린 100년의 역사 |
| | 교황방한특집 · 서소문, 잃어버린 100년의 역사 2014-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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