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6 강
46. 피로 세운 언약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막14:22~26)”
가. 피로써 언약을 맺음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날 저녁에 베푸신 만찬에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했다. 또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하였다. 사람들은 왜 그 피가 죄를 사하는 것인지 잘 모르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에 세운 언약을 구약이라고 한다. 이 언약의 기초는 피였다.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단에 뿌리고 언약궤에 뿌리고 백성에게 뿌려서 상호 계약을 맺었다. 이 피가 계약의 기초였다. 우리가 계약할 때 도장을 찍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피 없이는 계약이 성립되지 않았다.
구약은 무엇인가? 구약은 여호와의 뜻을 사람으로 행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달성되도록 하려는 계획이다. 이것을 세움에 있어서 피로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율법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해서 피를 가지고 언약을 세웠다는 뜻이다.
왜 피로 언약을 세웠는가? 율법은 여호와 자신이다. 여호와 자신을 백성 속에 나누어 줌으로써 그 백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율법을 이런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계명이나 가르치는 교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율법 속에 깊이 들어가 보면 여호와 자신을 계명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15,3).” 이 말씀을 백성들은 단순히 그 말 그대로 지키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지킨다 해도 결코 하나님께 만족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하나님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하나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 가운데 그 어느 율법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율법은 없다. 그런데 목숨을 걸어 놓고 맹세를 하고 있다. 피를 놓고 계약을 하고 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약을 하면서 왜 피를 놓고 계약을 하겠는가?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왜 피를 놓고 계약을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죽음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것은 피가 없어도 우리의 노력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내 안에서 완성시키려면 우리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피가 왜 필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피를 뿌려 놓고 너희는 피로 맹세했으니 절대로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길 필요가 무엇이 있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또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표면적으로 지키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피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서 완성하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을 우리 안에 살게 하려면 우리의 죽음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로써만 모든 것이 완성된다.
나. 피로써 정결하게 됨
이것을 성경에서는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고 했다. 피로써 씻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 피로 씻어야 하고, 왜 피로써만 정결하게 되는가? 피가 아닌 것은 정결하게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죽음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의 죽음만이 그를 정결케 하고 완전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죽음 안에서만 여호와 하나님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만이 완전하고 죽음 외의 어떤 노력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죄 사함이 자신들의 양심의 죄라든지 사회적으로 지은 죄 같은 것을 씻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절대로 그런 것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예수님의 피가 그런 것을 씻어 준다면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벌써 다 없어졌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피를 흘려도 그런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것은 그것 때문에 흘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서만 완성되지 결코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을 계명이라는 방식으로 완성하려는 것이었다면 신약은 하나님을 그리스도라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완성시키려는 것이다. 이 언약을 예수의 피로 세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도 자신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피가 없이는 나눌 수가 없었다. 하나님도 율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율법으로 인해 손상을 입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 자신은 율법 이상인데 율법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 자신으로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율법을 선포하신 것은 곧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의 예로 든다면 예수님 자신이 무슨 말씀을 하셨다 해도 예수님은 그 말씀보다 더 크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그 말씀으로 나누어 주려면 자신의 죽음이 없이는 나누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죽음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 말은 완전한 말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가 하는 말도 그 말에 우리의 죽음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말도 말로서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죽음이 없이는 어떤 말도 우리의 생명을 완성할 수가 없다. 구약의 경륜을 완성하는 것도 피고, 신약의 경륜을 완성하는 것도 그 기초는 역시 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세울 때 피를 뿌려서 언약을 했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분배될 때 내가 무슨 방법이든지 부서져야 분배되지 부서지지 않고는 분배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존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분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여호와 자신의 부서짐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신약의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부서짐을 표현하는 것이다.
율법보다 크신 분이 율법으로 제한되신 것은 하나님의 부서짐이고, 말씀보다 크신 분이 말씀 안에 제한되신 것은 예수가 부서진 것이다. 부서지면 무엇이 나오는가? 당연히 피가 나온다. 우리 몸이 찢어지면 거기서 피가 나오고, 우리가 쪼개지면 거기서 피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보이셨지만 그 피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신약은 결국 분배된 그리스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어 먹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통해, 교회를 통해 완성시켜 나간다. 그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행20:28).”라고 했다. 왜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하는가? 그 죽음을 지불해서 샀기 때문에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결국 피로 값 주고 사서 거기서 부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분배될 때는 죽음을 통해서 분배된다. 그것이 우리 안에 생명이 되어 살아서 하나님 앞에 다시 드려질 때는 부활 생명으로 드려진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우리 자신을 찢어서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내게 돌아오는 것은 부활 생명으로 돌아온다.
다. 죽음만이 사람을 완전하게 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과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것은 구약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자기 자신이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우리도 그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역시 피를 흘려야 한다.
하나님이 율법을 선포할 때 그냥 선포하신 것이 아니고 피 흘림을 통해서 선포를 했다. 그러므로 사람도 피 흘림을 통해서만 완성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과 피 흘림이 없이는 구속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왜 죄 사함이 없는 것인가? 피 흘림이 없으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된 하나님을 완성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죄인으로 남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피가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죄를 씻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령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셨으니 내 죄가 씻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 속죄가 주관적인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은 이루어졌지만 내 속에서 주관적인 사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결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히9:22).”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결하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관적인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고 했다. 원수 되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러면 이미 예수님께서 가깝게 해 놓았는데 왜 가까워지지 않은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지만 우리 안에 와서 주관적인 체험이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는 화평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화평이 내게도 있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셨으면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 안에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고 했다. 옷은 그 사람의 행실을 말한다. 그 사람의 행실이 씻어져서 희어져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실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도 깨끗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깨끗하게 되는 원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안에 주관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희어져 깨끗하게 될 수 없다.
어떻게 죄가 없어지고 어떻게 정결케 되는가? 어떻게 화평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내가 희게 되었는가? 어떻게 우리가 교회가 되는가? 우리에게 주관적인 체험이 없이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이 성취된다.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 새 언약을 완성하는 것도 역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 구약 안에서 모든 아담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 아래 있었다. 왜 진노의 잔 아래 있었는가? 구약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분배된 생명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노의 잔 아래 놓여 있었다.
신약 안에서는 이것이 축복의 잔이 된다. 구약 안에서 진노의 잔이었는데 신약 안에서는 왜 축복의 잔이 되는가? 신약이란 주관적 사건을 말한다. 주관적 사건 안에서만 비로소 축복이 된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린 것을 보고 그것을 내 죽음으로 살려냈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 축복의 잔이 된다.
객관적인 피의 언약은 주관적인 피의 언약으로 바꾸어지는데 이 주관적인 피의 언약이 바로 축복의 잔이 된다. 새 언약은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밖에 있던 것이 사람의 속으로 들어온 것이며 객관적인 데서 주관적인 데로 들어온 것을 말한다.
피는 죽음을 뜻한다. 유월절에 문지방에 피를 발랐다는 것은 양이 죽었다는 말이지만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의 신이 지나가면서 그 집을 넘어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집이기 때문이다. 죽은 집에 들어가서 또 죽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 피는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 발라진 것이다.
라. 죽음을 통해 언약이 완성됨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세우신 언약을 우리가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우리의 죽음 안에서 완성되는 말씀이다. 도둑질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지키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이 없이는 그 말씀을 완성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죽음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머리에 수건을 쓴다고 해서 완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성경 구절을 그대로 지킨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피로써 언약을 세우겠는가?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입으로 명령만 하면 되고 선생의 입장에서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 결코 선생의 입장에서 세우신 것이 아니고 죽음의 입장에서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이 우리의 죽음 안에서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씨는 어디에서 열매를 맺는가? 흙에 와서 열매를 맺는다. 죽은 흙에 와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 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이 살아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 설 때 우리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말씀을 완성시켜 낼 수가 있다.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살아 움직인다. 그것으로 볼 때 ‘이 언약은 피로 세운 언약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님의 피, 이것은 새로 세운 언약이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에는 양으로 세운 것을 예수로 세웠으니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옛날에 양으로 세운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로 세웠다는 말은 우리 자신으로 세운 것을 말하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
모든 생명은 전부 그 생명이 완성되기 위해서 죽고, 다시 완성하고 죽는 과정을 거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는데 큰 식물이 자라나온다. 이상하게도 생명은 늘 변화의 과정마다 죽음을 통해서 변화하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참 기이한 일이다. 세상의 교훈과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교훈은 죽음과 관계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죽음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이 발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죽음이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 영이 말씀이 된다는 것은 죽음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가보면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커지지 않는다. 자기 안에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커지지 않지만 죽음 속으로 들어가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나온다.
이것은 기이한 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언약의 기초는 피다. 여기서 우리가 만일 죄인이라면 죄인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만일 사탄의 자식이라면 사탄의 자식이라는 것이 없어진다. 성경에 죄라고 표현되었든지 악이라고 표현되었든지 무엇이라 표현되어 있어도 모든 것에서 다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피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유대인의 관념에서 죄라고 표현했다. 죄라는 관념은 결국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방인의 죄의 관념은 양심적인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죄 때문에 고민하는 많은 사람은 모두 양심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역이 없어지는가? 죽음으로밖에는 거역이 없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여호와를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완성할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성하는 길도 우리가 죽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예수를 완성할 길이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주관적인 삶이 될 때 우리는 축복의 잔을 누리게 된다. 사실 사람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그 잔은 항상 넘치는 잔이다. 구약 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면 축복이고 무엇을 주지 않으면 축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는 그 사람 자신이 축복이다. 새 언약 안에는 사람에게 축복의 잔이 넘친다.
구약 안에서는 모든 것이 진노의 잔이었다. 우리 자신 안에 축복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것을 가지고는 축복의 잔이 되지 못했다. 계명을 아무리 지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었다.
지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축복의 잔 안에 있다. 주관적인 세계 안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살려내지 못한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살려낼 때 그것이 바로 축복의 잔이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 자신에게 넘치는 은혜가 된다.
|